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애(韓新愛․아가다)의 신심이나 신앙 생활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으나 양반 출신의 과부로서 당시 유명한 여교우로 후에 순교한 강완숙(姜完淑․골룸바)처럼 활약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느 정도 예절을 배우면서 성장하여 입교한 후 천주교 교리에 열심이었고, 또 천주교 전파를 위하여 여생을 바쳤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가 종교 생활에 다른 여신도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양반이어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고, 자녀로는 조혜의(趙惠義)라는 딸(그의 혜의의 계모였음)뿐이었다는 데 있다.
강완숙하고는 같는 양반이었고 서로 남편과 사별했다는 점에서 처지가 같았으므로 매우 친숙한 사이였다. 「사학징의(邪學徵義)」에는 아가다가 강완숙의 집에 수십 일씩 머물렀으며 주문모 신부에게서 영세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녀가 강완숙의 집에 장기간 유숙했던 것은 그 곳에서 강완숙과 함께 선교활동이나 교회 사무를 처리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녀는 중인 이합규, 양반 정광수(鄭光受)와 함께 성서를 강독했으며 자기네 집 비복들에게도 선교하여 교리를 가르쳤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녀가 천주교 교리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또한 강완숙과 마찬가지로 남녀 유별이나 계급의 귀천에 개의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녀는 강완숙의 집과 자기 집을 다니며 심부름을 했던 김연이(金連伊)와 참판 이중복(李重馥)의 아내였던 신 소사(申召史)에게 전교하여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 교난이 일어나자 그녀는 자신이 양반이므로 자신의 집이 다른 곳보다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집과 강완숙의 집을 다니며 심부름했던 정복혜(鄭福惠)가 각처에서 천주교 서적이나 성물을 거두어 주자 이를 도맡아 자기 집에 감추어 두는 용기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처럼 폭넓게 영향력을 발휘하며 활동하다가, 마침내 1801년 2월에 체포되어 5월 22일 참수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