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국 유학자들의 천주학 연구와 교회 박해 – 조선왕국 유학자들의 천주학 연구

 

1. 조선왕국 유학자들의 천주학 연구


1) 학문적 반성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계속되는 당쟁 속에서 소수의 가문에 의한 벌열(閥閱) 정치가 성립되었고 이러한 일당 전제 체제 때문에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사림 출신의 유학자들은 몰락하여 지방으로 내려갔다. 이 몰락 양반들은 정치 기강의 문란과 사회적 모순 등으로 무너져가는 현실 사회를 비판하였고, 사장에 주력하는 학풍이나 공리공론을 일삼는 성리학, 그리고 형식적 예론만을 내세우는 사회 규범에 회의와 염증을 느꼈다. 이들은 관념적인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반성과 함께 다시 유교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 현실 생활에 기여할 수 있는 실용적 유학, 즉 실학에 대한 탐구를 촉구하였고 모순을 안고 있는 사회에 대해 구조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 실학자들은 대부분 관직을 떠나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남인 양반 계보에 속하였다.




2) 천주학 연구


중국 북경에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 왕국에 입국하여 직접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의 부연사들을 통해서 한역 서학서를 조선에 도입시킬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선교 방법은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것이었지만 놀라운 결과를 내었다. 왜냐하면 한역 서학서에 대한 학문적 접촉을 통해서 천주교가 조선 왕국에 수용,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한역 서학서가 이 땅에 전래된 것은 1603년에 이 광정이 명나라에서 마태오 리치가 제작한 지도를 도입한 데에서 비롯하였다. 이후로 이 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기까지 180년 동안 부연사를 통해서 수 많은 서학서들이 조선에 유포되었다. 정조시대에 이르러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서를 서재에 감추어 두고 이 책들을 탐독하는 것을 유행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서학서는 실학 유학을 주장하던 남인계 양반 학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학문적 호기심과 새로운 지식을 얻어보려는 욕구에서 서학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서학의 연구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기까지 15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서학 연구의 이러한으로 천주학(천주교 교리)이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에서 지성인들의 천주학에 대한 연구 반응은 배척이라는 부정적 결과와 수용이라는 긍정적 결과로 나타났다.




① 부정적 이해


천주학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실학파 유학자들은 주자학적 관점에서 천주학을 비판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들로서 유몽인, 이익, 신후담, 안정복, 이헌경, 홍정하 등이다.


우선 교리 면에 있어서 첫째로 천주학의 비판자들은 천주의 천지창조설을 부인하였다. 천주가 이 세상을 주재, 섭리하는 주장은 옳지만 자료 없이 세상을 만든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둘째로 이들은 영혼 불멸성을 거부하면서, 천주학은 불교의 윤회설을 비판하지만 천당 지옥설도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그릇된 학설로서 이기주의적 구원관이라고 지적, 육신 부활을 배격하였다. 세째로 비판론자들은 천주 강생설에 있어서 예수의 신성과 십자가상 죽음을 거부하면서 이는 신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네째로 이들은 천주학에서 현세는 고통의 세계, 잠시 지나는 세계라고 하지만 그러한 세계라면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면 현세론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윤리면에 있어서는 비판론자들도 천주학에서 말하는 칠극(七克)사상은 유교의 극기설과 같으며, 칠극이 과도한 욕망을 누르고 예절을 따르라는 극기복례(克己復禮) 보다 덕목이 더 많아 유교에 도움이 되고 있다면서 천주학 윤리의 우위성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천주학에서 나타나는 금욕 생활과 독신 생활의 절색론, 그리고 일부일처제는 후손을 단절시키기 때문에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의 기원이 된다고 비판하였다.




② 긍정적 이해


1770년대 후반기에 천주학을 연구하여 이를 종교(천주교)로서 받아들여 실천한 학자들로서는 홍유한과 주어사․천진암 강학회의 회원 등이 있다.


홍 유한은 이 익의 제자로서 1770년에 천주학에 관한 저서를 읽고 혼자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7일마다 주일이 있음을 알고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쉬면서 기도에 전념하였고 금욕 생활을 하면서 자선활동에 헌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왕국의 개국 공신 권근의 14대 손인 남인 학자 권철신이 주어사에서 문하생을 데리고 강학회를 개최하여 회원 각자가 연구한 문제들을 서로 토의하면서 의견을 교환 하였다. 1770년대 후반에 들어 그는 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같은 남인 계통의 20대 젊은 학자인 제자들이 10여 일 동안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주재할 때에 유학을 연구하고 천주교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의견을 교환하였다.


강학회원들은 교리서의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강학회는 단순한 학술적 교리 연구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신심을 연마하는 수련회를 겸한 종교적 집회가 되었다. 강학회원들은 권철신이 작성한 생활 시간표에 따라 규칙적인 기도와 명상의 공동 생활 속에서 교리 토론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얼음을 깨고 찬물로 세수를 한 후에 새벽 기도문(숙야잠)을 외고, 해가 뜬 다음에는 아침 기도문(경제잠)을 낭독하고 정오에는 낮 기도문(사물잠)을 낭송하였고 해가 지면 저녁 기도(서명)을 읊었다.


강학회가 끝날 무렵에 회원 중의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었고 이벽은 ‘천주공경가’를 썼다. 후에 이 강학회 회원들은 교회에서 규정한 사항을 실천하였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기도하였고 7일 중 하루는 쉬고 천주 공경에 자신을 바쳐야 된다는 가르침을 발견하고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였다. 가장 열렬한 회원은 이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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