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성은 1839년(憲宗 5) 12월 29일(陰, 11월 24일)에 순교하여 성인의 자리에 오른 고순이(高順伊) 발바라의 부친으로 황해도 평산(平山) 지방에서 양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상으로는 그의 집안에 대한 사정이나 어렸을 때의 행적 등에 관하여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문초기록에 나타난 사실에서 볼 때, 그는 1800년(正祖 24) 겨울에 손인원(孫仁元)이라는 교우로부터 처음으로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다. 입교한 후 그는 곧 천주교 서적을 열심히 읽고, 교리의 본분을 행하고자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여 버렸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그는 곧 체포되어 관아에 투옥되었다. 체포된 다음 그에 대한 신문 내용이나 형벌의 상황을 적은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지방 관아에서 배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로 이송되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포청으로 이송되어 보다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일시적으로 배교를 하였다. 이때 열성적인 교우 이국승(李國昇) 베드로가 고광성이 갇혀 있는 옥으로 끌려오게 되었는데, 그는 열심히 광성을 권면하기도하고 나무라기도 하여 배교를 취소하도록 하였다. 베드로는 광성을 보고는 ꡒ배교한 것은 자네 자신이 아니고 마귀가 자네를 속여서 말하게 된 것이라고 포장(捕長)에게 이야기하도록 하게ꡓ라고 여러 차례 권고하였다. 이런 권고를 받은 광성은 자신이 배교한 것을 철회하고 다시 가해지는 신문과 형벌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이제 그는 절대로 나약한 표를 나타내지도 않을뿐더러 신앙심을 잃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형조로 옮겨져 사형선고를 받으니, 그 집행일은 1801년 7월 2일(陰, 5월 22일)이었다. 다만 조정에서는 그를 고향인 평산으로 이송하여 처형함으로써 지방민들에게 위협을 주려고 하였다. 평산으로 옮겨진 광성은 여러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도끼로 참수를 당하였으며, 그의 이때 순교일은 대략 7월 7일(陰, 5월 27일)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