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토 공의회

 

트렌토 공의회


     공의회의 의제 채택 문제:  트렌토 공의회(1545-1563) 개최 전에 황제 카알 5세와 교황 바오로 3세는 공의회의 원칙적인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쟁점은 공의회의 중요한 의제에 대한 것이었다. 황제의 관심사는 독일의 종교적 분열에서 일어난 정치 및 사회적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한 교회 규율에 대한 쇄신과 가톨릭과 개신교의 재일치였다. 그러나 교황은 신앙문제의 해결을 중심 과제로 보았다. 가톨릭 신학 영역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격이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는가가 명백하여졌기 때문에, 자기 고유의 신앙 요소에 대한 지적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이제까지 교회의 교리는 확실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교회의 입장에서 이단인 루터의 새로운 신학을 낳게 되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가 주창하는 성서유일사상, 신앙에 의한 구원, 성사에 대한 배격과 새로운 교회관등의 교리에 대응하여 신조 문제 전반에 걸쳐 재정비할 필요가 느꼈다. 결국 황제와 교황은 1546년 1월22일 교회 쇄신의 핵심이 되는 규율 문제와 신조 문제를 함께 다루기로 합의하였다.


트렌토 공의회는 전체적으로 보아 교회 내의 반성이며 가톨릭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개신교인은 이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독일 국회의 종교 회담이나 신학자들의 토의가 아니었고, 다만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적 주장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를 재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독일  주교들이 소수만 공의회에 참석하였을 뿐이고 로마교회 계통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당시 종교개혁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과오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 독일의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1555년 가을에 이르러서야 참석하기 시작했다.




    공의회의 진행과정 : 공의회는 세 시기, 즉 제1기(1545-1547), 제2기(1551-1552),제3기(1562-1563)로 구분된다. 이 기간 동안 다룬 안건은 너무 많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제1기(1545-1547):제1기는 교황 바오로 3세 시대에 속하며 8차에 걸친 회합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신앙의 2대 원천인 성서와 성전의 교리(4회기), 원죄론(5회기), 의화문제(6회기), 성사 일반론(7회기)을 취급하였다. 공의회는 제4차 회의에서(1546.4.8) 프로테스탄트의 ‘다만 성서 원칙’에 대해 성서와 성전이란 2개의 신앙 원천설을 내세웠다.즉 성전도 古來의 가톨릭적 해석을 따라 ‘동일한 외경’으로써 신앙 원천으로 존중시되어야 한다.성서만의 일방적 제한은 이단적이라고 하였다. 제5차 및 제6차 회의에서 원죄와 의화에 관한 토의가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의 ‘다만 은총설’과 정의 가산설에 대해 타락한 인성의 절대적 타락설이 배척되고, 구원을 위한 영혼에 고작된 성성 은총이 제시되었다. 은총지위에 있고, 신앙과 사랑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공로가 되는 선업을 할 수 있다. 제7차 회의에서 성사에 대한 교리가 전체적으로만이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세례와 견진성사에 관한 교리가 정의되었다. 이것들 역시 종교개혁의 중심문제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이상의 교리 문제는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것으로 가톨릭 교회가 이에 대한 공식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제2기(1551-1552):제2기는 교황 율리오 3세 시대에 속한다. 이 동안 성체성사(13회기),고해성사와 병자성사(14회기)에 대한 정의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1552년 1월에는 황제의 주선으로 개신교의 대표들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도착할때까지 신앙에 대한 칙령을 공표하지 말고 이미 결의된 신앙에 대한 조항을 취소하고 다시 논의하자고 요구하면서 공의회 우위 사상을 내세웠다. 그러나 개신교측의 교황의 공의회 주재에 대한 거부를 가톨릭 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기에 1552년 4월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이 공의회를 방해하는 폭동이 일어나 더이상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대화는 있을 수 없었다.




   제3기(1562-1563):제3기는 교황 바오로 4세 재위 기간에 개최되었으며 이 회기에서 성과가 가장 많았다. 유그노파의 큰 발전과 프랑스의 전국 교회회의로 인한 프랑스의 절박한 상황이 그 계기가 되었다. 독일 주교들은 교파간의 위험스러운 긴장관계로 그들의 교구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공의회는 양형(성체와 성혈) 영성체(21회기), 미사성제(22회기),신품성사(23회기), 혼인성사(24회기), 연옥, 대사, 성인 및 성화상에 대한 공경(25회기)등의 교리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혼인을 심의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비밀혼인을 막을 수 있는가가 걱정거리였었고 그래서 타멧시 교령에서 앞으로 해당 본당신부와 2명의 증인 앞에서 체결되지 않는 한 모든 혼인이 무효라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25차 회기에서 연옥, 대사, 성인과 유해 공경, 성화상 사용에 관한 교령을 반포로 공의회는 폐회되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4세는 1564년 1월 26일에 모든 칙서와 쇄신령에 서명하였다. 결의를 실시하는 것은 이제부터 교황과 주교와 전 교회가 종사할 일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최고 교도직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논쟁신학적인 대답이 아니라 교도직에 의한 가톨릭 신앙 교리에 관한 명확한 선언이요, 교회의 내부적인 자각이요, 참된 종교개혁이었다.




