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영환과 김 제준
정 하상, 유 진길, 조 신철 등의 꾸준한 성직자 영입 운동의 결과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가 조선인 신부 양성을 위해 신학생으로 세 명의 지망자를 선발하였다. 경기도 과천 지방의 최 양업(토마스), 충청도 홍주 지방의 최 방제(프란치스꼬), 경기도 용인 지방의 김 대건(안드레아) 등이다. 세 명의 예비 신학생들은 1836년 12월, 중국으로 귀국하는 유 방제 신부를 따라 만주, 중국 본토를 거쳐 6개월 동안의 고된 여행 끝에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신학생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 방제 신학생은 오랜 기간의 여행과 외국 생활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와 향수에 지쳐 사망하고, 김 대건과 최 양업만이 성직자가 되어 본국에 입국하여 복음 전파에 헌신하여 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아들들을 하느님께 바친 열심한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 사회 관습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희생적 용기를 보여준 최 영환(프란치스꼬, 최 양업의 부친)과 김 제준(이냐시오, 김 대건의 부친)은 자기 아들들을 외국에 보냈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다.
23.1.2 최 영환(1806-1839)
충청도 홍주 다래골(다락골 또는 누곡,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25 누동)의 유복한 신자 가정의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최 영환(경환 또는 치운, 족보명은 최 영눌)은 어려서부터 교리서와 신심서(信心書)들을 정독하여 뛰어난 교리 지식을 터득하였고, 교회 규율을 준수하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18세의 이 성례(마리아)와 결혼하여 6형제를 두었는데 최 양업 신부는 그 장남이다.
신유대박해 이후로 이웃 외교인들의 눈총 때문에 자유롭게 신앙생활에 전념할 수 없자 이 교우 가정은 최 영환의 고집으로 3형제 가족이 한양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숨어서라도 마음놓고 신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네 외교인들의 간악한 술책에 휘말려 여러 차례에 걸친 소송에서 패소하여 재산을 거의 잃고 말았다. 이때에 최씨 3형제는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 행위를 거절하고 서로 의논하여 각자 헤어져 산골 교우촌으로 내려가 살기로 하였다. 그래서 최 영환은 가족들을 데리고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 지방을 거쳐서 경기도 과천의 수리산에 있는 교우촌에 정착하였다.
최 영환은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집안 식구와 함께 영적 독서, 그리고 기도와 묵상생활을 하면서 자녀들의 종교 교육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꾸밈이 없고 설득력이 강하여 듣는 이들의 마음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일으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먼데에서 찾아와 그의 강론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그의 영적 권유를 받아들였다.
또한 자기 집안이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최 영환은 곤궁한 이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실천하여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동네 교우들이 재난으로 피해를 입고 가난한 처지에 대해 실망과 원망의 소리를 낼 때에 그는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도록 충고하였다. 최 영환이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교회 활동에 헌신하고 있던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는 옥중 교우들과 가장을 잃고 가난에 허덕이는 아녀자들을 돕기 위해 모금하였으며 동네 교우들을 권면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기도 하였다.
1839년 7월 31일,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포교들이 최 영환의 집에 들이닥쳤다. 항상 순교를 염원하고 있는 그는 포교들을 친구를 대하듯이 식사를 대접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포교에게는 자기 옷을 내어주도록 아내에게 부탁하고 밖으로 나가 교우들에게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자고 격려하였다. 최 영환은 40여 명의 신자들을 인솔하고 마치 잔칫집에 가는 것처럼 기쁘게 떠났다. 무더운 여름 더위에 지친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하였다. “형제들 용기를 내십시오. 하느님의 천사가 손에 금(金)으로 된 자를 갖고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재면서 세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앞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아가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최 영환은 8월 1일부터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관장이 “천주교를 믿으려면 너나 믿지, 회장이랍시고 다른 이들을 미혹하여 사교(邪敎)에 떨어지게 하느냐?”라고 힐책하자, 최 영환은 그것은 자기 자신과 함께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최 영환은 순교할 때까지 두 달 동안 격일로 고문을 받아 태형 3백40대와 곤장 1백10대를 맞고, 살갗이 떨어져나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다. 그와 함께 갇혀 있던 흉악범이 조롱과 욕설을 퍼부으면서 아물려는 상처에 발길질을 하여 덧나게 하였지만, 최 영환은 온화한 모습으로 고통을 견디어냈다.
