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제(빠치피꼬) 신부

 

유방제(빠치피꼬) 신부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으로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애르 주교가 임명되었을 때에, 이딸리아의 나폴리에 있는 성가정(聖家庭) 신학교 출신의 중국인 유 방제(劉方濟) 신부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이곳 신학교는 포교성성이 중국 선교사의 양성을 위해 설립한 교육 기관인데, 유 신부는 이곳에서 약 7년 동안 공부하면서 이미 몇 년 전에 조선 교우들이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한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의 복음화에 헌신하겠다는 의사를 그의 스승인 갈라똘라 교장 신부에게 표명한 적이 있었다.


  포교성성에서 조선 선교의 지원자를 찾는다는 소식이 신학교에 전해지자 그는 그의 동료와 함께 조선 포교에 나서겠다고 자청하였다. 따라서 포교성성은 서양인 브뤼기애르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조선인과 외모가 비슷하여 선교지에서 발각되지 않고 좀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동양인을 선발대로 파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두 중국인들의 청원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두 지원자 중에서 인내심이 강한 유 방제만이 브뤼기애르 주교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어, 유럽을 떠나 1832년 11월에는 북경에 도착하여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33년 4월 10일, 유 방제 신부는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남경(南京)교구장 삐레스 주교의 주선으로 브뤼기애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돕고 있던 왕 요셉의 안내로 요동지방에서 사목활동을 하며 조선의 연락 교우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조선 부연사 일행에 끼여 성직자 파견을 청원하기 위해 북경 교회를 왕래하던 조선 교우들을 만난 그는 즉시 이들을 따라나섰다. 1834년 1월 3일에 국경을 넘어 13일 동안의 여행 끝에 한양에 도착한 유 신부는 정 하상(바오로) 회장 집에 머물게 되었다.


  곧이어 유 방제 신부는 글(한문)로써 2백여 명의 한양 지방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선교사로서의 열성을 갖고 사목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국인으로서 그의 국어인 한문을 통해서 조선 교회의 지도자들과 의사를 소통하는 데에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아 조선말 공부에 소홀하였다. 따라서 일반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보는데 커다란 불편을 느꼈다. 더우기 유 신부는 한양에만 머물면서 지방의 교우촌 사목 방문을 전혀 하지 않아, 지방 교우들은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모시는 영적 기쁨의 기회를 누릴 수 없었다.


  또한 그는 포교성성으로부터 교구장인 브뤼기애르 주교의 여입을 준비하기 위해 조선에 파견된 사명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의 장상에게 입국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고, 조선 교우들에게도 주교의 입국을 반대하도록 충동하였다. 유 신부는 조선 교회를 북경교구에 예속시키고 자기 자신이 담당하기를 바라고, 1834년 11월 18일에 마카오에 있는 포교성성 극동지부장인 움삐에레스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 교회는 서양인이나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 자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삐레스 주교에게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조선 신학교’를 북경에 세울 것을 제의하면서 사제 지망자로 두명의 젊은이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브뤼기애르 주교는 유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선인 사제 양성과 신학교의 설립은 교구장의 고유한 특권임을 상기시키면서 신학생의 북경 파견 계획을 중단하라는 금령을 하단하였고, 주교의 영입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브뤼기애르 주교는 유 신부의 충동에 따라 주교의 입국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던 조선 교우들이 1834년 가을, 북경에 왔을 때에 왕 요셉을 보내어 교구장의 뜻을 어기는 교우는 파문을 받는다는 교황의 법령을 알려주었다.


  조선 교우들은 1835년 초에 교황과 브뤼기애르 주교에게 편지를 올려 11월 23일 또는 24일에 북경으로 교구장을 모시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따라서 유 방제 신부도 브뤼기애르 주교에게 입국 안내 교우들을 파견하고 주교의 거처를 마련하였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1835년 11월에 약속된 국경 지방에 도착한 조선 교우들은 주교의 서거 소식을 듣고, 대신 조선교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어 잠입을 기다리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삐에르 필베르 모방 신부를 한양으로 안내하였다. 유 방제 신부는 모방 신부로부터 그동안에 성직자의 품위를 손상시킨 행적에 대한 충고와 견책을 받고 1836년 말에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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