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대사 논쟁(면죄부), 트렌트공의회, 국교회사상, 이단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16세기의 이른바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서의 쇄신에서 시작하여 정치적 개입과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교회 밖에서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은 루터 자신의 개인적 성격, 사상과 더불어 중세 말기의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신학 역시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되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즉 신학이나 교리가 성서 구절의 인용이나 학문적인 견해를 나열하는 단순한 자식 전달이었을 뿐,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그 방법을 일깨워주는 지혜를 주지 못했음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신앙문제는 모호하게 만든 오컴의 유명론(唯名論)과 영혼이 직접 신과 대면할 수 있다는 이른바 신비신학의 창시자로 지적되는 에크하르트, 인간의 절대 가치를 주장한 반그리스도교적인 인문주의 들이 또한 종교개혁의 정신적 원인이 되었다.  물론 당시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 또한 배제할 수는 없겠다.




  마지막으로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의 횃불이 일어났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개혁과 쇄신의 소리는 훨씬 이전부터 교회 내부에서 항상 있어 왔었다.  그러나 교회의 단합된 모습은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루터가 95개 조항의 명제를 제시할 때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회적 상황이 많이 변한 상태였다.




  그리고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계시한 95개 조항은 다만 학술상의 논쟁문이었고 공공연한 선전문(宣傳文)은 아니었다.  당시 교회문은 대학의 혹판격으로 논쟁의 정보와 학술적 행사가 게시되는 장소 역할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제시한 원인은, 당시 도미니꼬회의 수사 신부인 텟셀의 대사(大赦)에 대한 설교 때문이었다.  교황 레오10세의 베드로대성당 신축기금 모금을 위해 공포된 대사(大赦)에 관한 칙령(당시 교회뿐만 아니라 교량같은 공공건물과 관련하여 대사를 반포함으로 오랜 관습으로 이어왔다)이 발단이 되기는 하였지만 텟셀의 웅변적인 기금 모집 설교는 대중의 귀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교회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1519년 3월 3일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서 “나는 로마 교회의 권위와 교황 성하의 권위에 간섭하거나 혹은 음모로써 암암리에 해하려 원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 앞에 맹세합니다”라고 하였고, 또한 이틀 후에 보낸 편지에서도 “로마 교황으로부터 이역(離逆)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루터가 교회에 대해 의식적으로 도전한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불행한 과오이기는 하지만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 루터에 대한 관대한 태도가 이루어졌다면 그렇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여하간 인류 역사상 대사건인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일어났고 그 여파는 종교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방면에 걸쳐 큰 층격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건으로 그리스도 교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되고 유럽 사회는 대변혁을 가져 왔다. 






  3-1.  마르틴 루터




  아우구스띠노회의 수사신부(修士神父)였던 M.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충격을 받고, 1517년 교회의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독일의 대사 시행을 책임진 고위 성직자에게 항의하는 편지와, 대사의 남용을 논박하는 “95개 항의 신학 명제”를 작성하여 보냄으로써 대사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 기원을 루터의 종교분열에 두고 있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 그 대사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사목자로서 설교를 통해, 대사 교리와 구원론을 설명하면서 대사 설교가들을 비판, 신자들에게 대사 남용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 영혼은 원죄로 인하여 완전히 부패하여 그 어떤 착한 행위도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 의로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우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功德)이 병풍과도 같이 인간의 죄를 덮어 주는 것으므로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만 있다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고신극기(苦身克己), 종교계육의 엄수, 고해성사, 자선사업, 덕행등이 구원의 조건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신뢰만 필요하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수한 자비뿐이다”라고 하면서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신앙만으로 구원도리 수 있다고 요약하였다.






  3-2.  대사(大赦)




  죄를 범한 죄인은 고행성사를 통해서 죄의 잘못을 용서받고 영원한 벌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죄의 벌은 고해신부가 부과하는 보속의 실천을 통해서 탕감할 수 있고, 현세에서 보속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연옥에서 보속을 해야만 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11세기 초기에 등장한 참된 의미의 대사(大赦)는, 고해신부가 사목적 배려에서 고백자의 죄를 사죄한 후 남아 있는 죄벌(잠벌)에 대해 부과하는 속죄 행위인 보속을 원화하여 신심행위(기도)나 선업(자선)을 실천하는 조건으로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사면하는 대체 행위를 의미한다.




  초대교회에서도 사도들은 신자가 죄를 범하며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단죄하여 축출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죄인이 지가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경우에는 하느님게 용서를 받고 다시 교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또한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죄인인 교우의 속죄(贖罪)에 동참하여 하느님께 그의 용서를 간구할 것을 권유하였다.  다른 형제들의 속죄에 참여하여 그의 사죄(赦罪)를 하느님께 기도하는 대속(代贖)의 정신은 지상, 연옥, 처국에 있는 교회의 구성원 사이의 영적 교류인 ‘성인들의 통공(通攻)’이라는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모든 신자들이 이 신비체의 지체로서 갖는 연대성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 신비체인 교회 공동체가 기도와 고행 그리고 선행을 통해서 고통받는 형제를 돕게 하는 연대책임의 원칙은 후일 대사의 길을 마련한 근거가 되었다. 


