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申) 마리아

 

조선왕조 후기로 들어오면서 성리학의 영향으로 극단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이 발달되고 그 폐쇄성이 정치나 사회에 미친 영향 때문에 조선왕조 초기에 참신하게 적용되었던 문화적인 능력은 퇴색하게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워인 때문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모순과 사회적인 갈등이 쌓여져서 국내외적인 부패와 정치적인 실책이 거듭되었다. 그 정치적인 실책 중에서도 가장 큰 치명적인 정책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후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갑작스런 천주교 박해와 이로 인한 대량의 양민학살이었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대내외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겠으나, 우리는 사적(史的)으로 볼때 조선말기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박해사건을 결코 호의적으로만 보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이와같은 박해의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가정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악의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천주교와 그 가족들과는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병인교난(丙寅敎難, 1866년)이 발생하기 그 이전에 있어서 이조왕가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한 번 고찰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겠다. 천주교와 이왕가(李王家)는 그 전래 시초부터 박해자와 피박해자라는 관계를 가졌지만, 한편 천주교가 전래 되었던 그 초기부터 이왕가와 천주교 사이에는 밀접한 접촉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대충 그 사례로써 이왕가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이왕가의 사람으로 천주교와 접촉한 분은 바로 병자호란 후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간 인조왕(仁祖王)의 세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청국에는 왕실에까지 천주교가 유포되어 있었고 중요한 곳에는 대성당들이 세워져 있어서, 청에 가는 사신들이 가져온 서책을 통하여 조선사회에 천주교가 수용되었거니와, 소현세자 역시 청나라에 인질로 있는 동안 이미 그곳에 보편화된 천주교와의 접촉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마침 그 곳에 선교사로 와서 봉직하고 있었던 아담 샬(   苦望, Johannes Aeam Schall von Bell) 신부와 상당한 친교를 맺었던 것으로 소현세자가 본국으로 귀국 할 때는 많은 서양문물과 서적, 성물 등은 물론 청나라 황제로부터 내려진 천주교 신자인 환관과 궁녀까지 대동하여 귀국했던 것이다. 한편 아담 샬 신부의 서신연락 내용에는 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고국인 조선에 천주교를 유포시키겠다는 은밀한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그후 소현세자는 귀국하여 불행히도 3개월만에 갑자기 사망하였던 것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여러 사가(史家)들의 추리에 의하면 그의 죽음은 대단히 의문스러운 점이 많이 있었다.


  즉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조선사회에 극도로 생소하고, 그 사회의 근본 정치이념인 유교사상과 상반되고, 이단시되는 천주교 문물과 더욱이나 천주교 신자였던 환관과 궁녀를 대동하고서 조선궁중에 들어왔을 때, 조선 궁중에서는 온갖 잡다한 소문과 모함으로 소현세자 일가를 헐뜯었음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조정에는 청에 대한 굴욕의 악감정이 만연했던 때로써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아무리 좋은 문물이라도 선의로 받아들일 상태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왕위 계승할 세자의 몸으로 생소한 사학(邪學)이라고 하는 종교를 들여 왔다고 할 때 궁중이나 부중(府中)의 여론이나 그 반응이 어떠했겠나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자는 급기야 부왕인 인조의 미움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에 왕위계승을 하지 못했음은 물론,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지금까지도 궁중의 비사(秘史)로 남아 있는 것이다. 즉 소현세자의 죽음이 부왕의 독살이 아닌가 하는 것이 몇몇 사가들의 견해이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사망했다고 한다면 소현세자는 천주교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천주교의 이왕가와의 관계를 가장 우호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정조의 이복형제였던 은언군(恩彦君)의 부인 송씨(宋氏)와 그의 큰 자부(子婦)였던 신씨 부인의 천주교 입교이다. 이 두 부인들은 각각 교명을 ‘마리아’라고 하는데 강완숙(골롬바)의 전교로 하여 폐궁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입교했으며, 뿐만 아니라 신유교난 때 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후에 대원군 자신의 부인 역시 입교하여 영세를 받고 죽었다는 사실은 묵인할 수가 없는 천주교와 조선왕가의 접촉이었으며, 특히 이와같은 왕가와의 접촉이 왕족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이제 그와 같은 왕족여성이 어떻게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는가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통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863년 12월 8일 조선왕조 25대 철종(哲宗)이 세도정치의 희생으로써 급서하니, 철종은 바로 앞서 언급한 은언군 인(인)의 손자이며 전계군(全溪君) 광(광)의 제3자이다. 은언군은 일찌기 정조 10년에 그의 큰 아들이던 상계군(常溪君)이 모반죄(謀叛罪)로 몰리어 죽게되자 동월(同月)에 그의 제3자 전계군(全溪君)과 더불어 강화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따라서 은언군의 부인이던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서울의 구궁(舊宮)인 양제궁(良제宮)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양제궁은 은언군의 친모인 양제(良제) 부안 박씨(扶按朴氏)가 거처하던 궁의 이름으로 전동(전洞)이며 역적의 궁이라 하여 폐궁으로 불렸다.


