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전래

 

개신교의 전래


  개신교 선교사로서 처음 전교를 계획한 사람은 독일의 루터교 신자인 구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 1803-1851)였다. 그는 1826년에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派送) 선교사로서 시암(Siam : 지금의 태국)에서 활동하면서 시암어와 중국어로 성서를 번역 또는 개정하였다. 1832년에 구츨라프는 교역 개척을 위해 충청도 해안을 답사하던 영국의 ‘동인도 회사’ 소속 상선(商船)의 통역, 의삭, 선목(船牧)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 도서(島嶼) 지방의 주민들에게 성서를 나누어 주고 내륙 지방의 포교를 시도하다 돌아갔다.


  1865년에는 영국 회중 교회(會衆敎會 : Congregational Church)의 목사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 1840-1866)가 조선 천주교인의 배를 이용하여 황해도 해안 지방에 상륙하였다. 그는 2년 전부터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북경에서 조선 부연사 일행을 만나 조선 천주교의 수난 소식을 듣고 복음 전파의 뜻을 품게 되었다. 토마스는 상륙 이후 약 두달 동안 천주교인에게 조선어를 배우면서 주민들에게 성서를 나누어 주었고, 한양 선교를 위해 배를 타고 한강으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북경에 되돌아갔다. 1년 후인 1866년에 토마스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파송 선교사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에 승선하여 평양에 왔다가 선원들과 함께 조선 관헌들에게 피살되었다. 이로써 유럽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미국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1882년) 이후로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본격적인 조선 포교에 나섰다. 1884년 6월에 미국 북감리회(北監理會)의 목사인 매클래이(Robert S.Mclay)가 일시 방문하여 교육 활동과 의료 사업의 정부 인가를 얻고, 미국 선교회 본부의 조선 선교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같은해 9월에는 미국 북장로교(北長老敎) 외방 선교부 소속의 알렌(Horace Newton Allen : 1858-1932)이 입국하여 의료 활동을 통해서 전교의 길을 마련하였다. 1885년 4월 5일에 역시 미국 북장로교의 외방 선교부 파송 목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 1859-1916)가 제물포(인천)에 상륙하였다. 같은 해 5월 3일에 미국 북감리회의 의료 선교사인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 1856-1922)이 조선에 입국하였고, 6월 21일에는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상륙하였다가 일본에 간 같은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 1858-1902) 목사 부부가 입국하였다.


  이후로 많은 개신교 교파들이 조선에 진출하였다. 장로교 교단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1889년), 미국 남장로교(1892년), 캐나다 장로교(1893년) 등이 들어왔다. 이 교단은 1893년에 미국 남북 장로교 선교회로 연합 공의회를 창립하였고 1901년에는 미국 남북 장로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4교파와 조선 교회의 합동 공의회 즉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가 설치되었으며, 1907년 독자적인 교파 교회 즉 예수로 장로회 조선 노회(老會)가 조직되었다.


  한편 감리회로는 1897년에 미국 남감리회가 전래되었고, 1901년 5월에는 두 명의 조선인 목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들이 최초의 방인 개신교 목사였다. 또한 1903년에 한양, 인천, 평양 등의 3교구가 통합하여 ’선교부연회‘(宣敎部年會)를 구성하고 ’선교부 총회‘(1904년)로 승격된 후에 조선 감리교 총회로 자립하였다. 그외 1889년에는 캐나다의 침례교가 들어왔고, 1890년에는 영국 성공회가 진출하였다. 1904년에 안식교가 일본에서 전래되었고, 1907년에는 성결교회가 ’동양 선교회 복음 전도관‘을 설치하여 전도를 시작하였으며 1908년에 구세군이 영국 런던 만국 본영(萬國本營)에서 진출하였다.




38.1.2 개신교의 발전


  개신교 문헌에 의하면, 개신교 역사의 기원을 외국(중국-만주, 일본)에서 성서 번역에 종사한 서 상륜(徐相륜 : 1848-1926)과 이 수정(李樹廷 : 1842-1886)의 입교에 두고 있다. 서 상률은 1873년부터 상업 관계로 만주에 왕래하다가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의 선교사 매킨 타이어(John Mclntyre)와 로스(John Ross)를 만나 이들의 한글 성서 번역 작업에 참가하는 동시에, 1881년에는 세례를 받았다. 1882년에 「예수성교 누가 복음전서」와 「예수성교 요안의 복음전서」가 간행되었다.


  그는 성서의 번역 및 인쇄 작업과 동시에 조선을 왕래하면서 동포에게 성서를 배루하고 읽기를 권유하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1884년에는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 정착하여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웠다. 한편 이 수정은 1882년에 수신사(修信使) 박영호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개신교 신자인 쯔다센과 친분을 맺고, 한역 성서를 받아 탐독한 후 1883년 4월에 세례를 받았다. 영세 후에 그는 일본 성서공회의 요청으로 1885년에 「신약 마가 젼복음셔 언해」를 간행하였다.


  조선 국내에서는 서구의 선교사들이 처음에 교육 사업과 의료 활동에 의한 간접 선교를 통해서 지식인, 신진 인사, 학생, 농민, 천민 등 사회의 모든 계층을 수용하였다. 장로교는 1886년에 조선인 첫 세례 교인을 탄생시켰고, 1년 후에 감리교단이 운영하는 배재학당의 학생이 영세하였다. 이후로 개신교는 천주교에 비해서 짧은 기간 안에 급속적인 성장을 보였다. 1888년부터 선교사들은 본격적인 순회 전도에 나서 그들이 입국한 지 20년이 되던 해인 1905년에 ‘새문안 교회’(장로교 : 1877년)와 ‘정동 교회’(감리교 : 1877년) 등 didr 390개소의 예배당과 3만7천4백7명의 신도(세례 교인 1만1천61명 포함)가 1910년에 이르러 1천1백57개소의 예배당과 14만4백70명의 신도(세례 교인 3만9천3백94명 포함)를 갖춘 교세로 확장하였다. 그리고 전교의 수단으로 경영하던 교육 기관은 ‘배제 학당’(감리교 : 1886년), ‘경신 학교’ 등 전국에 660여 개교가 설립되었고, ‘광혜원’(연세대학교 의료원의 전신 : 1885년)과 ‘보구여관’(普救女館 : 오늘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병원의 전신) 등 의료 시설(시약소와 병원)이 모든 주요 선교지구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개신교의 급증에는 체계적인 선교 정책의 수립이 있었다. 1890년에 선교사들은 교파 사이의 마찰을 피하고 전교하는 방법을 설정하기 위해서 중국 선교사 네비어스(John Nevius)를 초청하여 선교 방법의 원칙을 제공받았다. ‘네비어스 방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선교 방법은 자립 선교, 자립 행정, 자급 운영의 원칙과 성서 연구의 체계화, 교파 사이의 상호 협조와 잉ㄹ치 정신에 기초하였다. 장로교 교단은 원칙적으로 ‘네비어스 방법’을 받아들이고 선교 연합 기관을 조직하여 조선 실정에 맞는 선교방법을 채택하였다. 즉 근로 계급 선교 치중,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 교역자 교육, 성서 중심 생활, 자급 자족의 교회, 의료 활동에 의한 선교 등을 강조하였다. 감리교도 역시 ‘네비어스 방법’을 근거로 하여 선교 정책을 수립하였는데 탐색 순회 전도, 교육 사업의 치중, 여성 사업에 대한 관심 등을 내세우고 교세 확장에 전력하였다. 개신교는 이러한 선교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조선의 정치 및 문화적 개화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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