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심(토마스)

 

황  심 토마스는 내포 지방의 덕산 고을 용머리(龍頭里) 사람으로 1756년(英祖 32)에 태어났다. 그는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특히 북경을 왕래하면서 교회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나중에는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사건에 연루되기까지 하였다. 비록 그의 입교 과정이나 신심생활이 눈에 띄게 나타나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에 대한 활동상을 펴 봄으로써 그가 열심한 신자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가 있다.


  양반집의 자손이었던 토마스는 성장하면서 보다 열심히 신자의 도리를 지켜 나갔으며, 열심한 교우로 1799년(正祖 23)에 순교한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이후 그의 활동은 위험을 무릅쓰고 북경을 왕래하면서 교회의 부흥을 돕는 기록에서 주로 나타난다. 1795년에는 교회의 대표로 뽑히어 국경의 책문(柵門)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인 후 신부의 전교활동을 돕는 데 노력하기도 하였다.


  1796년(正祖 20) 9월에 주문모 신부는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 천주교회의 현황을 보고하고자 하였다. 이 때 그 밀사로 뽑힌 사람이 바로 토마스였다. 그는 북경으로 가는 사신 일행의 하인자리를 하나 사가지고 그 일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신부의 라틴어 편지와 교우들의 한문 편지가 쓰여진 명주 두 조각을 조심스럽게 옷 속에 감추어 가지고 길을 떠난 토마스는 이듬해 1월 28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구베아(Govea) 주교에게 편지를 전달한 후 무사히 귀국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3년 동안 북경을 왕래하면서 심부름을 충실히 하였으며, 영세와 견진성사를 위한 성유(聖油)를 가지고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고 있었으며, 반대파들은 항상 더 큰 박해를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마침내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어린 순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증조모인 대왕대비 김(金)씨는 노론과 벽파를 중용하면서 신유교난을 일으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박해가 계속되던 그해 말,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 보내고자 하였던 「백서」가 발각되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 토마스는 그것을 가지고 북경에 전달하기로 되어 있었다.


  토마스는 북경에 「백서」를 전달하는데 평안도에 사는 옥천희(玉千禧)라는 교우와 동행하기로 하였다. 옥천희도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전하고 심부름을 하기 위하여 여러 번 중국을 내왕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옥천희를 만나는 데 성공하였으며, 둘이는 이 편지를 북경 주교께 전달하기 위하여 사신 일행과 함께 연말에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옥천희가 갑자기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고, 또 그의 밀고로 토마스도 10월 22일에 체포당하게 되었다.


  옥에 갇히자 토마스는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어 아무 교우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백으로 박해를 멎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황사영이 숨어 있는 곳을 대주었다. 그가 황사영으로부터 ‘일이 위급하게 되면 자기를 밀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결국 황사영은 제천에서 체포되었으며, 김한빈(金漢彬) 베드로와 현계흠(玄啓欽) 등의 교우들도 체포되어 함께 옥에 갇혔다.


  토마스와 함께 이 교우들은 황사영의 소송 사건과 관련지어져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는데, 이들 모두는 그것을 신앙으로 견디었다. 그들의 마음에서는 신앙을 배반할 생각이 한 순간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리하여 마침내 사형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토마스가 받은 공식 결안은 아래와 같다.


  ꡒ황심은 비천하게도 사교에 빠져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이를 전교하기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암약하였다. 그는 비밀히 외국에 가서 사교의 영세명을 받았으며, 주문모 신부를 위하여 여러 번 여행을 하고 그의 편지를 전하였다. 사교를 믿는 자들이 꾸민 일 가운데서 그가 미리 알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생사를 걸고 황사영과 결탁하였고, 황사영이 법망을 벗어나기 위하여 제천으로 갔을 때는 일부러 그를 만나러 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황사영과 베개를 끌어 베고 누워서 그는 흉악한 「백서」를 제 눈으로 읽었는 바, 그 편지의 잔학함은 고금을 통하여 전례가 없는 것으로 그 흉악함은 붓으로는 서술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뻔뻔스럽게도 황심은 황사영과 짜고서 외국의 배들을 불러들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이 편지를 외국인들에게 보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흉측한 계획은 발각되었으니, 이제 그는 역적이요 대죄인이다. 그를 서소문 밖으로 끌어내어 육시를 하고 참수를 하라.ꡓ


  이러한 결안 내용처럼 토마스는 천주교인이요, 또한 황사영의 「백서」를 전달하려 한 일로 대역죄인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1801년 11월 21일 결안대로 참수되고 육시(戮屍)를 당하였으니, 이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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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심(토마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황  심 토마스는 내포 지방의 덕산 고을 용머리(龍頭里) 사람으로 1756년(英祖 32)에 태어났다. 그는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특히 북경을 왕래하면서 교회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나중에는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사건에 연루되기까지 하였다. 비록 그의 입교 과정이나 신심생활이 눈에 띄게 나타나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에 대한 활동상을 펴 봄으로써 그가 열심한 신자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가 있다.

