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경언 바오로는 조선의 시조인 태조의 서자 정령군의 후손이었으며 그의 부친 이윤하는 조선에 「천주실의」를 소개한 이수광의 8대 후손이다. 어머니 권씨는 초대 열성 교우였던 권일신의 동생으로 이 바오로는 바로 권일신의 생질이었다.
이미 천주교와 관계가 깊었던 집안이라 바오로도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 진리를 믿고 있었다. 「종회」라고도 불리었던 그는 가냘프고 허약한 체질을 갖고 있던 반면 정신력은 매우 강해 그의 신앙생활을 받쳐 주는 힘이 되었다. 부친은 1779년경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서부터 1785년까지 권철신․일신 등과 함께 조선교회 창설기에 활약하였는데 을사추조 적발 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은 형조로 달려가 빼앗긴 성상과 서적의 반환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가정적인 면에서도 「부전자습」(父傳子習)으로 자식들에게 천주교를 신봉하도록 교육하였다. 한편 그의 모친은 천주교 교리에 더욱 열심이어서 자녀들을 신심으로 기르는데 일생을 다 바쳤다.
박해가 시작되기 전까지 바오로의 집안은 평온하였으며 생활에도 어려움이 없었으나 1801년의 신유 교난으로 인하여 그의 형 이경도 가롤로와 유명한 동정부부 생활하였던 누님 이순이 루갈다가 1802년 1월 29일과 31일에 각각 순교하자, 집안은 완전히 파산되고 말았다. 이제 겨우 10살 밖에 되지 않았던 바오로는 모친과 형수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갔다.
장성하여 어느 중인 집에 장가를 들은 후 바오로는 아내의 성격 때문에 항상 풍파를 겪었지만, 그는 이것을 모범적인 인내로 참아 견디었다. 1815년에 어머니와 형수는 연풍에 사는 큰형 집으로 낙향하고 그들 부부만이 서울에 남았다. 비록 속병으로 항상 괴로운 고생을 하였을지라도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불평도 나오지 않았고 늘 명랑하고 화평한 얼굴로 끊임없이 성서와 신심서 읽기에 열중하였다. 그는 교우들 집에 순명하기를 좋아하여 성직자가 없었던 당시 한국교회의 지도자로써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살폈으며 냉담자를 권고하며 모든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기에 힘썼다. 또한 외교인들을 귀화시키는 일에 정력을 쏟았으며 자기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었으나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을 덜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 바오로는 언제나 스스로 성찰하여 사람들에게 혹 자기의 언행이 죄의 기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신심은 참으로 진실한 것이어서 훗날 그가 옥중에서 현석문 가롤로에게 보낸 편지 한 장에 이런 훌륭한 글귀가 있다. ꡒ우리의 우의는 보통 우정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 결점을 들어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걸세.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한 보배였던지를 참으로 알 수 있게 되네.ꡓ그가 기도나 묵상에 전심할 때에는 그의 정신이 어떻게나 천주의 생각에 몰두하였던지 옆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때때로 그는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하여 성서를 베끼고 상본을 모사하여 교우들에게 팔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 북경에 보낼 교우들을 위하여 노자를 마련하는데 많은 힘을 쏟기도 하였다. 또 북경 주교가 회장 몇 사람을 선발하라고 하자 그는 그 회장들을 양성하는 데 크나큰 열성을 보여 매월 첫 주일에 집에 모여서 그들에게 묵상자료를 주며 참된 신심을 가지도록 격려하였다. 이와같은 활동으로 그는 무목시대(無牧時代)의 교회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이 바오로는 늘 마음 속에 순교하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어 즐겨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자료로 삼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천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할 준비를 하라고 권고하며 ꡒ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천주교가 퍼지게 하려면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합니다ꡓ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하루는 돈많은 젊은 과부로부터 청혼이 들어왔는데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청혼이 있자 이 기회를 성교회의 전파로 삼아 그 과부를 만나서 진리를 이야기 하였고 결국 그 과부는 입교하게 되었으며 얼마후 갑자기 죽음에 이르러 그녀는 그에게서 대세까지 받게 되었다.
