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회 박해
한국에서의 박해는 한국교회가 창설된지 1년만인 1785년 3월에 벌써 시작되었다. 중인인 역관 김범우는 그의 집에서 종교의 모임을 가졌다 하여 고문을 당하고 유배지에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 후 한국 교회는 사대박해로 불리는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비롯하여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박해로 신해, 을묘, 을해, 정해, 경신 박해와 1901년 제주에서 민란에 의해 피를 흘린 제주교난 등 잇달은 수난으로 교회가 창설된 뒤 100여년 동안에 1만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를 냈다.
천주를 만유 위에 받들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천주교는, 과연 당시 국교의 성격을 띤 유교사회의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보편성을 요구하는 천주교의 근대적 평등사상은 충효를 숭상하는 가부장적 봉건윤리와는 충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의 정치, 사회, 가족 등 제도가 유교의 관습, 제도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만큼 그 대립은 일층 심각한 문제였다.
천주교와 유교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정조 15년 진산사건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이것이 이른바 ‘辛亥珍山之變’으로, 신자인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살랐다 하여 주자가례를 어긴 죄목으로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충효를 절대적인 윤리로 여기는 유교의 봉건사회에서는 묵인될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종교적 의미의 박해라기 보다 유교 윤리와의 충돌에서 오는 국가 이데올로기적 단죄였던 것이다.
1795년 을미년에 윤유일 등이 순교하고, 충청도 일대에 박해를 가하기는 했으나 정조의 치세 때에는 큰 박해는 없었다. 그 시대의 박해는 주로 항상 노론벽파가 남인시파를 꺼리고 질투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당쟁의 소산이었다.
순조 시대에는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이 되었는데, 대비는 노론벽파에 속한 여인이었다. 순조 원년 1월 11일 대왕대비가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고, 전국에 오가작통법을 세워 빠짐없이 고발케 하여 근절을 기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그결과 남인의 거두인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 당하고, 정약종과 홍낙민 등은 순교하였으며, 이승훈이 처형되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됨으로써 남인 세력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잠적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3월 12일 자현(自現)하여 박해는 재연되고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온 독실한 여회장 강완숙과 궁녀 등이 순교하고 주신부는 군문효수되었다. 9월 29일(음)에는 황사영이 체포되어 대역부도죄로 순교하였다. 그런데 그가 작성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가 탄로되어 큰 파란을 일으키고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일변시켰다. 위정자들은 그것을 마치 천주교회의 가르침인 양 단정하고, 외세를 불러들이는 매국도당으로 몰아 박해를 합리화시키는 구실로 삼게 된 것이다.
이 해 12월에 대왕대비는 ‘토사교문’(討邪敎文)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천주교가 본질적으로 국가와 국교의 원수라는 것을 신조화시키려 하였다. 이른바 ‘척사윤음’이라는 이 포고문은 천주교와 교도에 대하여 “매국노, 불효, 안녕질서의 문란자, 방탕”등 온갖 중상과 모략을 동원하여 박해의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신유박해는 약 100명의 순교자를 내는 한편 400명에 달하는 천주교인을 유배시켰다.
1839년 헌종 5년에 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른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된 이 박해는 사학인 천주교를 퇴치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꺾으려는 벽파 풍양 조씨들의 책동에서 온 것이었다.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웠으나, 벽파인 풍양 조씨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안동 김씨의 관대한 정치에 힘입어 한국교회는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인 신부들을 중심으로 크게 교세의 확장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섭정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오라버니인 김유근이 중병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자, 실권은 풍양 조씨의 세도를 등에 업은 우의정 이지연에게 넘어갔다.
그 결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천주교도를 몰아세운 이 박해로 4월 12일(음) 남명혁과 궁녀 박희순 등 9명이 순교하고, 6월부터는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7월 1일(음)에는 앵베르 주교가 수원에서 자현하고, 주교의 권고로 충청도 홍주에서 모방과 샤스탕 신부도 자현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래서 8월 14일(음) 3인의 선교사가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이튿날 유진길과 정하상이 서소문 형장에서, 나흘 후에는 조신철 등 9명이 순교하였다. 이 때 정부는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교우들에게만 교수형을 처하였다.
당시의 기록인 「긔일긔」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고문 또는 병들어 죽은 교인이 60명이나 되었다. 기해박해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드나 규모가 광범했던 만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유식층의 지도자를 잃은 반면, 교회 세력은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 퍼져나갔다. 신앙내용도 윤리 중심에서 복음적 신앙으로 변해간 것이 특징이었다. 교우들은 산간벽촌으로 모여 신앙의 이상촌을 이루는데 힘을 모았다.
헌종 12년(1846)에 종부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천주교에 또 박해를 가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김대건은 선교사들의 입국을 비교적 안전한 바닷길로 개척하고자 서해의 등산진까지 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마침내 7월 25일(음) 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강변 사장에서 순교하였다. 이 박해는 김신부와 관련되어 투옥된 현석문 등 남녀교우 9명이 처형된 외에 다른 희생자는 없었다.
고종 3년(1866) 대원군 치하에서 한국 교회 사상 최대의 가혹한 박해가 또 일어났다.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이 박해의 원인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서 비롯되었다. 고종 초년에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고종 2년(1865) 9월(음)에 러시아인들이 또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의 협조를 청해왔고, 이어 승지인 남종삼 등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맺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능히 러시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만족히 여기고, 남종삼에게 한국 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 주교를 만나도록 해달라고 청하고, 만일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준다면 천주교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래서 황해도에서 포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를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그의 도착은 남종삼이 대원군의 요청을 받은 지 한달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를 맞는 대원군의 태도가 변했고, 그 이유는 1860년 영불 연합군에 의하여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청조의 위신은 물론, 한국의 고관들도 당황하여 피난갈 궁리에 바쁠 정도였다는 북경에서의 조선 사신이 보내온 서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때의 보복으로 중국 도처에서 양인살육의 피비린내나는 사태가 벌어져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이 닥치는대로 살해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여기에서 큰 힘이라도 얻은 듯, 천주교를 증오해온 보수적인 정부고관들은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교섭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교도들의 탄압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구나 당시 운현궁에서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까지 들고 나오자, 대원군은 천주교의 탄압을 결심하고 선교사들의 체포에 서명하였다. 이 가혹한 박해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남종삼 등 수 많은 지명 인사들이 참수되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불과 수개월 동안에 약 8천명에 달하는 교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렇게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생교회의 전통을 지닌 한국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심산유곡에 교우촌을 이루고, 후일 신앙자유의 날을 맞게 되었으며 1962년에는 숙원이던 교계제도의 설정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순교한 선인들 가운데서 103위께서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