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순교자 다블뤼 주교

 

성(聖) 마리-니꼴라-앙뚜안 다블뤼(St. Marie-Antoine-Nicolas Daveluy. 1818-1866)


  박해 시대의 조선 선교사로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많은 업적을 낸 다블뤼 주교는 1818년 3월 16일에 프랑스 아미앵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때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블라몽 소신학교에 들어갔다가 1828년에 예수회 학교 폐쇄령으로 쌩리끼에 소신학교로 전학했다. 1834년 10월에 다블뤼는 빠리에서 2년 동안 철학 과정을 끝낸 후, 쌩 쉴삐스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였다. 1838년에 그는 예수회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입회를 신청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포기하였다.


  1841년 12월 18일에 다블뤼는 사제 서품을 받고 로아 본당에서 보좌 신부로서 사목 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생 시절부터 품었던 선교사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1843년 10월에 교구장의 허가를 받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유구(琉球)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를 떠나 1844년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부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에 지부장 리보아 신부는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의 선교사 요청으로 다블뤼 신부에게 조선의 선교사로서 주교와 동행하도록 지시하였다.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해에 도착하여 안내자로 와 있다가 사제 서품을 받은 김 대건 신부를 따라 8월 31일에 상해에서 출항하였다. 다블뤼 신부 일행은 10월 12일에 충청도  강경 지방의 황산포에 상륙하여 한양에 들어왓다. ‘안 돈이’(安敦伊)라고 불린 다블뤼 신부는 지방 교우촌에 내려가 조선어를 공부하면서 사목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는 교구장을 보필하여 산재되어 있는 공소를 순회하면서 성무를 집행하고 ‘로사리오회’, ‘성의회’(聖衣會), ‘성모 성심회’ 등의 신심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847년부터 중병에 걸려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렸다. 이 동안에 그는 신자들을 돌보지는 못하였으나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 설립에 주력하였다.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서거하고 3년 후에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여 1857년 3월 25일에 다블뤼 신부를 아꼰의 명예 주교로 축성하여 교구장 계승권이 있는 보좌주교로 임명하였다. 이후로 다블뤼 보좌주교는 주로 출판 사업에 종사하면서 충청도 내포 지방을 담당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개종자를 내었다.       1866년 3월 초에 베르뇌 주교의 순교로 다블뤼 보좌주교는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계승하였다. 그는 브르뜨니애르 신부로부터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고 오매뜨르 신부와 함께 위앵 신부를 그의 거처인 ‘거더리’(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피신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신부들을 각자의 관할 지방으로 보냈다. 그는 송(宋) 니꼴라오라는 회장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3월 11일에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다블뤼 주교는 다른 선교사들의 소재를 대라는 포졸들의 독촉을 받고 이제는 신부들의 피신 기회가 불가능하고 신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위앵 신부와 오매뜨르 신부에게 교우들을 통해서 자수를 지시하는 편지를 보냈다. 결국 이러한 지시로 주교의 순교길에 동행하겠다고 고집하던 황 석두(루까)를 제외하고 모든 교우들은 풀려났다. 다블뤼 주교의 일행은 한양 포도청에 압송된 후에 3월 19일에 각자 두 차례에 걸친 신문을 받고 의금부에 이송되지 않고 3월 23일에 군문효수의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다블뤼 주교는 사형 장소인 ‘갈매못’(지금의 충청남도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으로 가던 중에 포졸들이 시간을 끄는 것을 보고 재촉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날에 순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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