      양반집의 자손이었던 토마스는 성장하면서 보다 열심히 신자의 도리를 지켜 나갔으며, 열심한 교우로 1799년(正祖 23)에 순교한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이후 그의 활동은 위험을 무릅쓰고 북경을 왕래하면서 교회의 부흥을 돕는 기록에서 주로 나타난다. 1795년에는 교회의 대표로 뽑히어 국경의 책문(柵門)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인 후 신부의 전교활동을 돕는 데 노력하기도 하였다.

      1796년(正祖 20) 9월에 주문모 신부는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 천주교회의 현황을 보고하고자 하였다. 이 때 그 밀사로 뽑힌 사람이 바로 토마스였다. 그는 북경으로 가는 사신 일행의 하인자리를 하나 사가지고 그 일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신부의 라틴어 편지와 교우들의 한문 편지가 쓰여진 명주 두 조각을 조심스럽게 옷 속에 감추어 가지고 길을 떠난 토마스는 이듬해 1월 28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구베아(Govea) 주교에게 편지를 전달한 후 무사히 귀국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3년 동안 북경을 왕래하면서 심부름을 충실히 하였으며, 영세와 견진성사를 위한 성유(聖油)를 가지고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고 있었으며, 반대파들은 항상 더 큰 박해를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마침내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어린 순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증조모인 대왕대비 김(金)씨는 노론과 벽파를 중용하면서 신유교난을 일으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박해가 계속되던 그해 말,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 보내고자 하였던 「백서」가 발각되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 토마스는 그것을 가지고 북경에 전달하기로 되어 있었다.

      토마스는 북경에 「백서」를 전달하는데 평안도에 사는 옥천희(玉千禧)라는 교우와 동행하기로 하였다. 옥천희도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전하고 심부름을 하기 위하여 여러 번 중국을 내왕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옥천희를 만나는 데 성공하였으며, 둘이는 이 편지를 북경 주교께 전달하기 위하여 사신 일행과 함께 연말에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옥천희가 갑자기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고, 또 그의 밀고로 토마스도 10월 22일에 체포당하게 되었다.

      옥에 갇히자 토마스는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어 아무 교우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백으로 박해를 멎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황사영이 숨어 있는 곳을 대주었다. 그가 황사영으로부터 ‘일이 위급하게 되면 자기를 밀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결국 황사영은 제천에서 체포되었으며, 김한빈(金漢彬) 베드로와 현계흠(玄啓欽) 등의 교우들도 체포되어 함께 옥에 갇혔다.

      토마스와 함께 이 교우들은 황사영의 소송 사건과 관련지어져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는데, 이들 모두는 그것을 신앙으로 견디었다. 그들의 마음에서는 신앙을 배반할 생각이 한 순간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리하여 마침내 사형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토마스가 받은 공식 결안은 아래와 같다.

      ꡒ황심은 비천하게도 사교에 빠져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이를 전교하기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암약하였다. 그는 비밀히 외국에 가서 사교의 영세명을 받았으며, 주문모 신부를 위하여 여러 번 여행을 하고 그의 편지를 전하였다. 사교를 믿는 자들이 꾸민 일 가운데서 그가 미리 알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생사를 걸고 황사영과 결탁하였고, 황사영이 법망을 벗어나기 위하여 제천으로 갔을 때는 일부러 그를 만나러 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황사영과 베개를 끌어 베고 누워서 그는 흉악한 「백서」를 제 눈으로 읽었는 바, 그 편지의 잔학함은 고금을 통하여 전례가 없는 것으로 그 흉악함은 붓으로는 서술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뻔뻔스럽게도 황심은 황사영과 짜고서 외국의 배들을 불러들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이 편지를 외국인들에게 보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흉측한 계획은 발각되었으니, 이제 그는 역적이요 대죄인이다. 그를 서소문 밖으로 끌어내어 육시를 하고 참수를 하라.ꡓ

      이러한 결안 내용처럼 토마스는 천주교인이요, 또한 황사영의 「백서」를 전달하려 한 일로 대역죄인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1801년 11월 21일 결안대로 참수되고 육시(戮屍)를 당하였으니, 이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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