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전통 안에서 자라난 성모 신심 약사(略史)

 

교회 전통 안에서 자라난 성모 신심 약사(略史)








Ⅰ. 글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며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인데, 이 교의를 믿고 받아들인 신앙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어 믿어 왔는가를 관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인들의 ‘느낌과 이해’(sensus fidelium : 신앙 감각)가 일치되어 역사를 통하여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마리아 신심이다. 마리아 신심은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을 결코 감소시키지 않으면서도 교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그리스동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본 소고에서는 마리아 신심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간단하게 밝히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창립되는 성령 강림일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러 신도들과 함께하신 성모님은 초대 교회와 중세기를 거쳐 오늘날 동방 정교회와 우리 교회 안에서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며, 마리아 교회라는 말을 들을 만큼 성모 신심은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구나 요즈음은 일부 신앙인들 사이에서 파티마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메주고리를 순례하거나 다른 성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신자들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런 frht을 우리 신자들과 함께 다녀온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교회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다. 또한 놀라운 일은 영국, 미국, 독일 등지에서 성모님을 연구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이 있다는 보도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가톨릭 내에서는 성모님의 발현이나 그런 신심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신학자들도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 성모님이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걸림돌이 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목」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다루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엑 하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로마 시내에는 지하 무덤(카타콤바)들이 많다. 그중에 프리쉴라(Priscilla)라는 지하 무덤이 있는데 그곳에 가 보면 아름다운 벽화를 여러 개 볼 수 있다. 그 그림들은 로마 대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에서 생활하면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그려놓은 것들인데 그중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성이 한 분 있다. 그 밑이나 옆에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라고 써두지는 않았으나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 그림을 성모님이라고 단정한다. 그 벽화는 초대 교회 당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성모님을 중요한 분으로 모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하는 기도문이자 40대 이상 되는 사제들이 신학교 생활을 할 때 하루에도 수없이 바치던 기도문 중에 “천주의 성모여”(Sub Tuum)라는 기도문이 있다.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갈 때나 수업이 끝날 때도 늘 이 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뭉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에서 발굴된 파피루스에서 이 기도문이 나왔는데 화학 처리를 해보닌 기원후 3세기의 것이라고 판명되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헌상의 근거가 없으므로 성모 신심이 전체 교회적이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그럴 수도 있지만) 초대 교회부터, 특히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들 사이에서 이 신심이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Ⅱ. 중세기 교회 안에서 드러난 성모 신심




1. 교부들의 사상에서 드러난 마리아 신심과 마리아 공경




  뉴먼 추기경(J. H. Newman, †1890년)이 말한 것처럼 마리아에 관한 가장 고전적이자 오래된 가르침은 마리아께서 새로운 하와나 두 번째 하와라는 칭호이다. 이 사상은 2세기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내려온 가르침이다. 이 사상은 사도 교부 시대와 연관성이 많으나, 특히 이레네오(Irenaeus, †193년 이후), 유스티노(Justinus, †165년경),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220년 이후)가 여기에 관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레네오의 사상을 간단히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레네오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훌륭한 가르침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재순환(recirculatio)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원초적인 악이 순환하여 반대 방향으로 드러났음을 이렇게 주장하였다. “하와의 불순종의 매듭은 마리아의 순종에 으해 풀렸다. 왜냐하면 하오가 불순종으로 묶어놓았던 것을 마리아는 신앙으로 풀어버렸기 때문이다.”1) 그는 이 사상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동졍녀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함으로써 순종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하와는 순종하지 않았다. 하와는 동정녀였지만 순종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담과 혼인했어도 여전히 동정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순종하지 않아 자신과 전인류에게 죽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미리 정해진 남편이 있었어도 동정녀였으며 순종하여 자신과 전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원인이 되신 것이다.2)




  그 다음으로 성모님을 전례적으로 공경했다는 첫 번째 증거는 동방교회에서 드러난다. 이 사상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교부는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444년)이며 그의 영향을 받은 에페소공의회(431년)는 그리스도론 중심의 교의를 발표한 후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칭호를 마리아께 드렸다. 치릴로 주교는 공의회가 끝난 뒤 마리아에 관한 위대한 강론을 하였다. 그 강론에서 그는 사도 성 바오로의 사상을 도입하여 중개자(Mesites, Mediator)란 용어를 여성형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마리아님, 당신을 통하여”란 문구를 사용하여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마리아를 통하여 받는다고 보았다. 이 중개자란 개념은 4세기 동방교회의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며 여러 세기 후에 서방에 전달되었다. 이 교설은 11세기 로마와 단절된 후에도 동방교회 안에서는 지속적으로 고수되었으며 14세기 니케아의 테오파네스(Theophanes, †1381년)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전파되었다.


