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세교회-그리스도교제국의 형성

 



  2-2.  그리스도교제국의 형성




  피핀3세의 아들인 카알 대제(768-814년)에 이르러  보니파시오와  피핀이 시작한 프랑크왕국과 교황칙을 결합시키는 사업이 완성된다. 


  그는 우선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디왕국을 정복하고, 774년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과 영원한 우호동맹을 선언한다.  그리고 동시에 랑고바르디족이 점령하였던 땅을 교황에게 기증하기로 약속하고 781년 몇몇 지역을 증여하였다.  이로써 교회국가가 건설되었고, 이것은 1870년까지 11세기 동안 교황직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교황령이 교황의 교회적, 정치적 독립을 보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동시에 이것은 교회의 종교적 사명을 위해서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카알 대제는 아우구스띠노의 ‘신국(神國)’이상에 고취되어 그의 왕권을 그리스도교정신으로 이해하고, 그는 게르만족의 토대 위에 그리스도의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가졌다.  때문에 그는 영토확장을 위한 원정을 정치적, 군사적 입장에서 뿐아니라 종교적, 교회적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그에게 있어 정치와 중교, 군사적 정복과 선교는 하나였다. 그는 점령 지역의 이교인이나 미신자 주민들을 프랑크왕국에 예속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집단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고, 그의 제국에 수많은 교구를 건설하였다.  이로써 서구 그리스도교제국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그는 부황, 피핀3세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교회와의 관계를 계승하여, 정치적 문제와 중교적 문제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결합한 기반에서 그의 통치와 대외정책을 운영하였다.  그가 발표하는 입법 조치는 교회의 조직을강화하고, 재산을 보호하며, 교회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목적과 분리되지 않았다.  또한 성직자의 자질과 행동양식을 향상시키고 예배양식의 규격화와 표준화에 힘쓰고, 일반 대중의 신앙심을 정화하고 심화시키는 일을 행정의 목표와 일치시켰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책을 간행하고, 교회를 새로 짓거나 보수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수하는 목적에 이바지하였고, 심지어는 호교를 위한 신학논쟁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심을 기초로 한 그의 군사적 정복 사업은, 백성과 신하들이 왕에 대한 성실한 종사(從事)관계처럼 해석되어 로마교황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인 교황에 대해 깊은 존경을 표시하여,정치적 난관에 직면할 때마다 교황의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카롤링거 문예부흥을 꾀하면서 영국, 이탈리아, 아일랜드, 에스파니아 등지에서 학자들을 초청하여 이들의 도음으로 그의 정치, 종겨적 통치를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영국에서 초빙된 알퀸을 중심으로 이들 학자들은 교육을 증진시키고, 고전을 전사하는 보관하고, 신학적 논문, 성서 주석, 시문, 사료 편찬 등의 작업을 하였다.  또한 그는 에술적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러한 문화활동은 궁전으로부터 수도원학교나 교회학교로 확장되어 카롤링거문화의 융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카알 대제의 신앙심과 종교적 열정을보고 레오 3세 교황은  800년 성탄절, 성베드로대성전에서 그를 로마황제로 축성하였으니 이것은 매우 주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당시 비찬틴제국에도 로마의 황제가 있었으나 그리스 문화권을 대변한 이 제국은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정치적, 종교적 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카알 대제의 대관식을 바로 황제권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황제 지위의 정통성이야 어찌 되었든 유럽에 확산된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종교적 체계를 관리하는 중심적 역할이 카알 대제의 위임된 결과가 되었다.


 


  이로써 제국과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대리자인 황제에게 위임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역가적 의미는 한결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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