오히려 그의 괴로움은 수리산 교우들이 고문 때문에 배교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었다. 1839년 8월 5일에 최 영환은 장독(杖毒)으로 옥중에서 33세의 나이로 그가 갈망하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23.1.3 김 제준(196-1839)
충청도 솔뫼 지방(지금의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에 입교하여 대대로 신앙을 고백한 순교자 가정이 있었다. 이 신앙 깊은 가정에서 김 제준은 1797년에 김 택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유명한 충청도 사도인 이 존창(곤사가의 루도비꼬)의 조카딸이었으며 그의 입교를 계기로 온 가족이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특히 그의 조부 김 진후(비오)와 삼촌 김 한현(안드레아)은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였다. 김 진후는 신해박해(1791) 이후로 홍주, 전주, 공주 등지에서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는 고통을 받았다. 김 진후는 신해대박해중에 배교하여 4년 동안의 귀양 생활 후에 풀려났다. 곧이어 1805년에 그는 다시 체포되어 해미 감영의 감옥에 갇히어 지난날의 배교 행위를 뉘우치고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아 10년 동안 옥중에서 신자생활을 하다가 1815년 10월 20일에 선종하였다.
김 한현(김 종환 또는 김 계원)은 솔뫼의 김씨 가문 중에서 가장 굳은 신앙을 보여준 순교자였다. 그는 신유대박해 이후 경상도 안동 지방의 ‘우련밭’이라는 산촌으로 옮겨, 체포되기까지 17년 동안 숨어 지냈다. 그는 매일 기도, 영적 독서, 단식재 등으로 신심 생활을 하면서 교리서를 베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거나 교리를 강의하였다. 김 한현은 1815년의 을해박해 중에 체포되어 안동 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에 구금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옥중에서도 그는 신자들과 함께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지냈으며, 배교하는 교우들에게 회개를 권유하여 순교하도록 이끌었다. 김 한현은 1년 6개월 동안의 옥중 생활 끝에 1816년 11월 1일(음력)에 순교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 김 제준은 어려서부터 굳은 신앙심을 키웠다. 그는 고 우르술라와 결혼하여 김 대건을.낳아 신앙생활에 가장 열심했던 김 한현의 본명을 따라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시켰다. 그는 조부와 삼촌이 순교한 이후로 ‘천주학쟁이’라고 멸시받는 정신적 고통과 박해에서 벗어나 마음 편하게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서 1827년에 부친과 식구들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지방의 ‘골배마실’(지금의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하였다. 1836년 6월에 모방 신부가 사목 방문으로 ‘은이공소’에 와서 김 대건 소년을 장래의 신부로 간택하였을 때에도 김 제준은 순종과 기쁨의 자세로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신앙심을 보였다.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외국으로 나가게 되면 이러한 행위가 국법에 위배되어 가족에게 위험한 일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김 제준은 허락하였던 것이다.
