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동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에 대하여 자세히 나타난 문헌이 없어 어렸을 때의 행적이나 입교동기 등은 알 수가 없다. 또한 교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영세를 받지 못하고 순교한 듯하다. 입교한 후 그는 천주교를 자유롭게 신봉하기 위하여 집과 재산을 버리고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피하여 살다가, 1801년 2월(陰) 초에는 다시 충청도 제천의 배론(排論, 現 堤川郡 鳳陽面 九龍里)으로 가서 용기를 만들며 생계를 유지하고 또한 신심을 열심히 닦아나갔다.
당시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 이곳 저곳으로 박해를 피해 다니고 있었는 바, 김귀동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교우인 일꾼들을 시켜 일종의 지하실을 만들고 그 입구를 큰 옹기로 덮어 놓았다. 마침내 알렉산델이 그의 집으로 오게 되자 그는 알렉산델과 다른 동료 김한빈(金漢彬) 베드로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일을 돌보도록 항상 뒷받침하였다. 그러던 중 알렉산델이 「백서」를 북경에 주교에게 전달하려던 것이 발각됨으로 인하여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김귀동도 그와 함께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관아로 압송된 후 관원들은 오랫동안 김귀동에게 고문을 가하면서 배교한다면 석방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위하여 다른 교우들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서울로 이송된 그는 포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신문과 형벌을 당한 다음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제천에서 일을 하였던 김세귀(金世貴), 세봉(世奉) 형제는 불행히도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았다고 한다. 형조의 결안(結案)에서는 김귀동이 천주교를 믿고 황사영 알렉산델을 숨겨 놓고서 관청에 고발하지 않았으므로 사형에 처한다고 기록하는 한편, 그를 고향으로 옮겨서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김귀동은 선고를 받은 지 나흘 후인 1802년 2월 2일(陰, 1801년 12월 30일)에 교우 황일광(黃日光) 알렉시스와 함께 홍주 읍내에서 참수를 당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