  이때 강완숙(姜完淑)은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여 1791과 1792년 이후부터 접촉하기 시작해서 천주교에 관한 교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일은 대단히 어려웠던 것이니 이들 왕족 부인들과 접촉한다고 할 때 어떤 불상사를 염려하여 아무도 폐궁의 부인과 접근하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완숙은 그런 겁을 내지 않고 그  두 왕족 부인을 보러 갔으며 뿐만 아니라 마침내 주문모 신부까지도 그 집에 모시고 가서 그들로 하여금 영세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에 몰입했고, 천주교 서적을 열심히 읽었으며 자주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가 설교를 경청하면서 모든 천주교의 수계범절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물론 강화도에 귀양간 은언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은언군은 끝까지 천주교인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신유년(1801년)에 사사되었다. 결국 은언군은 정조왕이 살았을 때 그를 그렇게 죽이기를 꾀하던 무리들 속에서도 정조의 보호로 생명만은 유지하다가 이렇게 정순왕비의 손에 죽에 되었던 것이다.


  한편 강완숙과 이 왕족부인들과의 교류는 대단히 친밀하였고, 이 왕족부인들은 자신의 궁녀들에게도 이 천주교를 가르쳐서 입교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또 명도회(明道會)의 회원으로도 가입하여 신앙생활과 비밀리에 사회활동에도 관여하였던 것으로, 후에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완숙이 체포되자 올데 갈데가 없었던 주문모 신부의 최후의 피신소를 이 두 왕족부인이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왕족부인들은 강완숙과 더불어 당시 조선천주교회 안에서 중요한 신자로써 활약했고 그들은 함께 모여 주 신부와 미사를 지냈으며 서로 빈번히 왕래하면서 활발한 여신도들의 활동에도 가담했던 것이다.


  1801년 신유년 대교난이 발발했을 때 이 양제궁의 궁녀였고 신자였던 서경의(徐景儀)의 밀고로 이들의 비밀이 폭로 되었는데, 그 내용을 대강 간추려 보면, 은언군의 부인인 송씨와 그 자부인 신씨부인이 천주교 서책을 배우기 좋아해서 강완숙이 대단히 잘 경문(經文)을 해석해 주었으며, 그 때문에 자주 왕래하면서 두 부인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두 부인 역시 여러차례 밤에 강완숙의 집에 가서 교리를 베우는데 궁녀인 서경의도 함께 왕래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경의는 자신이 목격한 주문모 신부를 폐궁에 은닉했던 광경을 밀고하고 있다. 이와같은 주문모 신부의 은닉죄를 책하여, 주문모 신부가 사태의 급박함 때문에 자수한 후에 4월 28일(음 3월 16일) 김대왕대비(金大王大妃)는 두 부인들에게 사사를 인준하고 다음날 그들은 즉시 사사되었다.


  그들은 아무런 재판도 신문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어떠한 법적 형식도 거치지 않은 채 대왕대비 김씨는 주문모 신부에게 피신처를 제공하였던 이 왕족부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그 명문은 다음과 같다.




  강화읍에 갇힌 죄인 인(인)의 처 송씨(宋氏)와 상기 죄인 인의 아들 담(담)의 처 신씨(申氏)의 사건에 대하여 시어미와 며느리가 둘다 사학에 물들었음이 명백하고, 이들이 고약한 외국 종자와 상통하고, 외국인 신부를 보았으며, 또 엄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염치없이 그를 자기들 집에 숨겨 두었음이 명백하다. 이런 중대한 죄를 생각하면, 그들은 하루라도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음이 만인에게 명백하다. 그런즉 그들에게 독약을 내려 둘이 함께 죽게 하라.




