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골은 교회사에서 옛 지명인 홍주 다리골로 나오며, 현재의 행정적인 소재지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이다. 서해안에서 가장 높은 오소산(해발791m) 바로 밑에 다락과 같이 위치했다 해서 다락골이라 불리며 한편 다래가 많이 나기도 해서 다래꼴로도 불렸다 한다. 어떤 책자에는 다릿골로 나와 있기도 하다. 이곳 다락골은 한 때 열심한 교우촌이었다. 복음의 씨앗은 최경환 성인, 최양업의 일가에서부터 시작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교우인 이씨부인이 12세의 아들 최인주(최仁柱)를 데리고 서울을 떠나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씨부인은 경성 부인이므로 침선과 예법에 능통하였고 또한 경주최씨 집안인지라 경주최씨 마을인 이곳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으며 열심한 신앙생활로 많은 이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최인주씨의 아들 3형제 중 막내 아드님이 지난 1984년 5월 6일 시성되신 성 프란치스꼬 최경환(1805-1839)님이시며, 최경환 성인의 장남이 바로 우리나라의 두번째 사제이신 ‘땀의 순교자’ 최양업(토마스,1821-1861) 신부이시다. 그러나 박해시절 천주교 교우촌임이 발각되자 포졸들이 급습하여 교우들을 잡아가고 방화와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교우들은 순교하거나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도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천주교를 믿으면 멸문지화를 당하니 절대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옛 어른들이 대대로 유언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최다(最多)의 순교자 묘지와 최양업, 최경환 성인의 탄생지가 있으며 순교자들이 살던 집터들이 남아 있다.
마을 노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박해의 손길은 닿았을때,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가니까 어린애가 울며 보채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 간단다”라고 달래어 데리고 가서 홍주(지금의 홍성)감영에서 치명당했으며 외인 친척들이 야음을 틈타 시신을 몰래 훔쳐 50여리길을 산길로 업어다가 이 마을 뒷산에 황급히 일가족씩 묻어줬다 한다. 오기선(요셉)신부님은 회고록 ‘곡예사 같은 인생’에서 줄무덤에 대한 두가지 증언을 하고 있다. 하나는 1952년 당시 청양사람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했던 최영천 노인등을 만나 직접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에 오신부님 직접 이곳을 현지답사하여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였다. 또 하나는 1920년대에 공주에 사시던 손 아오스딩 노인께서 “청양고개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 하시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약 250여명의 교우가 치명당하였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기에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라고 오신부님께서 직접 증언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곳 출무덤안의 주인공들은 홍주 감영에서 순교했던지,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구전상 장소의 차이는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천주교 순교자들이란 점이다.
성역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줄무덤이 한군데가 아니고 세군데임을 밝혀냈다. 편의상 제1, 2, 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고 오신부님의 증언에는 17기라고 했으나 지금은 14기이다. 비신자 최씨들이 임자없는 무덤이므로 종묘를 이장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3기가 파묘되었다. 제2무덤은 1무덤 바로 밑 우측으로 1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10기가 위치해 있다. 3무덤은 능선너머 다락골 마을쪽으로 1무덤에서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12기가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줄무덤의 총수는 36기이다. 이들의 치명은 병인박해때로 추정된다. 그리고 , 무덤안에는 일가족씩 묻혀 있다는 구전이므로 일가족을 3명씩만 계산해도 무려 100여명이나 되는 전국 최다의 순교자 묘지인 것이다. 무덤의 봉분이 육안으로 보아도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무덤 봉분보다 유난히 더 크다.
다락골에서 약 700m 떨어진 곳에 새터(新垈)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최인주씨가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지어 정착한 마을이며 결혼하여 3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막내 아들이 최경환 성인이시다. 최경환 성인은 이곳에 살면서 장남 최양업 신부를 낳은 후 수계생활이 어렵게 되자 주교, 신부 밑에서 신앙생활하려고 최양업 소년 12세때 서울로이사를 하게 된다. 지금도 이들이 마시던 우물이 있고 최양업 소년 어려서 뛰놀던 뒷동산과 천제바위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