  중세기의 신심을 명확하게 특징짓기란 쉽지 않으나 몇 가지 점을 강조한다면 우선 그 당시 신심은 공동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단체로 기도하는 미사와 성무일도가 강조되었다. 무엇보다도 감사의 희생제에 참여하는 것을 우선적인 것으로 여긴 시대였다. 그리하여 미사가 자주 거행되었고 매일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는 규정이 점차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성무일도를 cursus horae(시간 과정), opus Dei(하느님의 일), officium(본분), ordo ecclesiasticus(교회의 질서)라고 불렀으며 성무일도가 오늘날과 같이 거의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 시대의 신심은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와 성인들의 aneuja과 유해 그리고 특별히 하느님의 어머니께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댜ㅏ. 성 일데폰소(St. Ildephonsus)와 그의 모방자들은 유식한 글들과 강론을 토해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였고 내용은 모두 성모님께 대한 신심과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있다.


  6세기 말경 포외티에(Poietiers)의 베난시우스 포르투나투스(Venantius Fortunatus)는 십자가늘 공경하여 그 유명한 “성체 찬가”(Pange Lingua)와 “왕의 깃발”(Vexilla Regis),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여 “땅 하늘 바다가 구세주를”(Quem terra pontus aethera)과 “바다의 별”(Ave maris stella)이라는 찬미가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세 찬미가는 세월이 지난 후에 보편교회의 전례 안에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복되신 동졍녀는 생각보다는 그 시대의 신심에 있어서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동방 교회의 전통이 마리아에 대한 신심에 영향을 끼쳤다. 일데폰소와 존자(尊者) 베다(Beda Venerabilis)가 한 마리아에 관한 강론들이 재복사되었고, 암브로시오 아우트페르트(Ambrosius Autpert)와 다른 많은 익명의 문필가들은 새로운 강론들을 썼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토요일마다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여 봉헌하는 신심 미사(missa votiva)의 관습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기이한 공로의 기도”(Oratio singularis meriti)가 널리 전파되었으며 성모 마리아께 대한 기도가 여러 모음집에서 발견되었는데 특히 요한 구알베르(Gualbert)의 기도서하고 불리는 노난툴루스(Nonantulus)의 기도서는 반복(replica)하는 기도의 특징이 있다. 마리아의 교리에 관해서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동정성과 승천에 관한 질문에 방향을 잡았다. 라트람누스(Ratramnus)는 마리아께서 구세주를 낳으시기 전에 이미 동정이었다고 주장하였고 파스키시우스 랏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어떤 의미에서 동정이었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또한 「거룩한 마리아의 출생 역사」(Historia de ortu sanctae Mariae)를 썼으나 마리아에 대한 그의 최고의 업적은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성 예로니모의 작품으로 전해져 왔은며 오늘날까지도 성무일도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신학적인 진술만이 아니라 다분히 신심적이어서 이 작품을 읽는 곳에서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 당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논문과 강론, 교리와 신심이 함께 융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3)


