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동방교회와 갈라졌는가?

 

왜 동방교회와 갈라졌는가




정교(정교, Orthodox)라는 말은 정통 교리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녔다고,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규정한 가톨릭 교리를 배척하는 네스토리우스 파 같은 이단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공의회의 신경을 받아들이는 동방 가톨릭을 ꡐ정교ꡑ라 했었다. 그러나 11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동방 정교 지도자들은 로마와 갈등을 빚게 돼 많은 신자들이 그들을 따랐다. 서방교회의 라틴 문화와 동방교회의 그리스 혹은 비잔틴 문화의 차이, 그리고 동방 및 서방 군주의 교회내 역할에 대한 이견은 교리문제 못지않게 분열을 자극했다. 추상적인 서방의 신학과 보다 전례적인 동방의 신학의 차이는 삼위일체 논쟁에서 날카롭게 되었다. 삼위일체에 관한 서방 신학의 발달로, 6세기에는 니케아 신경 ꡒ성신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나시며ꡓ에 ꡐ성자에게서ꡑ(Filioque)를 덧붙이는 일은 이미 관습이 돼있었다. 동방 가톨릭은 이를 배척하면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의 규정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서방교회를 비난했다. 또한 정치적인 대결이 문화적인 갈등을 악화시켜갔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라틴 문화에 대한 비탄진 관습을 과감하게 수호했다.


체룰라리우스(1043-58)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자, 교황 레오 9세와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 체룰라리우스는 그리스 전례를 따르지 않는 수도원과 성당들을 폐쇄하고, 성찬식에서 누룩없는 빵을 사용하지 않고 사제독신제를 거부했다. 교황은 사절을 보내 총대주교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총대주교는 ꡐ전교회ꡑ의 총대주교라는 칭호와 자신의 총대주교직에 대한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한 교황 친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황사절인 훔베르트 추기경은 반(反)그리스 교회론을 발행하고 총대주교를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리스 성직자들이 총대주교를 지지하자, 그들의 적개심에 분노한 추기경은 그리스 교회의 관습을 단죄하고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파문장을 상지(하기아 소피아)대성당의 제단에 놓았다. 격분한 총대주교도 교황사절들을 파문했다. 동서 교회가 완전히 갈라선 1054년 7월 16일의 일이다. 그후 9백년이 지난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가톨릭과 정교회 간의 상호 파문을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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