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독립 운동 ,민중 교육 활동

 

민족 독립 운동


  을사 보호 조약의 체결(1905년) 이후로 전개된 무력 항쟁의 의병 운동은 한일 합방(1910년)후 일제의 무단(武斷) 정치에 의해서 봉쇄되었다. 그리하여 민족 독립의 항일 운동은 비밀 결사에 의한 지하 운동으로 전환하여 ‘3․1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당시 교회의 지도자인 프랑스 주교들은 국제 정세에 따라 일제를 조선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였다. 또 정교(政敎) 분리의 원칙만을 고수하여 조선인의 민족적 독립 운동을 이해하지 못하여, 이를 정치 활동으로 규정하였으며 종교적 윤리 원칙을 내세워 항일 무력 투쟁을 살인 행위로 단죄하였다.


  이러한 교회 당국의 공식 입장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평신도를 중심으로 일제의 조선 침략자를 제거하거나 비밀 결사에 입단, 국외 독립군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거나 또는 항일 시위에 가담하였다.


  첫째로, 일제가 합방을 획책하고 있던 1909년에 안 중근(安重根 : 토마스, 1879-1910)은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규정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르빈’ 역에서 저격하였다. 안 토마스는 18세 때 황해도 신천(信川) 매화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 활동에 나섰다가, 1907년에 러시아령 해참위(海參威)에 가서 의병 참모 중장으로 독립 운동을 하던 중에 이러한 거사를 수행하였다. 그는 체포되기 직전에 십자 성호를 긋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당시에 뮈텔 주교는 이 의거(義擧)를 살인죄로 간주하여 유감을 표시하였지만 이는 안 중근 자신이 진술하였듯이 독립 전쟁 중에 야기된 정당 방위로 간주되고 있다. 안 중근은 감옥에서 순국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고, 그의 아들 베네딕도가 사제가 되도록 모친과 아내에게 부탁하였다.


  둘째로, 일제가 한일 합방 이후로 민족 운동가들의 항일 비밀 결사를 저지하기 위해 검거한 애국 지사들 중에 천주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11년에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최초로 항일 민족 운동가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안 중근의 종제인 안 명근(安明根 : 야고보)이 독립 투쟁을 위한 의병 기지로써 간도에 무관학교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국내에 들어와 안악의 원 행섭(元行燮 : 타대오) 집에 머무르면서 조선인 부호들을 찾아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어느 부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 모금 활동을 데라우씨(寺內正殺) 총독에 대한 암살 음모 사건으로 날조하여 김 구 등 애국 지사 160여 명을 검거하는 ‘안악 사건’을 일으켰다. 이때 안 명근과 원 행섭 이외에 천주교 신자로서 최 익형(崔益馨 : 로벨도)과 한 순직(韓淳稷)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셋째로 천주교는 교회 이름으로 ‘3․1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천주교 신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 시위 운동에 가담하였다.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 학생들은 3월 1일 저녁 기숙사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교외로 나와 군중과 합세하였다. 또한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 학생들도 3월 9일에 있을 시위 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독립 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으나, 사전에 학교 당국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경기도(안성, 강화, 광주, 수원), 황해도(해주, 장연, 은율), 경상도(대구) 등지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주동적 인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은율 본당 주임인 윤 예원(尹禮源 : 토마스, 1886-1969) 신부는 3․1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을 뿐 아니라 독립 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상해 임시 정부와 연락을 맺고 있었다.    




40.1.2 민중 교육 활동


  1920년에 이르러 민족 운동은 민중의 실력 양성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3․1 운동의 결과로서 민중이 민족 운동의 주체로 등장하게 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민중의 실력 배양을 위해 야학, 학원, 서당, 강습소 등의 국가 지원을 받지 않는 자생적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민중 교육 기관은 교육의 균등한 기회를 받지 못한 공장 근로자, 농민, 도시 빈민, 부녀자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민중 계몽 활동을 전개하면서 문맹 퇴치에 주력하였다. 천주교에서도 민중 교육 운동에 참가하여 문맹자, 빈민 아동, 부녀자들에 대한 무료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회의 문맹 퇴치 운동은 민중 교화 이외에 선교 활동 특히 문서 선교에도 필요하였다. 전국의 대부분 지방 본당과 공소는 야학, 강습소, 학원, 서당을 설립하여 민중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신자 배가 운동을 전개하였고, 교세 확장 결과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예를 들어 평양 지목구의 숙천(肅川) 천주교회는 처음에 공소였다. 그때 야학을 개설하여 아동들을 가르쳤고 결과적으로 야학생들과 그들의 친척, 주민들이 천주교에 입교함으로써 신자수가 증가하여 1931년에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야학 설립운동은 하나의 민중 교육으로서 민족적 시대 요청인 문맹 퇴치의 민중 계몽에 기원(起源)하여 발전하였다. 1936년에 교회 잡지인 「가톨릭 청년」(4월호)은 논설을 통해서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표어를 내세우며 야학이나 강습소를 세워 우리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아동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도록 요구하면서, 문맹 퇴치는 교회와 성직자의 사회에 대한 의무임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야학 설립 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부녀자의 문맹 퇴치와 계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여성 야학을 설립하였다. 물론 수녀회가 담당한 정규 여성 교육 기관으로 ‘계성 여학원’(1927년 개원) 등이 있었지만, 교회는 대부분의 지방 본당에서 야학을 통해서 부녀자의 문맹 퇴치 특히 농촌 여성의 계몽, 미취학(未就學) 여아들에 대한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천주교의 여성 야학은 한글과 산술 등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자수와 같은 여성 기술 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에 대표적 여성 야학으로서 대구의 ‘해성 여자 야학 강습회’(1920년 개원, 1932년에 ‘해성 여자 학원’으로 개칭)가 있었다. 또 황해도 장인본당에서 빈민 여아들을 위한 여성 야학을 개설하여 1936년에 40여 명의 첫 졸업생들을 배출하였으며 간도 지방의 훈춘(훈春) 본당과 대립자 본당에서도 가난하여 취학하지 못한 부녀자들을 위해 야학을 설립하였다.


  교회는 가난으로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한 아동들에게 무료로 교육을 실시하여 무지(無知)에서 구제하였다. 빈민 아동 교육을 위한 소규모 비정규 교육 기관을 운영하던 본당은 학교 유지에 필요한 자금의 부족과 학교를 발전시킬 유능한 교사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였지만 꾸준히 빈민 아동의 문맹 퇴치에 기여하였다. 천주교의 대표적 빈민 아동 교육 기관으로서 의주본당의 ‘해성 학원(1924년), 진남포본당의 ’성심 학원‘(1930년), 신의주본당의 ’성심 학교‘(1930년대), 마산(평안도 강서 지방)본당의 ’성 요셉 학원‘(1932년)과 ’안나 학교‘(1932년), 중화본당의 ’성심 학교‘, 평양 관후리본당의 ’성모 학원‘(1934년), 목포본당의 ’소화 학술 강습회‘(1936년대)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교회의 정규 학교에서 가난한 아동들은 무료 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이 글은 카테고리: 교회사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