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자매 김 효임과 김 효주
22.1.2 가정 환경
동정 자매 순교자의 가정 환경에 있어서 교회사 기록, 즉 「기해일기」,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은 일치하고 있지 않다. 「기해일기」는 김 꼴룸바의 가정에는 6남매가 있는데 그중에 남동생 김 안또니오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고, 달레는 김 안또니오에게 누이 두 사람 김 효임과 김 효주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다블뤼 주교는 김 안또니오는 동정을 서원한 세 누이를 부양하는데 김 꼴룸바와 김 아녜스가 체포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살펴볼 때에 각 인물들은 일치하고 있으나 다만 부수적 요소 즉 살던 장소와 나이 등에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이 문제가 해결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세 가지 기록에서 나타나는 김 안또니오를 동일 인물로 간주하여 동정 자매와 그 가족의 행적을 각 문헌에서 분석, 종합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김 효임(꼴룸바, 1814-1839)은 경기도 광주 지방의 구산에 있는 밤섬이라는 동네(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에서, 1814년에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동생인 효주는 1816년에 출생하였다. 이 자매의 어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 여섯 자녀(삼 형제와 세 자매)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경건한 신앙인으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은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온 동네가 천주교를 신봉하는 교우촌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장남인 안또니오(1794-1841)는 1834년에 중국인 유 방제(빠치피꼬) 신부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에, 좀더 자주 성사를 받으려는 마음에 한양으로 올라와, 처음에는 느리꼴이라는 동네에서 지내다가 후에는 성밖 동대문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이라는 동네에 살았다. 그는 자기 집에 기도와 전례를 거행할 수 있는 경당(공소)을 마련하여, 1836년에 입국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모방 나 신부를 한동안 모시고 있었다. 1839년 3월 21일에 김 안또니오는 두 남동생과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몇 달 후 다시 배교자의 밀고로 남동생들은 모두 관가에 잡혀갔고, 미리 눈치를 챈 그는 피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띠노(1798-1841)와 그의 동생은 혹독한 고문 중에도 천주교 진리를 용감하게 밝히는 신앙의 증거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기해대박해(1839)가 끝난 후에도 이들은 석방되지 못하였고 아우구스띠노는 순교의 영광을 받을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 1년 6개월동안 옥중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1841년 1우러 28일(음력)에 진실한 통회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 속에서 42세로 선종하였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피신했던 안또니오도 1839년 말에 배교자의 밀고로 1840년 1월 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형조에 끌려가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곤장을 받고 치도곤 30도를 맞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오히려 옥중의 죄수들도 안또니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중에서 두 명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841년 4월 28일에 안또니오는 법정에 다시 나아가 곤장 60도를 맞고 그 이튿날 밤(4월 29일)에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고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2.1.3 순교
김 효임과 김 효주(아녜스 : 1816-1839)는 동새인 글라라와 함께 경건한 신앙생활 속에서 하느님께 동정을 허원하고, 한양에 있는 큰오빠 안또니오의 집에 가서 몇 년 동안 살다가 박해를 맞게 됐다. 1839년 5월 3일에 포졸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에 안또니오는 밖에서 미리 알고 가족과 함께 피신할 수 있었으나 두 자매인 꼴룸바와 아녜스는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다. 꼴룸바는 자기와 동생에게 몹시 거칠게 대하는 포졸들에게 “당신들이 우리를 잡아가면 당신들을 따라가겠어요. 그러나 나라의 죄인에게 이다지도 귀찮게 굴어요!”라고 말하였다.
포도청에 압송된 자매는 배교하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끝내 신앙을 버리기를 거절하자 심한 고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포장은 연약한 자매를 몽둥이로 어깨, 팔꿈치, 무릎 등을 무수히 때렸고 다섯 차례에 걸쳐 두 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두 나무 막대기를 끼워 비트는 형벌을 가해 뼈가 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고통의 신음보다는 천상의 기쁨에 잠겨 있는 듯한 침묵 가운데, 기도하는 자세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모습에 화가 치민 포장은 더욱 참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는 두 자매에게 뾰족한 몽둥이로 찌르는 형벌을 주었지만 조금도 마음을 굽히지 않자, 은근한 말로 타일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더욱 견고할 뿐이었다. 특히 아녜스는 외딴 감방에 끌려가 학춤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받았다. 이 형벌은 죄수의 옷을 모두 벗기고 두 손을 뒤로 묶어 팔을 공중에 매달고 네 사람이 번갈아가며 매질을 하는 것으로서, 몇 분만 지나도 혀가 빠져나오고 거품이 고이고 얼굴빛은 검붉어져서 죄수를 내려놓아 쉬게 하지 않으면, 곧 죽어버릴 만큼 가혹한 고문이었다. 그러나 아녜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거듭된 이러한 체벌을 받으면서 온갖 욕설과 조롱 속에서도 자기의 모든 고통을 하느님께 바치면서 조용히 받아들였다.