1827년에는 정해 교난이 전라도 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교우들이 체포되고 있었다. 이 때 그는 사방에 책과 상본을 전파하였던 사실 때문에 고발되었다. 전주 포졸들이 그를 잡기 위하여 서울로 파견되었고, 마침내 4월 21일에는 그를 체포하여 포청으로 압송하였다. 이제 바오로는 형님과 누님의 영광스런 발자취를 따라 신앙을 용감히 고백함으로써 조선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천주교인들에게 찬탄을 받을 수 있는 모범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먼저 형조로 압송된 이튿날 포장은 그를 불러다 놓고 이렇게 질문하였다. ꡒ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참말이냐?ꡓꡒ그렇습니다.ꡓꡒ누구에게서 배웠느냐?ꡓꡒ저의 형님이 이 교(敎) 때문에 돌아가신 만큼 어려서부터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종교 때문에 처형된 조숙과 친근해서 여러 해동안 그와 함께 이 천주교를 봉행하였고, 온전한 마음으로 천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ꡓꡒ지금이라도 배교한다면 목숨을 보전하여 살려주겠다.ꡓꡒ할 수 없습니다.ꡓꡒ네가 천주 화상을 그렸다는 것이 사실이냐?ꡓꡒ예, 틀림없습니다.ꡓ이러한 말을 주고 받은 다음 다시 옥으로 끌려갔다. 3일 후 형조판서는 정승의 재가를 얻어 그를 전주 포졸들에게 인계하였고, 그들 일행은 전주르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 길을 떠나면서 바오로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지만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길을 가셨는데 내가 왜 이 길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나는 예수를 한발 한발 따라가겠다.’ 이렇게 결심함으로써 그는 기운을 돋구었다. 그들 일행은 4월 28일 저녁에 전주 진영에 이르렀고, 바오로는 거기서 잠깐 쉰 다음에 영장 앞에 끌려 나갔다. 영장은 그의 성명과 조상 몇 분의 성명만을 물어보고는 그를 다시 옥으로 데려 가도록 하였다. 두 발과 두 손에 쇠고랑을 채우고 목에는 큰 칼을 씌웠기 때문에 그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울 수 밖에 없었다.
이튿날 진영에 끌려 나가니 영장은 ꡒ그림을 몇 장이나 그렸으며, 책은 몇 권이나 가지고 있고, 공범은 누구 누구냐?ꡓ하고 물었다. 바오로는 솔직히 대답하여 전에 조숙에게 주었던 성서 몇 권과 그를 고발한 김성집에게 주었던 상본 두 장이 있노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ꡒ공범이라고는 도무지 없습니다. 패가한 집안에 홀로 남아 일가와 친구들에게서 모두 버림을 받았으며, 상인에 이르기까지 저를 멸시하고 얼굴에 침을 뱉지 않는 사람이 없스니다. 그러니 어떻게 공범이 있을 수 있습니까? 또 책으로 말씀드리면 제가 구전으로만 배웠기 때문에 그저 가슴 속에 책의 내용이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ꡓ라고 대답하자, 영장은 그의 대답이 거짓이라 하여 곤장을 친 다음에 성물과 성패를 가져오라 하더니 ꡒ이 그림들은 네가 그린 것이냐?ꡓ고 물었다. 그가 ꡒ그렇다ꡓ고 대답하자 영장은 그를 다시 옥에 가두고는 즉시 감사에게로 갔다. 이 때 바오로는 머리속으로 순교한 누님(이 누갈다)을 떠올리고 그 누님을 따라 가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얼마 안되어 그는 감사 앞에 다시 불려나가게 되었다. 감사가 영장을 옆에 거느리고 앉아 ꡒ그래, 너는 천주교를 버리지 않기로 작정했단 말이냐?ꡓ하고 그에게 물으니, ꡒ버릴 수 없습니다ꡓ하고 그는 대답하였다. ꡒ천주란 무엇이냐?ꡓꡒ그 분은 온 세상의 가장 높으신 임금이요 아버지이십니다. 홀로 천주께서 하늘과 땅과 천사와 사람과 그외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ꡓꡒ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ꡓꡒ한편으로 우리 몸을 살펴보고, 또 한편으로 이 세상 만물을 볼 때 어찌 이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안 계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ꡓꡒ네가 천주를 보았느냐?ꡓꡒ안보고서는 믿을 수가 없습니까?ꡓ사또께서는 이 감영을 지은 일꾼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오관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소리와 빛깔과 냄새와 맛 같은 것 밖에는 느낄 수가 없으며, 원리나 이치나 빗물질적인 것으로 모두 정신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ꡓꡒ네가 배운 것을 모두 말해 보라.ꡓꡒ저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십계와 피해야 하는 칠극과 아침저녁으로 천주께 바치는 기도문을 알고 있습니다.ꡓꡒ그래서 그 교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이냐?ꡓꡒ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섬기지 않는 자식과 임금임을 섬기지 않는 백성은 불효 불충한 자들입니다. 사람인 이상 어찌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ꡓꡒ죽기가 무섭지 않느냐?ꡓꡒ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ꡓꡒ그렇다면 어찌 그 교를 버리지 않는단 말이냐?ꡓꡒ이교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방금 말씀드렸으니 다시 묻지 마십시오.ꡓ이러고나서 그는 다시 옥으로 끌려갔다.
