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觀想 contemplatio, contemplation)

관상(觀想 contemplatio, contemplation)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본성에 참여하여 친밀한 친교를 누리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친교의 온전한 형태는 천국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을 통하여 이루어지나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직관능력의 씨앗을 받게 됩니다. 관상은 그 씨앗을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싹트게 하여 꽃피우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교회내 많은 성인들이 영성생활의 일치의 단계에 도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이를 실천하였습니다.

 

관상은 염경기도나 일반적 묵상기도와 달리 단순 본질의 직관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본질적인 것의 터득에서 오는 것이므로 직관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의 친교가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일치로 발전한 나머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특별히 긴밀한 양식으로 내재하는 하느님을 본질적으로 바라보고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친교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언어와 개념과 이미지 등에 매개수단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친교가 깊어지고 하느님이 사람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에 따라 그러한 매체가 불필요해지며 마침내 하느님의 영()이 사람 안에 직접 내재하여 활동하실 때에는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상상은 하느님과의 \’침묵의 일치\’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기에 이릅니다. 더우기 인간의 언어와 개념 등은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계시하고 활동하시려는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릅니다. 관상은 이러한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상자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침묵시키고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합니다. 이처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밀한 친교를 체험하는 가운데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존재가 본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내 삶의 주체요, 내 삶의 내용이며, 내 생명의 원리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관상은 이에 도달하는 양식에 따라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관상으로 나누어집니다. 전자는 개인의 노력으로써 직관의 능력에 도달하는 것으로 능동적\’관상이라고도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생각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적(神的) 영역을 체험하고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합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성령의 이끄심과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체험하는 경우가 이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염경기도(구송기도)와 묵상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바탕이 될 때,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서 깊이 있게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 안에서 함께 할 때, 성령께서는 당신이 이끌고 싶은 대로 나를 기도의 깊이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성인들은 모두 염경기도와 묵상기도를 하였지만 모두 관상가는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상은 완덕에 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완덕 자체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완덕에 부르시는 하느님께서는 일반 신자들의 일상생활이나 활동수도회의 활동생활 가운데 관상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집중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겸손하고 관대하게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상의 본질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의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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