1839년 6월(음력)에 ‘골배마실’ 천주교인들에 대한 색출이 시작되었을 때에 김 제준은 체포의 첫 대상이었다. 그는 자기 사위의 밀고로 배교자 김순성(김 여삼)이 이끌고 온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이때에 그는 힘이 센 장사여서 포졸들을 제치고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순순히 포승을 받았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하고 더구나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죄로 국사범으로 단죄되어 매우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고통에 못 이겨 배교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들을 국외다 내보낸 죄는 그대로 남아 8월 12일(음력)에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어 다시 이틀 동안 심문을 받았다. 김 제준은 옥중에서 교우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권유를 받았다. “당신은 석방되리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요. 당신은 의심 없이 사형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배교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판관에게 가서 용감하게 불신앙(不信仰)의 행위를 취소하고 순교자로서 선종하십시오.” 8월 15일(음력) 형조로 이송된 그는 판서에게 신앙을 다시 고백하고 이후로는 어떠한 형벌에도 굽히지 않아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밖 사형장에서 8월 19일에 참수되어 4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최 영환과 김 제준
정 하상, 유 진길, 조 신철 등의 꾸준한 성직자 영입 운동의 결과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가 조선인 신부 양성을 위해 신학생으로 세 명의 지망자를 선발하였다. 경기도 과천 지방의 최 양업(토마스), 충청도 홍주 지방의 최 방제(프란치스꼬), 경기도 용인 지방의 김 대건(안드레아) 등이다. 세 명의 예비 신학생들은 1836년 12월, 중국으로 귀국하는 유 방제 신부를 따라 만주, 중국 본토를 거쳐 6개월 동안의 고된 여행 끝에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신학생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 방제 신학생은 오랜 기간의 여행과 외국 생활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와 향수에 지쳐 사망하고, 김 대건과 최 양업만이 성직자가 되어 본국에 입국하여 복음 전파에 헌신하여 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아들들을 하느님께 바친 열심한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 사회 관습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희생적 용기를 보여준 최 영환(프란치스꼬, 최 양업의 부친)과 김 제준(이냐시오, 김 대건의 부친)은 자기 아들들을 외국에 보냈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다.
23.1.2 최 영환(1806-1839)
충청도 홍주 다래골(다락골 또는 누곡,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25 누동)의 유복한 신자 가정의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최 영환(경환 또는 치운, 족보명은 최 영눌)은 어려서부터 교리서와 신심서(信心書)들을 정독하여 뛰어난 교리 지식을 터득하였고, 교회 규율을 준수하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18세의 이 성례(마리아)와 결혼하여 6형제를 두었는데 최 양업 신부는 그 장남이다.
신유대박해 이후로 이웃 외교인들의 눈총 때문에 자유롭게 신앙생활에 전념할 수 없자 이 교우 가정은 최 영환의 고집으로 3형제 가족이 한양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숨어서라도 마음놓고 신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네 외교인들의 간악한 술책에 휘말려 여러 차례에 걸친 소송에서 패소하여 재산을 거의 잃고 말았다. 이때에 최씨 3형제는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 행위를 거절하고 서로 의논하여 각자 헤어져 산골 교우촌으로 내려가 살기로 하였다. 그래서 최 영환은 가족들을 데리고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 지방을 거쳐서 경기도 과천의 수리산에 있는 교우촌에 정착하였다.
최 영환은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집안 식구와 함께 영적 독서, 그리고 기도와 묵상생활을 하면서 자녀들의 종교 교육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꾸밈이 없고 설득력이 강하여 듣는 이들의 마음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일으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먼데에서 찾아와 그의 강론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그의 영적 권유를 받아들였다.
또한 자기 집안이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최 영환은 곤궁한 이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실천하여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동네 교우들이 재난으로 피해를 입고 가난한 처지에 대해 실망과 원망의 소리를 낼 때에 그는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도록 충고하였다. 최 영환이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교회 활동에 헌신하고 있던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는 옥중 교우들과 가장을 잃고 가난에 허덕이는 아녀자들을 돕기 위해 모금하였으며 동네 교우들을 권면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기도 하였다.
1839년 7월 31일,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포교들이 최 영환의 집에 들이닥쳤다. 항상 순교를 염원하고 있는 그는 포교들을 친구를 대하듯이 식사를 대접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포교에게는 자기 옷을 내어주도록 아내에게 부탁하고 밖으로 나가 교우들에게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자고 격려하였다. 최 영환은 40여 명의 신자들을 인솔하고 마치 잔칫집에 가는 것처럼 기쁘게 떠났다. 무더운 여름 더위에 지친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하였다. “형제들 용기를 내십시오. 하느님의 천사가 손에 금(金)으로 된 자를 갖고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재면서 세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앞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아가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최 영환은 8월 1일부터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관장이 “천주교를 믿으려면 너나 믿지, 회장이랍시고 다른 이들을 미혹하여 사교(邪敎)에 떨어지게 하느냐?”라고 힐책하자, 최 영환은 그것은 자기 자신과 함께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최 영환은 순교할 때까지 두 달 동안 격일로 고문을 받아 태형 3백40대와 곤장 1백10대를 맞고, 살갗이 떨어져나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다. 그와 함께 갇혀 있던 흉악범이 조롱과 욕설을 퍼부으면서 아물려는 상처에 발길질을 하여 덧나게 하였지만, 최 영환은 온화한 모습으로 고통을 견디어냈다.