이제 포장은 두 자매를 배교시킬 희망은 포기하고 오빠 안또니오의 거처와 교우들의 이름을 대라고 추궁하였다. 그러나 꼴룸바는 “만 번 죽어도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을뿐 아니라, 우리 오라버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교우들을 고발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자매는 감옥으로 끌려가 옷을 벗기우고, 모진 매를 맞았으며 또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열두 번이나 등을 지지는 형벌을 받았지만 역시 자매는 고통을 모르는 듯한 조용한 모습을 보일 뿐이었고, 4~5일이 지나니까 기운을 다시 차리고 덴 자리도 깨끗이 없어졌다.
포장은 다시 자매에게 결혼할 나이에 이르렀는데도 아직 혼자 사는 이유를 물었다. 이때에 비로소 꼴룸바는 심문관의 문초에 대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의 눈에는 동정생활이 더 완전한 상태로 간주되기 때문에 우리들은 천주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여 실천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대답은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인 동정녀들이 자기들의 생활 실천에 대한 올바른 공적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는 동정녀들이 배우자를 찾지 못해서 또는 가난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였다고 거짓 이유를 들어 심문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포장은 다시 자매의 고귀한 동정생활을 파괴하려는 계책으로 포졸들을 시켜 그들의 옷을 벗겨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매를 때리게 하였고, 남자 죄수들의 감방에 들여보내어 욕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전하여 내려오는 교회 증언에 의하면 어느 자매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억센 남자들의 힘을 이틀 동안 견디어내어 순결을 보존할 수 있었고 결국 무사히 하느님께 바친 동정을 간직한 채 옷을 받아 입고 여자 감방으로 돌아왔다.
1839년 5월 9일에 김 효임과 김 효주는 다른 세 명의 신자와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다. 5월 12일에 자매는 형조판서에게 신문받기 위해 출두하였다. 판서는 우선 자매에게 천주교 신자가 되지 않더라도 전통적 유교의 윤리 실천을 충실하게 수행하면 덕을 닦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자와 맹자는 성인이 아니냐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 꼴룸바는 공자와 맹자는 세속의 성현이며 천주님을 공경해야 덕을 닦을 수 있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계속되면서 판서는 꼴룸바의 확고한 소신과 재치 있는 대답에 탄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초가 끝날 무렵에 꼴룸바는 동생과 함께 포도청에서 받은 수치스러운 고문을 판서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관장님들은 백성의 아버지이시니 제 마음속에 품은 것을 다 말씀드리겠읍니다. 포도청에서 포졸들이 여자의 옷을 벗겨 동여 매어달고 능욕하면서 때리고 불로 살을 무수히 태웠읍니다. 한 처녀가 양가의 자녀이거나 서민의 딸이거나를 막론하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국법에 따라 저희를 죽이신다면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겠으나 국법에 정해지지 않은 그러한 모욕을 당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이러한 하소연을 들은 형조판서는 크게 화를 내어 “도대체 누가 백옥같이 깨끗한 처녀들에게 그러한 더러운 짓을 감히 저질렀는가?” 라고 소리지르면서 이러한 치욕적인 고문에 대한 사실을 조사하여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명령하였다. 5월 16일에 판서는 포장과 포졸들을 잡아들여 엄하게 꾸짖고 매질을 하여 주모자 두 명은 귀양에 처하였다. 꼴룸바의 이러한 항의 덕분에 그 후로는 여신도들로 하여금 옷을 벗기는 치욕과 불로 살을 지지는 야만적 고문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김 꼴룸바와 아녜스 자매는 다섯달 동안 문초와 옥고에 시달리다가 동생인 아녜스는 다섯 명의 신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9월 3일에 24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며, 꼴룸바는 옥중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병들어 신음하다가 다른 여덟 명의 신자들과 함께 역시 서소문 밖에 위치한 형장에서 마침내 26세의 동정녀로서 기꺼이 참수형을 받고 하느님 대전으로 올라갔다.

