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아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신경의 앞 부분, 즉 우리의 믿음이 무엇이며, 그 대상이 어떠한 분이신지 살펴보았다.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대되신 분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사도신경을 외면서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셨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이 십자가상의 죽음을 치욕적인 죽음으로 말하지 않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영광스런 도구로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1. 사도신경 안에서의 위치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아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라는 구절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님이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사도신경은 이 말을 고백함으로써 예수의 인간성을 부인하고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의 가현설이나 예수의 인간성을 약화시키고 은폐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님은 참 인간이시고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고난, 죽음, 시체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며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에 의해 강조된다. 즉 하느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과 함께 하시길 원하시고 급기야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히브 1, 1-2 참조). 인간이 되신 그분을 통하여 인간들은 하느님을 알 수 있으며, 그 하느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인간과 함께 생활하시는 분으로,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 안에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을 의미하는 핵심적인 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1)




2. 각 구절의 이해




2.1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는 로마의 다섯 째 유다 총독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그의 직무 수행에 대해 “뇌물, 폭력, 약탈, 불법, 무례, 재판없는 사형집행, 계속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잔학”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도하고 있다(legatio ad Gaium 302).


그는 황제의 상과 로마의 독수리를 수놓은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절을 하게 했는데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항거를 하자 군기를 철수했다. 그는 또한 절기 때마다 2-3백만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물이 모자라자, 성전금고의 돈을 사용하여 예루살렘 수로공사를 하였다. 유대인들이 의회에 모여 이를 비난하자 이들을 모두 학살하였다고 한다. 빌라도는 35년 가리짐 산에 묻혔다는 모세의 금그릇을 찾으려 모여든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하면서 생긴 학살로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 의해 로마 황제에게 소환되었다. 36년 가을 로마에서 옥에 갇혔다가 39년경 자살, 또는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2)


빌라도의 이러한 잔인한 지배자의 모습은 신약성서의 여러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루가 13, 1; 마르 15, 7 참조). 그러나 이런 잔인한 모습과는 달리 유약한 타협적인 관리의 모습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재판과정에 잘 나타나고 있다(요한 18, 31; 19, 6; 마르 15, 15). 따라서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의 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드러내면서 아무 잘못없이 정치적 야합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2,2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도신경은 이 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짜로 돌아가셨음을, 그분의 부활이 가사(假死)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라 참 인간으로서 완전히 죽음에 이르렀다가 부활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죽으시고” 다음에 “묻히셨음”을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처럼 장례풍습에 따라 무덤에 매장되셨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분의 완전한 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3. 십자가의 의미




3.1 십자가 형벌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의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십자가형은 스파르타쿠스(Spartakus)의 노예 해방전쟁의 실패에서 드러나듯이 먼저 노예들에게 적용되었으며 사형수를 차별하는 형벌이었다. 따라서 십자가 형벌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의미하고 로마시민권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금지되어 있었다. 3)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정치적 반란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십자가의 패(titulus crucis)에서 드러난다.




3.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원인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한스 큉(Hans Kȕng)은 “예수의 처신의 논리적 귀결”4)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성전에 대하여 최고의 자유를 행사하였고, 전래된 종교 질서를 문제삼고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을 선포하며 스스로 죄사함을 선언함으로써 참으로 전대미문의 권한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에 유대 최고 책임자들은 그들의 전통적 율법, 성전 중심의 종교의 관점에서 모세를 거스르는 이단 설교자, 모세의 전통에서 벗어난 거짓 예언자, 죄에 관련하여서 하느님의 자리를 자임하는 신성 모독자,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며 불안을 조성하는 혹세 무민자라고 단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5)


예수님의 죄목은 최고회의에서의 재판에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마르 14, 53-65).


