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가톨릭 교회(Ⅰ)

 

19세기의 가톨릭 교회(Ⅰ)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대혁명은 계몽주의의 이상적인 관용주의와 합리주의를 외적으로 표현한 사건으로서 유럽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교회에 대해서도 전환점을 이루게 하였다. 1789년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1774-1792)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하였다. 이 삼부회는 프랑스의 세 신분 계급의 대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신분은 당시에 전인구의 1퍼센트 미만인 성직 계급으로 귀족출신의 고위 성직자들은 주용한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재산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평민출신의 하위 성직자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제2신분은 귀족계급으로 이들도 특권과 부를 향유하고 있었으나 전 인구의 2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소수의 두 특권 계급에 비해 제3신분은 프랑스 국민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평민들로서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1789년 5월 5일에 삼부회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소집되었을 때에 처음에는 제1계급과 제3계급은 서로 협조하였다. 그런데 회의운영이 투표방식에 대해서 각 신분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제3신분이 6월 23일에 단독으로 국민의회를 개최하였고, 제1신분의 하급 성직들은 여기에 동조하였다. 8월 4일과 5일 사이에 있었던 ꡐ회생의 밤ꡑ에서 일부 자유주의적 귀족과 성직자들은 국민의회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중세의 봉건적 특권을 평민들을 위해서 포기하였고, 의회는 노예제도의 폐지와 함께 ꡒ모든 국민은 출생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직책에 취임할 수 있다ꡓ고 8월 5일 새벽 2시에 선언함으로써 봉건제도는 단번에 붕괴되고 말았다. 3주일 후인 8월 26일에 국민의회는 ꡐ인권선언ꡑ을 공포하였다.




교회의 세속화




프랑스 교회 : 프랑스 국민의회의 극단파는 교회재산 문제에 있어서 반교회적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샤를르 모리스 드 딸레랑-빼리고르드 주교가 국가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공채를 지불하는 데에 사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러한 제의를 반대하여 의회에서 퇴장하였다.


이후에 국민의회는 교회를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 휩쓸렸다. 의회는 1790년 2월에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수도단체를 해산시켰고, 4월에는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법이 공포되었다. 7월 14일에는 프랑스 성직자 기본법인ꡑ성직자 공민헌장ꡑ이 선포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교구의 수를 줄이고, 성직자는 국가의 봉급을 받으며 교구 주민의 대표로 선출되는 세속 관리로 바뀌어졌다.


이제 프랑스 교회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국가적 기반 위에 새로 조직되어 국가에 예속되는 ꡐ국가 교회ꡑ(국교)가 되었다. 이러한 조처에 대해 교황이 바난, 항의하자 국민의회는 11월에 모든 성직자들에게 헌장을 지지한다는 선서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전체 성직자들 중에서 3분의 2에 달하는 성직자들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박해가 일어나 4만여 명의 성직자들이 투옥 또는 국외 추방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박해는 혁명당국과 국민 사이에 거리를 두는 기회를 주었다. 선량한 많은 국민(신도)들이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 편에 몰렸고, 이는 반란과 내란의 기원이 되었다. 결국 ꡐ성직자 공민헌장ꡑ은 프랑스 대혁명이 처음으로 저지른 대실책이었다.


1791년 10월에 새 헌법이 공포되고 이에 의해 선출된 입법의회가 개회되었다. 이 입법의회는 1792년 9월에 공포정치 시대가 시작되면서 끝을 맺었다. 이 시대에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뜨를 비롯하여 많은 성직자, 귀족, 의회의원, 대중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공포의 독재 정치가들은 그리스교를 폐지하고 여기에 ꡐ이성의 공경ꡑ으로 대체하였다.