  전례적으로 가장 오래된 마리아 축일은 순교자들의 천상 탄일(dies natalis)과 상응한 마리아의 기념(memoria Mariae)이었다. 이는 새로운 하와인 마리아를 구세주의 모친이자 동정녀인 성모님이 이승의 삶을 하직하고 천상에 드셨음을 경축한 축일이었다. 여기에 강력한 영향을 준 인물은 다마스코의 요한(Joannes Demascenus, †750년경)이었다. 이 가르침이 9세기경 서방에 전파되었으나 마리아의 육신이 하늘로 옮겨졌다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기 말경에는 마리아가 영육이 결합되어 하늘로 올려졌다는 믿음이 두루 퍼져있었다. 그리하여 강론과 성화 그리고 전례에도 그런 내용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축제(natale S. Mariae)는 예수 성탄(12월 26일 이나 1월 1일) 축일 전례의 일부가 되었다.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대림시기에 지내다가 6세기 중엽부터 3월 25일로 옮겨졌다. 마우리시우스(Mauritius, †602년) 황제는 주님의 모친 영면(永眠 : Dormitio, koimeisis)일을 8월 15일에 제정하여 제국 내에서 이를 지키게 하였다. 마리아의 탄신일(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 9월 8일)과 주의 봉헌 축일(2월 2일)은 6세기 후반기에 제정되었다. 부모의 영면일은 자녀들이, 위대한 인물들은 후대 사람들이 기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날을 정하여 경축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7세기에는 동방의 수도자들이 이 축일들을 서방에 도입하였다. 이상의 네 축일들은 그리스 출신 교황 세르지오 1세(†701년) 재위 중에 로마에서 축일로 지켜졌다. 그 외의 축일들로는 동방에서 8세기에 시작되어 서방에서 1372년에 제정된 마리아의 자헌(Presentatio Mariae) 축일과 동방에서 8세기에 시작되어 원죄없으신 잉태 대축일로 발전된 성녀 안나의 잉태 축일이 생겨났다. 로마 전례에는 6세기 이래 마리아를 기념하는 기도가 고유 성인 기도(communicantes) 안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교외 안에서 공식적으로 마리아께 대한 최대 공경의 표시이자 신심이 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서 마리아를 언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주의 기도 다음으로 우리 교회 안에서 중요한 기도문인 성모송의 기원이 이 시대에 엿보인다. 요즈음과 같이 완성된 성모송은 아니라도 가브리엘 대천사(루가 1,28)와 엘리사벳이 마리아께 인사하는 내요(루가 1,42)이 전례 안에 등장하였으며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16세기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2. 8세기부터 종교운동 사이에 드러난 마리아 공경




  초대 교회에서부터 7세기까지 마리아 신심의 특징은 하느님의 어머니(Mater Dei, theotokos)로서 성덕에 대한 존경심과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8세기부터는 방향이 전환되어 천상의 여왕, 영적 어머니 그리고 힘있는 전구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이때는 마리아의 전능하신 간구자 역할이 주도적으로 관심있는 주제로 떠올랐다. 동방이 위대한 강론가들이었던 성 소포리노(Sophorinus, †638년)와 이콘의 변호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제르마노(Germanus, †733년) 그리고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Andreas, †740년)는 영적 모성(母性)의 신학을 전개시켰다. 카롤링거 시대가 몰락한 후 신앙생활이 수도원 주위로 집중되자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마리아의 기도문들과 강론들이 이어졌고(대표적인 인물: 클뤼니의 오도, †942년), 10세기 후반기에 라이흐나우(Reichnau)는 그리스 말로 된 마리아의 영면에 관한 강론 9개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중세기 중엽의 마리아 신심은 성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신심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가 서로 통한다는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예수의 인성, 예를 들면 예수의 거룩한 이름과 수난, 성체 안에 현존하심 등에 대한 신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서방은 동방과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1세기는 마리아에 관한 문학 작품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많은 강론들과 기도문들이 나와 아름다운 성가로 불리기도 하였다.(대표적인 성가는 “여왕이시여”<Salve Regina>이다.). 그 외에도 성무일도와 미사 그리고 클뤼니의 오딜로(Odilo)와 마리노(Marinus)에 의해 주장된 ‘마리아의 종’이란 사상이 공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1072년)는 연옥에서 단련받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마리아에 관해서 글을 썼다. 이때 스카풀라(scapular)에 관한 신심이 일어났다.


  12세기의 교의적 경향은 신심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두 가지 큰 경향을 띠고 있었다. 첫 번째는 골고타 언덕에서 수난하신 아드님과 함께 당하신 마리아의 고통과 주님께서 특볋시 사랑하신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라고 하신 말씀을 마리아의 영적 모성에 적용시킨 신심이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두 번째는 마리아의 승천에 대한 가르침이 두루 퍼져있었으므로 마리아가 모든 신자들을 돌보신다는 신심이 강조되었다. 성 베르나르도(†1153)는 마리아의 신심을 전파하는데 힘썼으나 늘 전통안에 머물러있었다.