“유대인의 왕”이라는 메시아의 문제와 성전을 헐어버리겠다는 성전정화(마르 11, 15-18 참조)의 문제이다. 이는 정치적·종교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특히 유대 사회는 정교분리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종교적인 문제가 곧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위의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죄가 인정된다면 사형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정치적인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 명패에서 드러나듯이 정치적인 죽음과 연관이 된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 귀결로서 당시 사회의 최고 권력 층인 두 지배 계급에 의해 숙청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원인이 간접적으로는 정치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것이다.6)




3.3 십자가 신학


“실상 나도 전해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1고린 15, 3-4)의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죽음”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성체성사의 설정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1고린 11, 24),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 24), 또한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에서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왔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 주러 온 것이다”(마르 10, 45)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듯이 십자가상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속죄의 죽음이었고 속량의 희생제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죄와 보속(혹은 속죄행위)라는 일반적 도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사랑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상 희생제사는 인간의 죄에 분노하신 하느님께 속죄하는 의미에서 인간이 드리는 어떤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의 표현이다. 철저히 자신을 내어주는 그러한 사랑인 것이다. 7)


사랑에 의한 희생적 죽음(십자가상 죽음)은 단순히 고통과 치욕일 수 없다.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 34; 마태 27, 46)라는 절망적인 외침은 단순히 인내 속에 참아 받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의 외침이다.8) 다시 말해서 이는 하나의 단말마의 절망에 찬 외침이 아니라 하느님 다스림의 도래를 희망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는 종말론적 시련을 포함하며 이는 극단적인 죽음까지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상의 죽음은 그분의 삶의 결과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총괄이며 요약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무력(無力) 가운데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버림받은 가운데에 사랑이, 공허 가운데에 충만이. 그리고 죽음 가운데에 생명이 실현된 하느님의 종말론적 다스림인 것이다. 9)




결론-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우리는 예수님을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참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십자가라는 비참한 죽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십자가라는 비참한 죽음이 필연적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고통이 따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고통,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3.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마르 8, 34; 루가 9, 23)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지고가야 할 십자가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 글은 카테고리: 가톨릭교리자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아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신경의 앞 부분, 즉 우리의 믿음이 무엇이며, 그 대상이 어떠한 분이신지 살펴보았다.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대되신 분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사도신경을 외면서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셨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이 십자가상의 죽음을 치욕적인 죽음으로 말하지 않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영광스런 도구로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1. 사도신경 안에서의 위치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아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라는 구절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님이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사도신경은 이 말을 고백함으로써 예수의 인간성을 부인하고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의 가현설이나 예수의 인간성을 약화시키고 은폐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님은 참 인간이시고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고난, 죽음, 시체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며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에 의해 강조된다. 즉 하느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과 함께 하시길 원하시고 급기야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히브 1, 1-2 참조). 인간이 되신 그분을 통하여 인간들은 하느님을 알 수 있으며, 그 하느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인간과 함께 생활하시는 분으로,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 안에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을 의미하는 핵심적인 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1)


    2. 각 구절의 이해


    2.1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는 로마의 다섯 째 유다 총독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그의 직무 수행에 대해 “뇌물, 폭력, 약탈, 불법, 무례, 재판없는 사형집행, 계속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잔학”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도하고 있다(legatio ad Gaium 302).

    그는 황제의 상과 로마의 독수리를 수놓은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절을 하게 했는데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항거를 하자 군기를 철수했다. 그는 또한 절기 때마다 2-3백만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물이 모자라자, 성전금고의 돈을 사용하여 예루살렘 수로공사를 하였다. 유대인들이 의회에 모여 이를 비난하자 이들을 모두 학살하였다고 한다. 빌라도는 35년 가리짐 산에 묻혔다는 모세의 금그릇을 찾으려 모여든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하면서 생긴 학살로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 의해 로마 황제에게 소환되었다. 36년 가을 로마에서 옥에 갇혔다가 39년경 자살, 또는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2)