동정 자매 김 효임과 김 효주
22.1.2 가정 환경
동정 자매 순교자의 가정 환경에 있어서 교회사 기록, 즉 「기해일기」,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은 일치하고 있지 않다. 「기해일기」는 김 꼴룸바의 가정에는 6남매가 있는데 그중에 남동생 김 안또니오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고, 달레는 김 안또니오에게 누이 두 사람 김 효임과 김 효주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다블뤼 주교는 김 안또니오는 동정을 서원한 세 누이를 부양하는데 김 꼴룸바와 김 아녜스가 체포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살펴볼 때에 각 인물들은 일치하고 있으나 다만 부수적 요소 즉 살던 장소와 나이 등에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이 문제가 해결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세 가지 기록에서 나타나는 김 안또니오를 동일 인물로 간주하여 동정 자매와 그 가족의 행적을 각 문헌에서 분석, 종합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김 효임(꼴룸바, 1814-1839)은 경기도 광주 지방의 구산에 있는 밤섬이라는 동네(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에서, 1814년에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동생인 효주는 1816년에 출생하였다. 이 자매의 어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 여섯 자녀(삼 형제와 세 자매)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경건한 신앙인으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은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온 동네가 천주교를 신봉하는 교우촌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장남인 안또니오(1794-1841)는 1834년에 중국인 유 방제(빠치피꼬) 신부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에, 좀더 자주 성사를 받으려는 마음에 한양으로 올라와, 처음에는 느리꼴이라는 동네에서 지내다가 후에는 성밖 동대문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이라는 동네에 살았다. 그는 자기 집에 기도와 전례를 거행할 수 있는 경당(공소)을 마련하여, 1836년에 입국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모방 나 신부를 한동안 모시고 있었다. 1839년 3월 21일에 김 안또니오는 두 남동생과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몇 달 후 다시 배교자의 밀고로 남동생들은 모두 관가에 잡혀갔고, 미리 눈치를 챈 그는 피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띠노(1798-1841)와 그의 동생은 혹독한 고문 중에도 천주교 진리를 용감하게 밝히는 신앙의 증거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기해대박해(1839)가 끝난 후에도 이들은 석방되지 못하였고 아우구스띠노는 순교의 영광을 받을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 1년 6개월동안 옥중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1841년 1우러 28일(음력)에 진실한 통회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 속에서 42세로 선종하였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피신했던 안또니오도 1839년 말에 배교자의 밀고로 1840년 1월 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형조에 끌려가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곤장을 받고 치도곤 30도를 맞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오히려 옥중의 죄수들도 안또니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중에서 두 명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841년 4월 28일에 안또니오는 법정에 다시 나아가 곤장 60도를 맞고 그 이튿날 밤(4월 29일)에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고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2.1.3 순교
김 효임과 김 효주(아녜스 : 1816-1839)는 동새인 글라라와 함께 경건한 신앙생활 속에서 하느님께 동정을 허원하고, 한양에 있는 큰오빠 안또니오의 집에 가서 몇 년 동안 살다가 박해를 맞게 됐다. 1839년 5월 3일에 포졸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에 안또니오는 밖에서 미리 알고 가족과 함께 피신할 수 있었으나 두 자매인 꼴룸바와 아녜스는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다. 꼴룸바는 자기와 동생에게 몹시 거칠게 대하는 포졸들에게 “당신들이 우리를 잡아가면 당신들을 따라가겠어요. 그러나 나라의 죄인에게 이다지도 귀찮게 굴어요!”라고 말하였다.
포도청에 압송된 자매는 배교하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끝내 신앙을 버리기를 거절하자 심한 고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포장은 연약한 자매를 몽둥이로 어깨, 팔꿈치, 무릎 등을 무수히 때렸고 다섯 차례에 걸쳐 두 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두 나무 막대기를 끼워 비트는 형벌을 가해 뼈가 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고통의 신음보다는 천상의 기쁨에 잠겨 있는 듯한 침묵 가운데, 기도하는 자세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모습에 화가 치민 포장은 더욱 참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는 두 자매에게 뾰족한 몽둥이로 찌르는 형벌을 주었지만 조금도 마음을 굽히지 않자, 은근한 말로 타일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더욱 견고할 뿐이었다. 특히 아녜스는 외딴 감방에 끌려가 학춤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받았다. 이 형벌은 죄수의 옷을 모두 벗기고 두 손을 뒤로 묶어 팔을 공중에 매달고 네 사람이 번갈아가며 매질을 하는 것으로서, 몇 분만 지나도 혀가 빠져나오고 거품이 고이고 얼굴빛은 검붉어져서 죄수를 내려놓아 쉬게 하지 않으면, 곧 죽어버릴 만큼 가혹한 고문이었다. 그러나 아녜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거듭된 이러한 체벌을 받으면서 온갖 욕설과 조롱 속에서도 자기의 모든 고통을 하느님께 바치면서 조용히 받아들였다.
