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헌(프란치스코 )

 

  윤지헌(프란치스코)은 1791년(정조 15)의 신해 교난(辛亥敎難)때 순교했던 유명한 교우 윤지충(尹持忠․바오로)의 동생으로, 전라도 진산 지방의 수심대(水心臺 :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이 조상들은 전라도 해남에서 양반으로 자주 벼슬길에 올랐으며 학문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는데, 부친 윤 경(尹燝)이 결혼한 후 진산에 정착하여 의업(醫業)으로 생활하였다.


  형인 바오로가 1784년에 이미 천주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도 이 때쯤 천주교를 알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형으로부터 실제로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것은 몇 년 후인 1789년 무렵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입교한 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으나, 형인 바오로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순교한 후부터는 고향을 떠나 생활하였다.


  고향을 떠난 그가 정착한 곳은 고산(高山) 지방의 영동(靈東)이라는 고을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진심으로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여러 교우들과 연락을 하며 교회의 일을 돌보았다. 당시 조선 교우들은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는바, 그는 교우들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던 윤유일(尹有一․바오로) 최인길(崔仁吉․마지아) 지 황(池璜․사바) 등을 위하여 비용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였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게 되자, 그는 이존창(李存昌․루도비코)의 집으로 찾아가 신부를 뵙고 영세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신부를 따라다니며 교리를 배우고 첨례(瞻禮)에도 참여함으로써 신앙심을 굳혀 나갔다. 한편 신부를 모실 적당한 사람으로 황 심(黃沁․토마스)을 추천하여 그로 하여금 임무를 충실히 행하도록 도와 주기도 하였다.


  1801년에 시작된 신유 교난이 확산되어 전라도 지방도 탄압을 받게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교회의 소식을 알고자 유항검(柳恒儉)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당하게 되었다. 감사는 그가 신해 교난 때 순교한 윤지충의 동생임을 알자 원한의 마음을 가지고 보다 더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고 그 동안의 일을 실토하라고 명령하였다.


  감사가 질문하는 서양 선박을 초빙하는 문제에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으나, 교우들이 그러한 일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찬성을 표하였다고 자백하였다. 그렇지만 배교를 하거나 신앙심을 잃지는 않았다. 감사는 이제 프란치스코와 여러 교우들의 행위를 확신하고는 조정에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보고를 받는 즉시 그 일행을 모두 포청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포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다시 한번 신문과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죄가 천주교인으로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음모에 연루된 것이었기 때문에 판결은 오랜 시일을 끌게 되었는데, 그 해 10월 18일(음력 9월 11일)의 결안에서 이들은 역적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프란치스코는 국가에서 금하는 종교를 믿어 윤리를 파괴하고, 외국인 신부의 입국과 서양 선반의 초빙에 관여하였다는 죄로 능지처참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하여 즉시 전주로 다시 이송되어 순교함에 이르니, 이때가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로 그의 나이 38세였다.


  비록 그가 감사의 질문에 자신의 행적을 자백하였다고는 하나, 이미 그러한 일은 모두 명백하게 드러난 일이었으며 더욱이 그가 신앙심만은 잃지 아니한 것으로 보아 그의 순교는 형 바오로의 순교를 잇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그의 자산은 몰수되고 가족들도 그에 따른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아내 종항(宗恒)과 5명의 자녀들은 각기 다른 곳으로 유배되어 노비(奴婢)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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