약종과 승훈은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였다. 어둠 속에 잠긴 긴 침묵을 이승훈이 깨뜨렸다.
“나는 말일세 내 자신이 부끄럽다네. 작은 그릇에 하늘을 담으려 했으니 말일세. 처음 자네를 보고 무척 갑갑해 했었지. 자네는 천주교를 배우기는 하였으나 즉시 영세 받지는 않았네. 몇 해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영세를 받았지.
그런데 말일세. 자네는 영세를 받은 이후로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네. 자네 형제들도 자네의 신앙을 흔들어 놓지 못했단 말일세.
그런데 나는 뭔가? 기회가 될 때마다 배교를 하지 않았는가? 이 나라 최초의 영세자가 말일세. 그리고 아직도 나 자신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네. 내가 신앙인으로 순교의 관을 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국법을 어긴 죄인으로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나약한 내 자신이 너무도 밉다네.”
“형님! 이 세상에 죽음 앞에서 당당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또한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같은 범인과 같은 부류겠습니까? 형님이나 저나 모두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천주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수난 전에 올리브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며 지극한 번민에 쌓여 기도했지 않으셨습니까? 비록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기도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예수님께서는 천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이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
“약종이! 나라고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일세. 말은 할 수 있지만 행동은 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나라네.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이렇게 다른 줄은 정말 몰랐다네.”
“누구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얼마만큼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요. 마음과 행동이 같아지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번민과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님! 우리는 이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천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천주님께서는 이 고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고통속에서도 천주님을 증거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형님! 약한 마음 품지 마십시오.”
승훈은 약종의 말을 듣고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약종이! 살이 묻어나는 고통 속에서 내가 생각한 것이 무엇인줄 아는가?”
“……”
“내가 생각한 것은 왜 이런 고통이 주어지냐는 거라네. 차라리 천주님을 몰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박해는 없었지 않았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