1799년 11월에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가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독재정권은 무너지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도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종교를 정치적 요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국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1801년 7월에 교황과 정교조약을 맺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의 대부분이 신봉하는 종교로서 가톨릭 교회를 수복하기로 확정하였다. 동시에 교회는 몰수된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가 성직자들을 돌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 조약에 비밀히 ꡐ77항의 파생 조문ꡑ을 첨부하였다. 교황 비오 7세(1800-1823)는 이에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많은 고초를 당하였고,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그를 황제로 도유(塗油)하였다. 새 황제는 1808년에 바티칸 시를 점령하고, 1812년에 교황을 빠리의 퐁덴블로에 감금하고서 바티칸 시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은 패전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독일 교회 :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침입한 곳에는 어디서나 사회적 혁명이 수반되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프랑스인의 침입이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교회의 세속화)를 지니고 있다. 1803년 2월에 레겐스부르그에서 독일제국의 대의원들은 결의문을 선포하였다. 이 결의문은 22개의 교구와 80개의 제국 수도원과 200여 개의 수도원들의 재산 몰수와 국유화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독일 교회는 물질적 기반을 상실하였고 국가적 뒷바침도 잃고 말았다. 이제 제국 교회의 멸망과 함께 교회는 절망적인 열세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라는 부정적인 면 뒤에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제 교회는 고루한 폐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귀족들의 주교좌 독점과 과대한 성직록이 폐지되었다. 그 외에 중세기 봉건주의의 소산인 고위 성직자와 하급 성직자의 심한 차별 의식이 사라졌고, 가난해진 교회는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을 위한 교회가 19세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독일의 신성 로마제국에 예속되어 있었던 제국 교회가 국가와 분리됨으로써 독일 주교들은 로마 교회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교회의 세속화는 로마 교황에게는 종교적 승리를 가능케 해주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단결되었고 국가주의와 국교화 사상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이제 가톨릭 교도들의 공동체 의식이 깨어나 오늘날의 가톨릭 운동의 시초로 볼 수 있는 수많은 조직체가 신설되었다. 수도회가 재건되었고 새로운 수도회가 독일에 도입되었다. 신심의 활성화와 더불어 독일 교회는 사회문제에 개방된 자세를 취하면서 사회봉사와 같은 새로운 사목방법으로 민중을 대하였다. 19세기 독일의 여러 곳에서 교회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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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의 가톨릭 교회(Ⅰ)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대혁명은 계몽주의의 이상적인 관용주의와 합리주의를 외적으로 표현한 사건으로서 유럽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교회에 대해서도 전환점을 이루게 하였다. 1789년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1774-1792)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하였다. 이 삼부회는 프랑스의 세 신분 계급의 대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신분은 당시에 전인구의 1퍼센트 미만인 성직 계급으로 귀족출신의 고위 성직자들은 주용한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재산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평민출신의 하위 성직자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제2신분은 귀족계급으로 이들도 특권과 부를 향유하고 있었으나 전 인구의 2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소수의 두 특권 계급에 비해 제3신분은 프랑스 국민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평민들로서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1789년 5월 5일에 삼부회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소집되었을 때에 처음에는 제1계급과 제3계급은 서로 협조하였다. 그런데 회의운영이 투표방식에 대해서 각 신분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제3신분이 6월 23일에 단독으로 국민의회를 개최하였고, 제1신분의 하급 성직들은 여기에 동조하였다. 8월 4일과 5일 사이에 있었던 ꡐ회생의 밤ꡑ에서 일부 자유주의적 귀족과 성직자들은 국민의회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중세의 봉건적 특권을 평민들을 위해서 포기하였고, 의회는 노예제도의 폐지와 함께 ꡒ모든 국민은 출생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직책에 취임할 수 있다ꡓ고 8월 5일 새벽 2시에 선언함으로써 봉건제도는 단번에 붕괴되고 말았다. 3주일 후인 8월 26일에 국민의회는 ꡐ인권선언ꡑ을 공포하였다.


    교회의 세속화


    프랑스 교회 : 프랑스 국민의회의 극단파는 교회재산 문제에 있어서 반교회적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샤를르 모리스 드 딸레랑-빼리고르드 주교가 국가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공채를 지불하는 데에 사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러한 제의를 반대하여 의회에서 퇴장하였다.