13세기에는 마리아를 찬미하는 가르침과 신심이 서로 얽혀있었다. 마리아를 공경하는 성전들이 생겨났고 위대한 성인들, 즉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226년)와 도미니코(†1221년)를 중심으로 수도회 안에서 마리아께 대한 특별한 신심이 일어났으며, 보나벤투라(†1275년), 대 알베르토(†1280년), 토마스 데 아퀴노(†1274년)와 둔스 스코투스(†1280년) 등은 마리아에 대한 신학 작품들을 남겼다. 또한 이 시대에는 성모 호칭 기도가 널리 사용되었다. 청원 형태의 후렴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는 아일랜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7-8세기 초에 전 유럽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런 호칭 기도는 모든 성인들과 특히 성모 마리아에게 사용되었으며 모든 성인들 중에서 마리아가 제일 앞에 나와있다. 이 성모 호칭 기도가 12세기 중엽에 유래되었다고 하나 16세기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최종적으로 승인되었다. 이 기도문은 이탈리아인들의 오래된 성지인 로레토(Loretto)의 이름을 따 “로레토의 성모 호칭 기도”라고도 한다. “성 마리아님”으로 시작하여 “평화의 모후”까지 모두 49개의 호칭이 있는데, 그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동방교회에서 오랜 전통 속에 사용되어 오던 “아카티스토스”(Akathistos)에서 유래된 듯하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마리아 신학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다.






Ⅲ. 16세기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갈라져 나간 형제들에게 마리아 신심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루터와 칼빈은 마리아 공경을 전체적으로 거부하지 않았으나 그 신심을 제한햐여 겸손하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추종자들은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부정하였으므로 자연적으로 성인들의 전구나 마리아에 관한 칭호들, 즉 천상의 여왕, 영적 모친 등과 같은 칭호는 유일한 중개자인신 그리스도의 품위를 훼손시키며 하느님께 모독이 된다고 주장하여 성모 신심을 그들의 공동체에서 제거해 버렸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공의회를 통해 성모 신심을 옹호하고 마리아를 통한 전구의 기도를 강조하였다. 특히 반개혁운동(counter-reformation)을 일으킨 사람들에 의하여 성모 신심은 지탱되고 확산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베드로 가니시오(Canisius, †1597년)와 로베르코 벨라르미노(Bellarmino, †1619년) 그리고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1622년)을 들 수 있다. 그들은 호교론적인 작품과 강론 등으로 마리아 신심을 옹호하고 전파하였다.


  17세기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마리아 신심이 꽃피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께서 구세주의 협력자로 등장하여 보편적인 전구자로 공경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베륄르의 베드로(Pierre de Berulle, †1629년)추기경, 몽포르의 루도비코(Louis Marie Grignon de Monfort, †1716년)와 유명한 예수외 신학자 살라자르의 퀴리노(Quirino de Salazar, †1646년) 등이 있다. 특히 베륄르의 베드로 추기경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신비에서 마리아를 강조하였으며 신학교와 생쉴프스(Saint-Sulpice)를 창립한 올리에(Jean Jacques Olier, †1657년) 신부는 특히 사제직을 준비하는 신학생들에게 내적 생활을 강조하면서 마리아 신심을 고취시켰다.


