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모(야고보)

 

  1784년에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사의 은총을 받기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는 1787년에 임시 준성직 제도의 자치 교회를 설립하였다. 초창기에 갓 영세한 신도들이 교리 지식의 부족으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교계 체제를 모방하여 10여 명의 지도급 신자들이 신부가 되어 미사 성제를 봉헌하고 죄의 고백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1789년에 이르러 일부 신자들이 여러가지 교회 서적들을 정독한 후에 비로소 이러한 성직 수행이 교회법에 어긋난 잘못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즉시 성사 집전을 중단하고 이에 대한 가부를 문의하기 위하여 북경 교구의 알렉산델 드 구베아(1808년 사망)주교에게 윤유일(바오로)이라는 신자를 밀파하였다. 북경 주교는 다시 이 밀사를 통해서 그의 친서를 보내면서 조선 왕조의 신생 교회의 존재에 기쁨을 나타냈으나, 교계 제도의 설정과 평신도의 성무 집행을 금지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와 제도를 설명해 주었다. 그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진산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대박해로 고해내 지도층의 변화를 가져왔다. 양반층의 지도자들이 사망하거나 순교 또는 배교하여 교회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지도층으로 중인계급이 등장하였다. 이때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최창현(요한), 최인길(마지아), 지황(사바), 강완숙(골롬바) 등이었다.


  이제 미사 성제에 참여하고 성사를 받아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갈망하던 조선 교회의 신도들은 구베아 주교에게 다시 1790년에 밀사를 보내어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북경 주교는 이 요청을 쾌히 승낙하고, 1791년 2월에 마카오 교구 소속의 레메디오스라는 포르투갈 이름을 갖고 있던 중국인 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신부와 조선 교회의 연락 교우가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지 못하여 첫 선교사의 입국은 실패하였다.


  그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박해를 받아 3년 동안 북경 교회와 접촉이 없었다. 1793년에 들어서면서 박해의 기운이 가라앉자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북경에 밀파된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난 구베아 주교는 성직자를 보내기로 결심하고, 조선인과 비슷한 얼굴 모습을 갖춘 42세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선정하였다.


  ‘벨로조’라는 포르투갈식 이름을 갖고 있는 주문모 신부는 1751년 중국(당시에는 청국) 강남성 소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일찍이 서구학문에 흥미를 느끼면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후에 그는 북경으로 올라가 북경 교구 신학교에 들어가 제1회 졸업생으로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신앙심이 깊고 중국 문화와 교회 신학에도 능통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그의 교구장으로부터 성무 집행을 위한 특권을 위임받고,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20일 동안의 도보 여행 끝에 약속된 장소에서 조선 교회의 연락 교우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 정부의 천주교 금압정책으로 국경 감시가 삼엄하므로 관문을 통과할 수 없어 청국과 조선을 갈라 놓은 압록강이 얼어야 월경, 잠입할 수 있기 때문에 강물이 얼게 되는 12월에 다시 만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주문모 신부는 약속된 날을 기다리면서 10개월 동안 구베아 주교의 지시대로 만주에서 교회를 순회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는 12월에 국경지대로 와서 연락 교우들을 만나 복장과 머리 모습을 조선식으로 바꾸고 감시를 피하면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2월 23일 밤에 입국하여, 다음해 1월에 한양(지금의 서울)에 입성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도착은 신자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주문모 신부는 신자들이 마련한 한양 북촌(지금의 계동)의 교우집(최인길 마지아의 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는 우선 성무를 빨리 수행하기 위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795년 성주간에는 세례와 보례를 집전하면서 한자를 통한 필문으로 신자들의 죄고백도 들었다. 마침내 부활 대축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이 나라의 신도들을 위한 최초의 미사 성제가 감격스럽게 봉헌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착한 목자로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신자들을 만나 영적 위로를 베풀었다.


  그러나 사목생활 6개월 만에 주문모 신부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그것은 한영익이라는 신입교우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과 거처를 조정에 밀고하여 6월 27일에 외국인 신부의 체포령이 포도대장에게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일부 신자들이 이 배교자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살핀 결과 그의 고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는 여신도 회장인 강완숙(골롬바)의 집 나무광-후에는 안채에 붙은 사랑-에 피신하였다.