  6세기에 들면서 속죄 규율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우선 주교가 집전하던 사죄예절에 신부도 주례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속죄 관습에 있어서 공동 고백 대신 개인 비밀 고백이 도입되는 길을 열어 놓았으며 동시에 고해성사의 주요 요소로 죄를 뉘우치는 통회, 죄의 고백, 죄벌에 대한 교회벌인 보속이 확정됨에 따라 자연히 고해 신부는 보속을 부과하는 재량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보속 방법이 매우 엄격하였고, 속죄 기간도 매우 길어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다.  그리고 보속을 완수하지 못할 채 다시 죄를 짓고 고백하여 보속을 받는 신자들도 있다.  이러한 많은 속죄자들이 보속이 천문학적인 비례로 증가하여 그들은 죄벌에 대한 보속을 끝내지 못하고 죽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해 생존한 신자들의 대속(代贖)을 허가하였고, 살아있는 속죄자들을 위해서는 장기간의 엄격한 보속을 완호하는 뜻에서 실천 가능한 신심 행위(기도, 성지 순례, 성당 참배)와 선행(자선)으로 대치시켰다.  이러한 보속의 대체는 신자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에서 교회가 엄격한 보속에 대한 취한 완화 조치였다. 




  이렇게 하여 용서받은 죄에 대한 아직 남아 있는 벌(잠벌(暫罰))은 개인의 보속 행위로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9세기에 들어 교회가 신자들이 잠벌을 사해주는 사면(赦免)의 관습이 생겼다.  특히 교황들의 잠벌에 대한 조건부 사면이 구체적으로 발전한 관습이 대사(大赦)였고, 이것은 중세 그리스도교 신심을 활성화시키고 교회 예술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처음에 대사 설교가들은 신자들에게 대사를 얻기 위한 조건인 죄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과 고해성사의 의무를 완성하도록 가르쳤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일반 대중의 대상에 대한 열의는 중세 시대의 진지하고 깊은 종교심의 앙양에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중세인의 영성에 대한 관심, 죄에 대한 경계심, 사죄를 얻으려는 노력은 대사가 붙은 성지순레와 성당참배 등 신심행위로 표현되었고, 이것이 신자 개인의 신앙 열의를 증진시켰다. 이는 대사 시행을 위한 설교의 결과였고 이러한 점에서 이 시대보다 더 종교적인 시대가 없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중세인의 신앙열은 대사 시행을 성공시켰고, 결과적으로 대사를 얻기 위해 선행의 수단으로 등장한 기부금은 목적대로 사용되어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건립, 개축, 장식, 보수되었다.  그러나 보수의 남용은 그 기차가 떨어지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서구 대이교 시대의 교항들, 즉 로마 교황들과 아비뇽의 교황들은 시대의 교황들, 즉 로마 교황들과 아비뇽의 교황들은 대립적 권위의식에서 상대방을 능가하고 사도적 전통성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서도 경쟁하듯 대사를 남발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대사 획득에 요구되는 전제 조건인 선행이, 현금 지불로 가능해진 후에는 소위 ‘대사판매’라고 하는 대사 남용이 만연하였다. 




  15세기에 이르러 대사는 교회의 주교 수입원으로 오용되어 설교가들은 모금의 성공을 위해서 대사응 효과를 과대 설명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죄의 잘못과 죄와 벌 사이의 구분이 불투명해졌고 무지한 신자들은 대사를 구원과 혼동하여 대사 부여를 약속하는 고해성사표(대사부 大赦付)를 천국 통행증쯤으로 오해하였다.  신자들은 고헤성사표에서 강조하는 대사를 얻기 위한 내적 정화의 노력을 등한시하여 돈이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대사 설교가들들은 과장된 표현은 일반 대중에게 ‘면벌(免罰)’의 효과를 지닌 대사를 ‘면죄(免罪)’의 효과를 갖는 것으로 오도하였고, 오늘날까지 대사부 또는 대사증서를 면죄부(免罪符)로 잘못 표현케 하였다. 이제 교회 안에서는 잘못된 대사 시행에 대한 개혁의 소리가 드높았고 대사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공식적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루터가 ‘대사’교리에 대한 토의를 제기하기 위해 ’95개항 면제’를 공표한 사실은 자연스러운 사건이라 하겠으나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 아니란 사살이 지극히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루터의 사상과 대사 논쟁은 결국 루터의 파문과 함께 그리스도교 세계가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의 루터 종교개혁, 그리고 제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영국에서도 성공회(국교회)가 일어났다.




