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

 

進士


고려․조선시대 진사과(進士科;製述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958년(광종 9)에 과거제도를 처음으로 실시, 시(詩)․부(賦)․송(頌) 및 시무책(時務策)으로 진사를 뽑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때에 따라 시험 과목과 선발 인원이 일정하지 않았다. 진사는 생원과 마찬가지로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가 또는 왕실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실시하는 증광시(增廣試)의 소과에서 각각 100명이 배출되었다. 시험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는데, 한성시(漢城試)에서 200명, 지방의 향시(鄕試)에서 700명을 뽑아, 서울에서 2차시험인 복시를 보게 하여 100명을 뽑았다. 그뒤 경기의 향시를 폐지하고 한성시를 두 곳으로 나누어서 보게 하였다. 이렇게 복시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1438년(세종 20)부터는 그 합격증서로 백패(白牌)를 주었다. 이들은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문과에 응시,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고 참봉․훈도․오위장 등 종9품직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그 전과는 달리 진사의 사회적 존경도가 생원보다 높았고, 특히 후기에 과거가 권문세가의 농락을 받게 되자 지방의 과거 응시자들은 거의가 진사 합격에만 뜻을 두어 대과(大科)에 응시하지 않는 풍조가 생겼다. 한편 진사가 선비의 존칭으로 보편성을 띠자 생원도 진사 칭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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