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이 그녀는 서울 계동 용호영 안에 살았으며, 그녀가 처음으로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조예산의 처 한소사에게서였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영세는 주 신부로부터 받았다. 그녀 역시 정복혜와 마찬가지로 평민의 부인으로서 남녀 지도급 교우들의 연락관계를 담당했는데, 문초기록에는 그녀가 연락을 맡았던 교우가(敎友家)로 홍필주의 집(강완숙의 집)을 비롯해서 참판 이가환(李家煥)의 집, 조예산의 집 등이 있었으며 주문모 신부의 지도아래 모든 교우들과 더불어 미사참례를 했다. 뿐만 아니라 궁내에 사람을 보내어 폐궁나인인 강경복과 서경의 등을 안내하여 주신부의 강론을 듣게 하고, 강완숙의 집에서 교리강학을 했다. 이때 강완숙은 언제나 책을 가지고 송경을 인도했다.
신유박해가 발발하자 그녀는 강완숙의 부탁을 받고 황사영을 숨겨 주었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황사영은 신유년 정월 이십일, 김의호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2월 6일 임대인이 밀고하여 체포령이 내리자, 강완숙의 주선으로 계동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이어 이용겸(李用謙, 호는 동학)과 김백심(金百心, 호는 啓元)의 집으로 옮겨 피신하였다. 황사영은 이들과 김연이의 집에서 3일을 같이 지냈다. 그후 황사영은 그 곳에서 다시 석정동의 권철신(權哲身)의 조카인 권상술(權相述)의 집으로 옮겼다가 뒤에 제천으로 피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록 등을 미루어 보면 당시 여교우들 대부분이, 아직 부녀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리지 않은 것을 기화로 남교우들에게 치신처를 제공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당시 교회내의 여교우 중에서 평민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냈으며, 교명은 유리안나로 1801년 5월 22일에 참수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