이제 포장은 두 자매를 배교시킬 희망은 포기하고 오빠 안또니오의 거처와 교우들의 이름을 대라고 추궁하였다. 그러나 꼴룸바는 “만 번 죽어도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을뿐 아니라, 우리 오라버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교우들을 고발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자매는 감옥으로 끌려가 옷을 벗기우고, 모진 매를 맞았으며 또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열두 번이나 등을 지지는 형벌을 받았지만 역시 자매는 고통을 모르는 듯한 조용한 모습을 보일 뿐이었고, 4~5일이 지나니까 기운을 다시 차리고 덴 자리도 깨끗이 없어졌다.
포장은 다시 자매에게 결혼할 나이에 이르렀는데도 아직 혼자 사는 이유를 물었다. 이때에 비로소 꼴룸바는 심문관의 문초에 대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의 눈에는 동정생활이 더 완전한 상태로 간주되기 때문에 우리들은 천주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여 실천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대답은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인 동정녀들이 자기들의 생활 실천에 대한 올바른 공적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는 동정녀들이 배우자를 찾지 못해서 또는 가난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였다고 거짓 이유를 들어 심문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포장은 다시 자매의 고귀한 동정생활을 파괴하려는 계책으로 포졸들을 시켜 그들의 옷을 벗겨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매를 때리게 하였고, 남자 죄수들의 감방에 들여보내어 욕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전하여 내려오는 교회 증언에 의하면 어느 자매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억센 남자들의 힘을 이틀 동안 견디어내어 순결을 보존할 수 있었고 결국 무사히 하느님께 바친 동정을 간직한 채 옷을 받아 입고 여자 감방으로 돌아왔다.
1839년 5월 9일에 김 효임과 김 효주는 다른 세 명의 신자와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다. 5월 12일에 자매는 형조판서에게 신문받기 위해 출두하였다. 판서는 우선 자매에게 천주교 신자가 되지 않더라도 전통적 유교의 윤리 실천을 충실하게 수행하면 덕을 닦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자와 맹자는 성인이 아니냐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 꼴룸바는 공자와 맹자는 세속의 성현이며 천주님을 공경해야 덕을 닦을 수 있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계속되면서 판서는 꼴룸바의 확고한 소신과 재치 있는 대답에 탄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초가 끝날 무렵에 꼴룸바는 동생과 함께 포도청에서 받은 수치스러운 고문을 판서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관장님들은 백성의 아버지이시니 제 마음속에 품은 것을 다 말씀드리겠읍니다. 포도청에서 포졸들이 여자의 옷을 벗겨 동여 매어달고 능욕하면서 때리고 불로 살을 무수히 태웠읍니다. 한 처녀가 양가의 자녀이거나 서민의 딸이거나를 막론하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국법에 따라 저희를 죽이신다면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겠으나 국법에 정해지지 않은 그러한 모욕을 당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이러한 하소연을 들은 형조판서는 크게 화를 내어 “도대체 누가 백옥같이 깨끗한 처녀들에게 그러한 더러운 짓을 감히 저질렀는가?” 라고 소리지르면서 이러한 치욕적인 고문에 대한 사실을 조사하여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명령하였다. 5월 16일에 판서는 포장과 포졸들을 잡아들여 엄하게 꾸짖고 매질을 하여 주모자 두 명은 귀양에 처하였다. 꼴룸바의 이러한 항의 덕분에 그 후로는 여신도들로 하여금 옷을 벗기는 치욕과 불로 살을 지지는 야만적 고문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김 꼴룸바와 아녜스 자매는 다섯달 동안 문초와 옥고에 시달리다가 동생인 아녜스는 다섯 명의 신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9월 3일에 24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며, 꼴룸바는 옥중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병들어 신음하다가 다른 여덟 명의 신자들과 함께 역시 서소문 밖에 위치한 형장에서 마침내 26세의 동정녀로서 기꺼이 참수형을 받고 하느님 대전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