    빌라도의 이러한 잔인한 지배자의 모습은 신약성서의 여러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루가 13, 1; 마르 15, 7 참조). 그러나 이런 잔인한 모습과는 달리 유약한 타협적인 관리의 모습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재판과정에 잘 나타나고 있다(요한 18, 31; 19, 6; 마르 15, 15). 따라서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의 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드러내면서 아무 잘못없이 정치적 야합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2,2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도신경은 이 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짜로 돌아가셨음을, 그분의 부활이 가사(假死)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라 참 인간으로서 완전히 죽음에 이르렀다가 부활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죽으시고” 다음에 “묻히셨음”을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처럼 장례풍습에 따라 무덤에 매장되셨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분의 완전한 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3. 십자가의 의미


    3.1 십자가 형벌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의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십자가형은 스파르타쿠스(Spartakus)의 노예 해방전쟁의 실패에서 드러나듯이 먼저 노예들에게 적용되었으며 사형수를 차별하는 형벌이었다. 따라서 십자가 형벌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의미하고 로마시민권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금지되어 있었다. 3)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정치적 반란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십자가의 패(titulus crucis)에서 드러난다.


    3.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원인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한스 큉(Hans Kȕng)은 “예수의 처신의 논리적 귀결”4)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성전에 대하여 최고의 자유를 행사하였고, 전래된 종교 질서를 문제삼고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을 선포하며 스스로 죄사함을 선언함으로써 참으로 전대미문의 권한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에 유대 최고 책임자들은 그들의 전통적 율법, 성전 중심의 종교의 관점에서 모세를 거스르는 이단 설교자, 모세의 전통에서 벗어난 거짓 예언자, 죄에 관련하여서 하느님의 자리를 자임하는 신성 모독자,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며 불안을 조성하는 혹세 무민자라고 단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5)

    예수님의 죄목은 최고회의에서의 재판에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마르 14, 53-65).

    “유대인의 왕”이라는 메시아의 문제와 성전을 헐어버리겠다는 성전정화(마르 11, 15-18 참조)의 문제이다. 이는 정치적·종교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특히 유대 사회는 정교분리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종교적인 문제가 곧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위의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죄가 인정된다면 사형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정치적인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 명패에서 드러나듯이 정치적인 죽음과 연관이 된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 귀결로서 당시 사회의 최고 권력 층인 두 지배 계급에 의해 숙청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원인이 간접적으로는 정치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것이다.6)


    3.3 십자가 신학

    “실상 나도 전해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1고린 15, 3-4)의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죽음”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성체성사의 설정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1고린 11, 24),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 24), 또한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에서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왔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 주러 온 것이다”(마르 10, 45)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듯이 십자가상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속죄의 죽음이었고 속량의 희생제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죄와 보속(혹은 속죄행위)라는 일반적 도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사랑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상 희생제사는 인간의 죄에 분노하신 하느님께 속죄하는 의미에서 인간이 드리는 어떤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의 표현이다. 철저히 자신을 내어주는 그러한 사랑인 것이다. 7)

    사랑에 의한 희생적 죽음(십자가상 죽음)은 단순히 고통과 치욕일 수 없다.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 34; 마태 27, 46)라는 절망적인 외침은 단순히 인내 속에 참아 받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의 외침이다.8) 다시 말해서 이는 하나의 단말마의 절망에 찬 외침이 아니라 하느님 다스림의 도래를 희망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는 종말론적 시련을 포함하며 이는 극단적인 죽음까지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상의 죽음은 그분의 삶의 결과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총괄이며 요약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무력(無力) 가운데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버림받은 가운데에 사랑이, 공허 가운데에 충만이. 그리고 죽음 가운데에 생명이 실현된 하느님의 종말론적 다스림인 것이다. 9)


    결론-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우리는 예수님을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참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십자가라는 비참한 죽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십자가라는 비참한 죽음이 필연적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고통이 따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고통,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3.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마르 8, 34; 루가 9, 23)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지고가야 할 십자가는 무엇이 있습니까?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