오히려 그의 괴로움은 수리산 교우들이 고문 때문에 배교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었다. 1839년 8월 5일에 최 영환은 장독(杖毒)으로 옥중에서 33세의 나이로 그가 갈망하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23.1.3 김 제준(196-1839)
충청도 솔뫼 지방(지금의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에 입교하여 대대로 신앙을 고백한 순교자 가정이 있었다. 이 신앙 깊은 가정에서 김 제준은 1797년에 김 택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유명한 충청도 사도인 이 존창(곤사가의 루도비꼬)의 조카딸이었으며 그의 입교를 계기로 온 가족이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특히 그의 조부 김 진후(비오)와 삼촌 김 한현(안드레아)은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였다. 김 진후는 신해박해(1791) 이후로 홍주, 전주, 공주 등지에서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는 고통을 받았다. 김 진후는 신해대박해중에 배교하여 4년 동안의 귀양 생활 후에 풀려났다. 곧이어 1805년에 그는 다시 체포되어 해미 감영의 감옥에 갇히어 지난날의 배교 행위를 뉘우치고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아 10년 동안 옥중에서 신자생활을 하다가 1815년 10월 20일에 선종하였다.
김 한현(김 종환 또는 김 계원)은 솔뫼의 김씨 가문 중에서 가장 굳은 신앙을 보여준 순교자였다. 그는 신유대박해 이후 경상도 안동 지방의 ‘우련밭’이라는 산촌으로 옮겨, 체포되기까지 17년 동안 숨어 지냈다. 그는 매일 기도, 영적 독서, 단식재 등으로 신심 생활을 하면서 교리서를 베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거나 교리를 강의하였다. 김 한현은 1815년의 을해박해 중에 체포되어 안동 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에 구금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옥중에서도 그는 신자들과 함께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지냈으며, 배교하는 교우들에게 회개를 권유하여 순교하도록 이끌었다. 김 한현은 1년 6개월 동안의 옥중 생활 끝에 1816년 11월 1일(음력)에 순교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 김 제준은 어려서부터 굳은 신앙심을 키웠다. 그는 고 우르술라와 결혼하여 김 대건을.낳아 신앙생활에 가장 열심했던 김 한현의 본명을 따라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시켰다. 그는 조부와 삼촌이 순교한 이후로 ‘천주학쟁이’라고 멸시받는 정신적 고통과 박해에서 벗어나 마음 편하게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서 1827년에 부친과 식구들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지방의 ‘골배마실’(지금의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하였다. 1836년 6월에 모방 신부가 사목 방문으로 ‘은이공소’에 와서 김 대건 소년을 장래의 신부로 간택하였을 때에도 김 제준은 순종과 기쁨의 자세로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신앙심을 보였다.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외국으로 나가게 되면 이러한 행위가 국법에 위배되어 가족에게 위험한 일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김 제준은 허락하였던 것이다.
1839년 6월(음력)에 ‘골배마실’ 천주교인들에 대한 색출이 시작되었을 때에 김 제준은 체포의 첫 대상이었다. 그는 자기 사위의 밀고로 배교자 김순성(김 여삼)이 이끌고 온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이때에 그는 힘이 센 장사여서 포졸들을 제치고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순순히 포승을 받았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하고 더구나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죄로 국사범으로 단죄되어 매우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고통에 못 이겨 배교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들을 국외다 내보낸 죄는 그대로 남아 8월 12일(음력)에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어 다시 이틀 동안 심문을 받았다. 김 제준은 옥중에서 교우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권유를 받았다. “당신은 석방되리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요. 당신은 의심 없이 사형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배교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판관에게 가서 용감하게 불신앙(不信仰)의 행위를 취소하고 순교자로서 선종하십시오.” 8월 15일(음력) 형조로 이송된 그는 판서에게 신앙을 다시 고백하고 이후로는 어떠한 형벌에도 굽히지 않아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밖 사형장에서 8월 19일에 참수되어 4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