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의 아비뇽 시대(1305-1377)

 

교황청의 아비뇽 시대(1305-1377)




  14세기부터 교회는 교황권이 약화되는 위기에 처하였고 이는 종교분열의 외적 원인이 되었다. 


  1305년 프랑스 태생 고트가, 클레멘스5세로 교황에 선출되었으나 프랑스 국왕 필립4세와 정교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로마행을 연기하며서 교황청의 아비뇽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이탈리아 정국의 불안정, 사회 소요, 로마 시민의 반교황봉기로 교황들의 아비뇽 체류는 70여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러한 교황청의 아비뇽 장기 체류에 대해 경건한 신앙인들은 통탄하여 혹평을 하며, 아비뇽 교황의 ‘바빌론 유수(幽囚)’라고 표현하였다.  7명의 아비뇽 교황들은 프랑스인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교황이 프랑스의 주교로 과소평가되었고 교황권의 보편성이 상실되었다.  더우기 아비뇽 교황들은 부족한 재정을 매우기 위해 성직록을 더없이 남용해고 선불과 수수료를 요구하고, 징벌과 파문으로 취협하는등 그야말로 묘한을 내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물론 교황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니 교황청을 화려하게 건립하는 등 쓸데없는 재정을 팽창시켜 놓은 것이 더 문제였다.  어쨌든 지나친 세금징수는 교회를 불안케 하고 전반적이 격분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친족을 등용하는 이른바 족벌주의는 교회의 명성을 더없이 더럽혔다. 


일부 교황들은 교회 재산과 영토를 사유화하고 교회의 주요 직책을 그의 가족들에게 분배하기도 하였다. 


 


 


서구의 대이교(大離敎) 1378-1417


 


  신앙의 분열로 이단에까지 이르지는 않고 특히 교황의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는데 그치는 것을 이교라고한다.  이교는 종종 있었는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도 있고 중국의 애국교회처럼 최근에 생긴 것도 있다. 그러나 큰이교는 동방과 서방에 각각 한 번씩 있었는데 1054년의 동방 대이교와 서구 대이교가 그것이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11세가 로마에 들어옴으로써 아비뇽의 교황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1378년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우르바노6세는 전제군주형의 인물로서 추기경들과 불화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스페인의 추기경들은 교황 선거가 로마인들의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하고 아비뇽에서 대립 교황으로 클레멘스7세를 선출하였다.  이제 교회 안에서 2명의 교황이 현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청 분규를 수습하기 위하여 1409년 피사에서 열린 공의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을 해임하고 알렉산델5세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때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들이 반대하고 나서서 교회는 3명의 교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청의 분열은 콘스탄스공의회의 결정으로 끝났다.  모라의 교황 그레고리오12세는 공의회에서 정통 교황으로 인정받은 뒤에 가진 사임하였고 아비뇽 교황과 피사 교황들은 해임되는 동시에 1417년 새 교황으로 마르티노5세가 선출되었다.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와 분규는 교황권의 약화와 함께 공의회 우위 운동과 이단 운동을 초래하였다.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고, 교회의 모든 문제는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에 재소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공의회 지상주의’가 주장되었다.  이 사상은 콘스탄스공의회와 바젤공의회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공의회 우위 운동은 비오2세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이로써 교황의 수위권은 재정립되었지만 실추된 윤리적, 영신적 권위까지는 회복될 수 없었으니 이것은, 루터가 교회와 교황청에 저항하면서 그 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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