  19세기 마리아 신심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생긴 많은 수도회를 통하여 일어났다. 특히 이들은 사도직 활동에 마리아 신심을 강조하였다. 이때 생겨난 수도회들로는 마리아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봉헌회, 글라라회, 마리스타회 등이 있다. 또한 여러 차례의 성모 발현(1858년 프랑스의 루르드와 1846년 라 살렛트, 1879년 아일랜드의 노크 등)을 통해 많은 순례자들이 그곳을 방문하여 마리아 신심이 크게 확장되었으며 메시지의 내용에 따라 극기와 보속과 기도 운동이 자연적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20세기 마리아 신심은 여러 요인들에 의하여 고취되었다. 이 시대의 교황들은 한결같이 마리아 신심을 전개시켰다. 비오 10세는 마리아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을 교의로 정의한 비오 9세와 로사리오 신심을 강조한 레오 13세의 뜻을 받들어 마리아의 모성을 강조하였다. 베네딕토 15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평화의 모후의 전구하심을 빌었고, 비오 11세는 에페소 기념일을 상기시켜 마리아를 구속의 성년(1933-1934년)과 연관을 지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마리아의 교의와 신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성모 승천을 정의하고(1950년), 온 세상을 마리아의 성심에 봉헌하였으며(1942년) 예수 성심 신심과 신비체 교리의 설며에서 마리아 신심을 강조하였다. 그 외에도 마리아의 해를 선포하였으며(1945년), 여왕이신 마리아의 축일을 제정하였다. 이때는 마리아 신심운동이나 여러 종류의 신심활동이 일어났다. 원죄없으신 마리아 군대, 레지오 마리애 등과 같은 신심이 일어났고 국제 마리아 확회도 생겨났으며 마리아와 관련된 성지 순례가 권장되었다.


  20세기 마리아 신심의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적인 불안정과 전재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대회가 국제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또는 지방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와 교부학의 연구는 마리아-교회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그 결과로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과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에 영향을 미쳤다.






Ⅳ.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이후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8장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를 다루었다. 즉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계획안에서 마리아의 역활을 강조한 교회는 전통적으로 마리아께 대한 칭호들, 즉 새로운 하와, 시온의 딸,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어미니, 하느님의 어머니, 신자 생활의 모범, 천상천하의 모후(母后)로 개선하신 분, 평생 동정녀, 변호자, 협조자, 보조자, 중재자, 완덕의 모범으로 부르면서도 “유일한 중재이신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을 조금도 감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라고 가르친다. 또한 마리아 공경을 권장할 뿐 아니라 하느님께만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별한 공경을 마리아께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전제한 후 성모 공경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교회는 천상에서도 마리아의 모성이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인류를 위한 전구자이신 마리아의 역할도 재확인하며 영육이 결합되어 영광을 누리시는 마리아의 모습은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신 것처럼 ……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시”가 되시는 분으로 제시하면서 마리아가 교회의 모습이자 표상이며 모델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공의회가 끝난 후 마리아 공경은 폭풍우 후의 정적처럼 식어지기 시작하다가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력과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시성 및 스테파노 곱비 신부의 활동과 공인도지 않은 1천 군데 이상의 성모 발현 사건 등으로 마리아 신심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고 하겠다.




Ⅴ. 맺는 말




  이상으로 간단하게 마리아 신심이 발전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았다. 신앙과 윤리에 대해 올바른 가르침을 펴는 교회가 전통 안에서 가르쳐온 신앙의 유산을 받아들인 신앙인들은 모두 성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해 왔으며, 특히 신앙의 모범을 보인 성인들 중에서 마리아 신심이 뛰어나지 않은 분은 하나도 없다. 달리 표현한다면, 모든 성인은 마리아 신심에 뛰어난 분들이다. 우리가 완덕의 모범을 보인 성인들을 본받아야 한다면 성인들이 보여준 마리아 신심을 잘 배우고 익히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의 핵심이긴 하나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교회 전통과 성인들의 삶이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올바로 이해한다면,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을 결코 감소시키지 않을 것이다.”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받아들여 순종하였으며 완전한 신앙인의 모범을 보인 거룩한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완덕의 모범이시다. 이는 마리아가 교회의 모습이자 표상이며 유형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인 동시에 우리가 모범으로 삼고 살아야 할 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특히 근대 이후 마리아를 심부름꾼으로 삼아 이 세상에 필요한 당신의 뜻을 알리신다는 점이다.  루르드, 파티마, 바뇌 등 교회로부터 공인된 여러 발현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왜 하필 마리아인가? 마리아 외엔 다른 방법이 없는가? 본인은 개인적으로 이 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2천년 전 수많은 이스라엘 여인들 중에서 유독 마리아를 특별히 간택하사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하느님은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 시대에 필요하고 유익한 당신의 뜻을 전하시지 않는가?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뜻을 알 길은 없으나 마리아를 통하여 이런 일을 하시는 그분의 섭리를 기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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