  집주인 강완숙은 양반 집안의 출신으로 그녀의 신앙 때문에 시골집의 남편을 떠나 시어머니와 자녀들을 데리고 상경하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의 사회 풍습에 따르면 양반 집은 관헌의 사찰과 가택 수색을 받을 수 없었고, 더욱이 부녀자가 주인인 집에는 외부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고유한 관습을 이용하여 주문모 신부는 이 집을 그의 사목 활동의 본부로 정하고 이제는 비밀리에 성무를 수행하면서, 그가 순교하기까지 6년 동안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다.


  그 동안에 그는 언어 소통도 어느 정도 가능하였고, 풍속에도 풍분히 익숙하기에 이르러서 지방을 조심스럽게 순회하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그러나 발각의 위험 때문에 그의 가정 방문과 사목 활동은 비밀에 싸여 극히 제한되어 있어 열심한 신자들이 신부를 뵙고 성사를 받지 못하여 서운한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한된 활동 속에서도 주문모 신부는 그가 입국한 이후로 6천여 명의 신자들을 증가시켰고,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었다. 그 중에는 왕족도 끼어 있었다. 1786년에 역모죄로 그의 남편들이 사형 또는 귀향에 처하여진 두 부인들은 폐궁이 된 그들의 거처인 양재궁에 신부를 모셔 성사를 보면서 영적 위로를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그의 사목 활동수행에 있어서 조선 교회의 신자들에게 끊임없는 열성과 뛰어난 재능, 그리고 놀라운 덕행을 보여 주었다. 당대의 신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ꡒ주문모 신부는 일에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지경이었다. 밤에는 성직을 행하고, 낮에는 책을 번역하거나 책을 새로 쓰거나 하였다. 그는 금식과 극기를 행하고, 자기 본분에 온전히 헌신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의 덕행의 광채를 기적으로 더 빛나게 하고자 하신 것 같다. 믿을 만한 전설에 의하면 그가 한양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에 창골에서 화재가 났었다고 한다. 불이 24시간 계속하였는데 그 때에 주문모 신부는 그 무서운 피해를 딱하게 여겨 자신은 현장에 갈 수 없으므로, 송 필립보의 젊은 아들을 보내어 불길에 성부를 뿌리라고 명령하였다. 젊은이가 심부름하는 동안에 주문모 신부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거의 즉시 바람의 방향이 바꾸어 폐허밖에 남지 않은 쪽으로 불길이 몰아쳤다.


  그리고 신부는 특히 신자들의 교육과 신앙 향상에 유의하였다. 그는 직접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명도회라는 교리 강습 및 연구 그리고 전파를 목적으로 한 단체를 설립하였다. 이 모임의 회원들은 자신들이 천주교 교리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신앙의 진리를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는 데에 서로 격려하고 협조하였다. 황석영의 진술에 의하면 이런 모임이 여섯곳에서 열렸다하여 육회(六會)라고도 불렸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의 정부 당국으로부터 신교의 자유를 얻고 안전한 선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북경 교회와 연락을 계속하였다.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포르투갈 왕에게 대선박 사절단의 파견을 요청, 조선 왕국과 포르투갈이 국교를 체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주 신부는 이 편지를 북경교회에 전달할 사람으로 신자들이 천거한 황심(토마스)을 택하였다. 이 밀사는 옥천희(요한)와 함께 1797년에 조선 왕국의 동지사행에 끼여 북경 주교를 방문하여 편지를 전하였다.


  북경 주교는 주문모 신부와 조선 교회 신자들의 건의에 대해서 ꡒ내가 마땅히 우리 나라(포르투갈) 왕에게 보고하겠으나 배를 청하여 오게 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우리 나라에서 만일 조선 왕국에 금교령이 있는 줄을 알게 된다면 국가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이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 믿지 마십시오.ꡓ라고 답변하였다.


  이후에도 1798년부터 1800년까지 매년 밀사들이 파견되어 북경의 구베아 주교를 방문하여 조선 교회의 편지를 전달하고 답장을 받아왔다. 북경 주교는 서양의 큰 선박이 파견되는 것은 어렵다고 전하면서도 성직자는 계속 보내겠다고 답하였다.