   가톨릭교회도 15세기 초부터 교회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교회쇄신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함에 따라 1545년 트렌트에서 공의회(1545-1563)가 개최되었으니 여기서 타락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규율을 혁신하였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위진 가톨릭 교의를 맹백히 하였고 개혁을 추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정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쇄신이 일어났다.  트렌트공의회의 개혁정신은 선교활동에서도 나타났는데 종교개혁 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던 가톨릭교회는 리베리아 반도의 가톨릭국가인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선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들어서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세계의 여러 나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사상적으로 정면 도전을 받게 된다.  특히 국교회 사상과 가톨릭 정통신학을 반대하는 이단운동인 얀세니즘과 계몽주의 사상은 가톨릭신학에 정면 도전하였다.  






   3-4.  트렌트공의회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개혁과 쇄신을 자기네 개혁에 반발해서 시행하는 ‘반동 종교개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는 관계없이 그 이전인 15세기 초에 가톨릭 안에서 일어난 성장한 교회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콘스탄스공의회)는 사실과 그리한 개혁운동의 결과가 트렌트공의회의 결정이라는 점으로 보아 최근의 학자들은 이 개혁을 긍정적 의미의 ‘가톨릭 교회쇄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3-5.  가톨릭교회의 쇄신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교회쇄신이 방어적 운동, 즉 반동 종교개혁이라는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가톨릭의 교회쇄신을 촉진하였고 그 방향 설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트렌트공의회 개최 전에 독일의 카일5세 황제와 교황 바오로3세는 공의회의 원칙적인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왜나하면, 황제가 종교적 분열로 말미암은 정치 및 사회적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교회 규율의 쇄신과 가톨릭과 개신교의 재일치에 관심을 둔 반면, 교황은 개신교가 주장하는 성서유일사상, 신앙에 의한 구원, 성서에 대한 배격과 제도적 교회를 반대하는 영적 교회를 주장하는 새로운 교회관 등의 교리 대응하여 신조문제 전반에 걸처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전체적으로 볼 때 교회내의 반성이며 가톨릭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적 주장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정통교리를 재확이하는 교회의 교도직 수행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공의회는 세 시기, 즉 제1기(1545-1547), 제2기(1551-1552), 제3기(1562-1563)로 구분된다.




  제1기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오로지 성서로만”원칙에 대하여 신앙의 2대 원천인 “성서와 성전”교리를 확정하였다.  즉 성전도 고래의 가톨릭적 해석에 따라 “동일한 경외심으로써” 신앙원천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성서만을 신앙의 원천으로 제한하는 것은 이단적이라고 결정한 것이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의 “오로지 은총으로서만”원칙과 정의가산설(正義 加算設)에 대하여 “타락한 인성의 절대적 타락설을 배척하고 구원을 위한 영혼에 고착된 성화은총”을 제시하였다.




  교황 율리오3세 시대에 속하는 제2기에서는 “성체성사”에 대하여 즉, 그리스도의 현재(現在)와 전질변화(全質變化)로서의 성체성사가 명백히 정의되었으며 고해성사와 병성사가 다루어졌다.  여기에서 특히 숙죄(淑罪)의 성사적 성격, 비밀고해, 보속 등이 뚜럿이 밝혀졌다.




  제3기의 공의회에서는 양형(성체와 성혈), 영성체와 미사성제, 신품성사, 혼인성사 등의 교리에 대한 정의와 연옥, 대사 성인 및 상화상에 대한 공경에 관한 교령이 결정되었다.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쇄신의 시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교황청, 지방교회, 수도원 등 모든 곳에서 착수된 교회개혁은 옛 폐단에 대한 힘겨운 싸움이기도 하였다.  다향스럽게도 시대의 필요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성인들이 이 시대에 나타났다.




  특히 비오5세 교황은 그의 가장 중대한 시대적 사명이 교회의 내적 혁신이라고 확신하여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탁월한 인물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선교와 신앙의 보존을 위한 성성(聖省)과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의 교회개혁 상담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하였다.  또한 그는 성직자들을 위해 교리문답서, 성무일도서, 미사경본 등을 새로 발간하였다.




  지방 교회에서도 많은 주교들이 교회쇄신에 헌신하였는데 특히 밀라노의 보로메오 대주교는 공의회의 개혁정신을 수행한 전형적 사목자였다.  그는 ‘밀라노교회 칙서’를 발간하여 밀라노교구뿐만 아니라 다른 교구의 쇄신사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도원은 가장 근본적인 내적 생활의 혁신을 단행하였다.  카프친회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엄격한 규율과 가난을 강조하는 규칙을 채택하고 교회의 쇄신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1562년 초기 가르멜회의 엄격한 수도 규칙생활을 강조하였다.  또한 유명한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엄수하는 트라피스트회도 이때 창설되었다. 