그 다음날은 여러 고을의 관장들이 바오로를 타이르며 배교를 권하였지만, 그는 참 천주를 아는 것, 인간의 본성을 아는 것, 상선벌악의 교리를 설명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전주 관장이 ꡒ그건 모두 쓸데 없는 소리다. 영혼도 없고, 천당 지옥도 없고, 천주라는 것도 없는 거야. 그리고 너희들은 조상께 제사도 드리지 않고 재물과 아내를 공동으로 소유하니 세상에 이보다 더 패륜, 불경한 도리가 있을 수 있단 말이냐?ꡓ하고 질책, 엄포하였다. 이에 그는 ꡒ저희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재물과 아내를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쓸데 없는 노릇이라, 저희 교에서 이를 금하는 것은 지당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착한 사람의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지옥으로 갑니다. 거기 들어간 다음에는 영영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이니 물질적인 것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위패로 말씀드리자면 그저 목수가 만든 물건에 지나지 않으니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하고자 한다면 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재물의 상통이 없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리고 아내에 대해서 저희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말은 십계에서 엄히 금지되어 있는 것이고, 사람의 모든 자연 감정에 배치되는 일입니다. 저희들에게는 남의 아내를 원하는 것조차 금해져 있는데 어떻게 저희들이 이를 따른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짐승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터무니없는 억측일 뿐입니다.ꡓ라고 하여 천주교의 교리에 합당한 대답을 하였다.
이제 영장은 바오로의 굳은 마음을 알고 형벌로써 그를 배교시키려 하였다. 무지막지한 고문과 심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는 결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매질을 할 때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였고, 예수 마리아를 마음 속으로 부르며 주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다리는 온통 헤어지고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의 마음에는 오직 주님의 은총을 받아 죄를 씻으려는 기도 뿐이었다.
그러던 중 5월 19일 전주의 감영에서는 중앙으로 마지막 상계를 올리게 되었다. 이제 바오로는 옥 중에서 이 회답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교우들과 함께 그는 천주의 은혜, 성모 마리아의 은덕을 이야기하면서 더욱 굳건한 신앙을 지켜나갔다. 이때 그는 옥중수기를 썼는 바, 지금까지의 사실이 이 수기에 자세히 실려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그는 식구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명도회 회원들에게 쓴 서간 세 통을 남기고 있다. 이 편지들에서 그는 굳은 신앙의 덕과 영웅적인 겸손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깊이 이야기하였다. 천주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영생의 복락을 위하여 순교를 결심한 내용과, 가족들이 모두 천주의 성의를 따라 행동하였으면 한다는 부탁과 천주 대전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는 기도를 되풀이 적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명도회 회원들에게 신자와 외교인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고 그들을 격려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켜 천상의 나라에서 동참 하자고 권유하였다.
한편 옥 중에서 바오로는 언제나 인내를 가지고 천주의 성의에 복종하는 생활로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고 있었다. 그의 순교에 대한 열망은 다른 교우들을 감동 시켰으며, 넘어지는 자들의 용기를 일으켜 주도록 하였고, 외교인들이나 관원들까지도 그의 생활에 감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약한 그의 육체는 겹쳐진 형벌의 무지함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상처는 점점 더 악화되어 이 용감한 사람을 더 이상 버틸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827년 7월 5일 전주 옥에서 그의 아름다운 영혼은 하늘의 영광을 받으려고 순교에 이르게하니 이 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