  또한 주문모 신부는 신자들의 악습을 엄하게, 그러나 지혜롭게 꾸짖어 개선된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의 신심 생활을 위해서 「사순절과 부활 시기를 위한 안내서」라는 저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신자들이 고백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때에 갖추어야 할 마음의 준비에 대하여 설명한 신심서로서 후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또다시 배교자의 밀고의 대상이 되었다. 김여삼이라는 냉담 교우가 신부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미움과 개인적 물욕 때문에,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은신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포도청에 가서 고발하였다. 이 때에 밀고자는 관리에게 봉급이 많은 관직을 보장받고, 신부의 처소에 안내해 줄 날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김여삼은 여행중에 병이 들어 귀가하지 못해 관리를 만나지 못하여 주문모 신부의 체포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다행하게도 주문모 신부는 이러한 사실을 어느 신자를 통해서 보고받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1801년 1월 10일(음력)에 섭정을 하던 정순왕후 김대비는 어린 국왕 순조의 이름으로 천주교를 엄금하는 윤음을 반포하면서 천주교 신도들을 색출하여 체포, 구금하고, 엄벌에 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신유 대박해’ 동안에 수많은 신자들이 구속되고, 주문모 신부의 은신처를 추궁받으면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 때에 주문모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고 희생되는 것을 보고, 잠시 그의 고국에 귀국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가 귀국하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교회 박해가 중지될 것이고, 이러한 소란이 잠잠해진뒤 다시 잠입하여 활동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경희궁에 2일 동안 머문 후에 2월 22일(음력)에 북행 귀국 길에 들어갔다. 그러나 도중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착한 목자로서 자기 양떼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 정부 당국의 박해 초점을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 신자들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아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한양에 되돌아와, 3월 12일(음력)에 의금부에 나타났다.


  주문모 신부는 관리에게 자기의 신분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ꡒ나는 천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인데, 들으니 조정에서 그것(천주교)을 엄중히 금하여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다고 하니, 살아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기에 스스로 와서 죽기를 구하는 것이요.ꡓ


  ꡒ내가 당신들이 사방에서 헛되이 찾는 그 신부요.ꡓ


  그리고 나서 그는 감옥에 갇혔다. 곧 이어 심문관이 문초중에 주문모 신부에게 입국 이유를 물었을 때에, 그는 ꡒ내가 조선에 온 것은 한 가지 목적뿐이오. 즉 참된 종교를 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불쌍한 백성의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었소ꡓ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취조받는 중에 성직자로서의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으나 그의 신자들에게 불리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울러 주문모 신부는 천주교인들이 반역죄로 기소, 처형되는 사실에 대해 변론을 통해 항의하였다. 그는 천주 십계는 다른 나라를 해치는 일을 엄금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와 천주교 신자들은 역적 행위를 할 사유가 없다고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1801년 4월 19일(음력) 조정에서는 주문모 신부가 외국인 특히 청국인이라는 점에서 외교 문제 때문에 격론이 일어났으나, 다수 강경파의 주장대로 그를 군법에 회부하여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던 처벌)에 처하여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결정하였다.


  같은 날 오후에 주문모 신부는 감옥에서 끌려나와 형 집행의 절차상 우선 다리에 30대의 매를 맞고 들것에 실려 군대의 사형집행 장소인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갔다. 그가 사형장에 도착하자 형리는 신부의 양쪽 귀에 화살을 꽂고 죄목을 나열한 조서와 판결문을 읽게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침착하게 다 읽고 난 후에 주위에 모여 있던 군중을 향하여 힘차게 ꡒ나는 천주교를 위하여 죽습니다ꡓ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머리를 숙여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문모 신부가 치명하는 순간에 ꡒ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 소리와 억수같이 퍼붓는 비와 캄캄한 하늘을 사방에서 갈라 놓은 번개ꡓ 등은 사형 집행자들과 구경꾼들뿐 아니라 장안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무지개가 서고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았다. 특히 주위에 있던 신자들이나 외교인들은 모두 한결같이 두터운 마음으로 ꡒ이렇게 무서운 표적을 내는 것을 보면 하늘도 이 치명자의 운명에 무심하지 않는구나ꡓ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에 대해서 같은 시대의 사람인 황사영(알렉산델)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ꡒ이 때에 한 교우는 3백리 밖에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또 한 교우는 4백 리 밖에서 환난(교회 박해)을 피해 가 있었는데, 바람과 천둥이 이상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날 반드시 무슨 괴상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날짜를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신부님이 순교하셨다는 말을 듣고, 따져 보니 바로 그날 그 시간이었다.ꡓ


  순교자 주문모 신부님의 머리는 5일 동안 처형장에 높이 매달려 있었고, 군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매일 밤 무지개가, 또는 찬란한 빛이 그 시체 위에 나타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 많은 외교인들이 큰 감명을 받았고, 이는 여러 수기에 기록되어 천주교인들과 외교인들의 일치된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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