아울러 재속 성직 수도회 등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의 설립, 자선사업이나 교육사업의 번창은, 트렌트공의회 이후 쇄신된  가톨릭교회의 참된 그리스도적 정신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3-6.  세계선교의 시대




  고대에서의 지중해는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여러 민족들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결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창시 이후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사이의 통로는 폐쇄되어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종교’가 되었으며, 게다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은 로마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유럽’에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십자군 원정은 실패하였으며 동방교회와의 재일치도 끝났고(1204년) 더구나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터어키의 점령(1453년)은 그리스도교적 유럽의 판도를 더욱 축소시켰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서구교회가 빈곤해지고 축소되어가는 과정에 만난 최후의 타격이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이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유럽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세계탐험에 나서면서 교회는 ‘세계선교’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인도와 통상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이슬람제국 때문에 율로를 통한 무역이 불가능하여 동양 항로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은 동인도 해안과 아프라카, 브라질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1542년에는 상선이 일본에까지 이르렀고, 1557년에는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극동무역가 선교의  중시지로 삼았다. 


한편 스페인은 중남미의 프에르토니코, 쿠바, 파나마,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를 정복하여 식민지를 삼았다.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의 건설은 유럽인들이 동양과 직접 통상하려는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종교적 문제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에게 식민지에 성당을 건설하고 선교사들의 생계 유지와 신변 안전을 보장할 의무를 요구하는 대신에 교회 감독권과 주교 임명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선교 후원제도는 교회의 의도와는 달리 선교보다는 군사적 정복을 정당화시켜주는 동기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정복자들의 식민지 정책과 강제적 개종정책은 원주민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착취자와 압제자의 종료로 보이게 하였고 선교사를 식민정책의 협조자로 생각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로 교회의 선교는 강력한 식민지 정책이  확립되고 토착종교가 저항하지 않는 중남미 지역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지만 고대 문명국가인 인도, 중국, 일본에서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또한 선교방법에 있어서도 선교의 중심세력이던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의 선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식민지의 토착문화를 무시하고 원주민에게 유럽의 가톨릭 신앙을 그대로 주입시키고자한 반면,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토착민들과 의식주를 함께 하였다.  또한 그들은 원주민들이 신앙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우선 그들의 언어로 교회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 간의 충돌로 예수회의 순응주의적 선교방법을 금지하는 유럽주의의 근시안적인 태도는 결국 인도와 중국에서의 선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인도와 중국의 문화에 대해 교회가 취한 태도와 선교방법이  초래한 결과는 오늘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3-7.  국교회사상과 이단운동




트렌트공의회 이후 맞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는 교회쇄신이 정착된 후 도전을 받게 되었다.  각 국가의 군주들과 지방의 주교들은 교황의 중앙집권정책을 지나친 간섭으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각 국가에서 일기 시작한 국가지상주의(국가주의)와 이에 따른 국교회사상은 17-18세기에 프랑스(갈리아주의), 독일(페브로니오사상),  오스트리아(요셉주의)에서 교회를 괴롭혔던 반가톨릭운동을 일으켰다.




  벨기에의 얀센은 가의 저서 ‘아우구스띠노’에서 여러 신학이 혼합된 이단을 내세웠는데 이 얀세니즘은 겉으로는 특수한 신심과 엄격성을 제창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아우구스띠노와 원죄설과 은총론을 편견적 과장으로 내세우고 여기에 칼빈의 신학을 첨가하였다.


  이 사상은 인노첸스10세 교황과 끌레멘스11세 교황에 의해 단죄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서 발전한 사조인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의 정신문화를 특징짓는 지성운동으로서 이 운동은 지적 문제에 있어서 모든 지식과 진리는 인간의 이성, 직접적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진다고 주장하는 경험론적 합리주의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기존의 권위, 전통 제도, 관습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배격하며서 관용의 인도적 이상, 정의사회 구현, 인간의 윤리와 복지의 향상에 이바지하는 데 학문적 방법을 사용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서양에서 중세기적 사고방식과 생활 양식에 묶어 있는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현대적 발전을 가능케 한 사상가들이었다.




  계몽사상은 중세기의 비인도적인 종교재판과 고문의 철폐, 종교 차별폐지뿐만 아니라 인권 투쟁의 승리를 갖고 왔지만 이들 중에는 무신론자 또는 이신론자(理信論者)들이 있어 교회와 충돌하게 된다.  계몽주의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합리주의 철학은 가톨릭교회에 대해 큰 위기를 불러 일으켰는데 철학적 합리주의와 더불어 종교를 하나의 자연적 현상으로 격하시키는 자연조욕의 체계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자연종교의 사상은 이신론(理神論)으로 발전하여 가톨릭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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