     공의회의 결과: 공의회이후 가톨릭 교회는 쇄신의 시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교황청, 지방교회, 수도원 등 모든 곳에서 착수된 교회개혁은 고질화된 옛 폐단에 대한 힘겨운 투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대에 가톨릭 교회의 각계 각층에서 수많은 성인들이 출현하여 우리는 이 시기를 ‘성자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교회 쇄신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시대적 인물들이었다.




3백 년 만에 처음으로 성자 교황이 등장하였다.이 사실은 머리의 개혁을 통한 교회쇄신의 진지성을 확신시키고 납득시킨 점에서 특히 중요하였다. 그는 성인 비오 5세(1566-1572)로서 도미니꼬회 수도자였다. 그는 교황이 된 후에도 고신극기로 거룩한 생활을 하였고 기도 중에 하느님과의 일치를 열렬한 개혁 정신으로 승화시켰다. 교황은 그의 가장 중대한 시대적 사명이 교회의 내적 혁신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우선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탁월한 인물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선교와 신앙의 보존을 위한 성성과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의 교회 개혁 상담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하였다. 또한 그는 성직자들을 위해서 교리문답서, 성무일도서, 미사경본을 새로 발간했다. 교회생활의 내적 기능을 위해 엄격히 관철된 교황청의 쇄신 및 교황청 직원들의 성직매매와 기타 폐해의 극복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비오 5세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장 위대한 개혁교황으로 간주되는 것은 당연하다.




지방교회에서도 수많은 훌륭한 주교들이 교회 쇄신에 헌신하였다. 예컨데 밀라노의 대주교 보로메오 성인은 트렌토 공의회의 개혁 정신을 수행한 전형적 사목자였다. 그는 1582년 교회 혁신을 내용으로 ‘밀라노 교회의 칙서’를 발간하여 밀라노 교구뿐 아니라 다른 교구의 쇄신 사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도원은 가장 근본적인 내적 생활의 혁신을 단행하였다. 까르투시아회는 1581년 수도규칙을 개정, 쇄신하였다.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분파인 까푸친회는 창설자인 프란치스꼬 성인의 엄격한 규율과 가난을 강조하는 규칙을 채택하고 교회의 쇄신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1562년 초기 가르멜회의 엄격한 수도규칙 생활을 강조하였다. ‘데레사의 개혁’은 점차로 가르멜 수도회 전체에 퍼졌다. 이 성녀는 가톨릭 교회의 신비주의와 극기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 관상생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명한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엄수하는 트라피스트 수도회도 이 때(1622년) 창설되었다.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1535년 브레쉬아에 우르술라회를 창설하였는데 이 회는 1544년 교황의 인가를 얻었고, 1582년 자선과 여자 교육을 위한 여자수도회로 개편되었다. 천주의 성요한이 설립한 경건한 평신도 단체에서 1572년 병자간호를 위한 자비의 友會가 출현하였다.


아울러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도 설립되었다. 우선 자선활동과 일반 대중의 신심 강화를 목적으로 모인 성직자와 평신도의 친목단체에서 출발한 ‘재속성직수도회’(테아틴회, 성 바오로회, 소마스키회, 예수회)가 등장하였다. 이는 16세기에만 있었던 현상으로서 회원들이 수도허원을 하고 규칙적 공동생활을 하면서 사목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575년 이딸리아에서는 필립 네리를 중심으로 재속성직자들이 수도허원을 하지 않고 공동생활과 사목활동을 하는 오라또리오회가 창설되었다. 그는 매혹적인 로마의 사도였는데, 그는 이 문예부흥의 도시를 그의 새로운 사목방법으로 종교적, 윤리적으로 쇄신하는 기적을 낳았다.


1611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예수 그리스도의 오라또리오회는 성직자들의 성화와 교육을 사명으로 했다. 이들은 후에 슐피스회를 설립하여 신학생 교육에 전념했고 그 교육 방법은 20세기 초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회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많은 수도회도 이 때에 창설되었다. 이 수도회들(우르술라회, 가밀로회, 마리아 방문회, 자비의 자매회, 천주의 요한 의료 봉사회)은 병자 간호, 임종자 보호, 가난한 이에 대한 보살핌, 교육 등에 봉사하였다.


이와 같이 수많은 성인들의 배출, 수도회의 설립. 자선사업이나 교육사업의 번창은 트렌토 공의회 이후에 쇄신된 가톨릭 교회의 참다운 그리스도교 정신을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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