    이후에 국민의회는 교회를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 휩쓸렸다. 의회는 1790년 2월에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수도단체를 해산시켰고, 4월에는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법이 공포되었다. 7월 14일에는 프랑스 성직자 기본법인ꡑ성직자 공민헌장ꡑ이 선포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교구의 수를 줄이고, 성직자는 국가의 봉급을 받으며 교구 주민의 대표로 선출되는 세속 관리로 바뀌어졌다.

    이제 프랑스 교회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국가적 기반 위에 새로 조직되어 국가에 예속되는 ꡐ국가 교회ꡑ(국교)가 되었다. 이러한 조처에 대해 교황이 바난, 항의하자 국민의회는 11월에 모든 성직자들에게 헌장을 지지한다는 선서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전체 성직자들 중에서 3분의 2에 달하는 성직자들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박해가 일어나 4만여 명의 성직자들이 투옥 또는 국외 추방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박해는 혁명당국과 국민 사이에 거리를 두는 기회를 주었다. 선량한 많은 국민(신도)들이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 편에 몰렸고, 이는 반란과 내란의 기원이 되었다. 결국 ꡐ성직자 공민헌장ꡑ은 프랑스 대혁명이 처음으로 저지른 대실책이었다.

    1791년 10월에 새 헌법이 공포되고 이에 의해 선출된 입법의회가 개회되었다. 이 입법의회는 1792년 9월에 공포정치 시대가 시작되면서 끝을 맺었다. 이 시대에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뜨를 비롯하여 많은 성직자, 귀족, 의회의원, 대중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공포의 독재 정치가들은 그리스교를 폐지하고 여기에 ꡐ이성의 공경ꡑ으로 대체하였다.

    1799년 11월에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가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독재정권은 무너지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도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종교를 정치적 요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국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1801년 7월에 교황과 정교조약을 맺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의 대부분이 신봉하는 종교로서 가톨릭 교회를 수복하기로 확정하였다. 동시에 교회는 몰수된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가 성직자들을 돌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 조약에 비밀히 ꡐ77항의 파생 조문ꡑ을 첨부하였다. 교황 비오 7세(1800-1823)는 이에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많은 고초를 당하였고,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그를 황제로 도유(塗油)하였다. 새 황제는 1808년에 바티칸 시를 점령하고, 1812년에 교황을 빠리의 퐁덴블로에 감금하고서 바티칸 시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은 패전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독일 교회 :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침입한 곳에는 어디서나 사회적 혁명이 수반되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프랑스인의 침입이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교회의 세속화)를 지니고 있다. 1803년 2월에 레겐스부르그에서 독일제국의 대의원들은 결의문을 선포하였다. 이 결의문은 22개의 교구와 80개의 제국 수도원과 200여 개의 수도원들의 재산 몰수와 국유화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독일 교회는 물질적 기반을 상실하였고 국가적 뒷바침도 잃고 말았다. 이제 제국 교회의 멸망과 함께 교회는 절망적인 열세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라는 부정적인 면 뒤에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제 교회는 고루한 폐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귀족들의 주교좌 독점과 과대한 성직록이 폐지되었다. 그 외에 중세기 봉건주의의 소산인 고위 성직자와 하급 성직자의 심한 차별 의식이 사라졌고, 가난해진 교회는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을 위한 교회가 19세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독일의 신성 로마제국에 예속되어 있었던 제국 교회가 국가와 분리됨으로써 독일 주교들은 로마 교회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교회의 세속화는 로마 교황에게는 종교적 승리를 가능케 해주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단결되었고 국가주의와 국교화 사상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이제 가톨릭 교도들의 공동체 의식이 깨어나 오늘날의 가톨릭 운동의 시초로 볼 수 있는 수많은 조직체가 신설되었다. 수도회가 재건되었고 새로운 수도회가 독일에 도입되었다. 신심의 활성화와 더불어 독일 교회는 사회문제에 개방된 자세를 취하면서 사회봉사와 같은 새로운 사목방법으로 민중을 대하였다. 19세기 독일의 여러 곳에서 교회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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