  이 명령은 곧 집행되어 몇 시간 후 이 두 왕족 부인 신자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자살죄를 피하기 위하여 그 독약을 스스로 먹기를 거절하여, 그것을 억지로 먹여야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는 그들의 신앙과 박해받는 주신부에게 용감하게 거처를 제공하였다는 죄목으로 희생 되어 죽었다. 그들의 감화적(感化的)인 최후에 대한 다른 사항은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곳 폐궁은 엄중히 닫혀 있고 일체의 외부 사회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후의 사정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이왕족 부인들의 오랜 불행은 섭리(攝理)의 비밀한 계획 속에서 그들의 입교와 영복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신앙적으로 말할 수가 있다. 그들은 신앙생활에 끝까지 충실하고 그들의 열심과 인종과 그들의 명성과 지위로, 새로 발전하는 당시의 조선 천주교회에 크나큰 격려를 주었다고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자연 그들과 함께 신앙을 받아들인 궁의 여러 나인들의 죽임을 초래하였는데, 폐궁나인 강경복(姜景福)과 폐궁에 출입하였던 김연이(金蓮伊) 등 여러명이 5월 22일에 같이 사형언도를 받앗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들은 서소문밖에 형집행을 위하여 마련된 작은 집에 가서 독약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이들의 수자와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적어도 순교한 이가 둘 이상이엇음은 확실한데, 어떤 사람은 다섯 사람이었다고까지 말한다. 폐궁 나인 중에서 밀고자 서경의는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왕족 부인들의 순교와 신앙활동은 역시 역적 모의를 하였다는 구실로 이미 강화에 유배된 송 마리아의 남편이며 왕족인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인)의 사형선고까지도 초래하였다. 그의 정치적 적들은 이 왕족 부인들이 천주교 신부와 연락을 한것은 국가의 안전을 해치는 어떤 모반 음모를 꾸미는 것밖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으며, 은언군이 이 음모를 조정하는 비밀 주동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 무고(誣告)를 대왕대비 김씨에게 제출한 상소문에 포함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ꡒ역적 인(인)의 처와 역적 담(담)의 처는 궁중 그윽한 곳에 들어 앉아 악한 종자와 상종하였습니다. 우선 여러 비루한 여종들을 통하여 길을 마련한 다음 매일 밤 왕래를 하였으며, 사학 죄인(邪學罪人)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고, 다음에는 법을 피하여 다니는 자들을 감추고 숨겨, 그들의 거처를 역적들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의도와 비밀한 계획은 마침내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두 여자만의 일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흉칙한 음모의 주동자는 분명히 이인(李인) 자신입니다. 그는 흉계를 꾸미는 것을 지휘하였는데 내외가 화합해서 장차 일을 도모하려고 꾀했습니다. 인의 처와 담의 처를 사형하라시는 명령은 아무 의심할 바 없이 근본 원리를 튼튼히 하고 악인들의 음모를 막기 원하시던 성덕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인을 다만 일각이라도 천지간에 용납하여 두면 역적들의 형편은 이전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인에게도 사약을 내리시어 그를 죽게 하시기를 삼가 청합니다.ꡓ라고 햇다.


  대왕대비 김씨는 무고당한 이 불행한 왕족을 변호할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리나 지당한 상소하고 여겼다. 얼마 안 있어 비록 선왕의 동생이요 천주교를 선봉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인은 조정에서 공식으로 내린 사약을 받아야만 했다.


  이상은 초기 천주교와 조선왕조의 왕족가부인(王族家夫人)들의 관계를 서술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부인들은 물론, 1801년 5월 29일에는 송씨 부인의 남편인 이인에게도 사약이 내려져 죽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경위로 하여 조선천주교는 이왕가와의 접촉이 초기부터 쉴새없이 있었고, 특히 부녀자들과의 접촉이 큰 특징이었다. 또한 25대 철종이 바로 이렇게 불행하게 죽은 은언군의 직손자였기 때문에 철종의 재위시에는 심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없었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빠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이 시기에 활약이 괄목할만 했던 것이다.’


  여하튼 다른 원인이 있는지는 몰라도 전왕(前王)들에 비해 철종조에서 전혀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없었던 것은 이상과 같은 철종의 가족적인 관계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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