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들어가는 말




죽음 앞에선 과연 인간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가? 죽은 이는 영영 사라져버렸는가? 인생의 사랑과 예지는 죽는 순간에 홀연 없어지고 마는가? 물론 한 인간의 영향은 죽은 다음에도 놀랄 만큼 강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창조적인 것은 착한 생활의 효과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람의 이름과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까지도 인류 안에 존속한다. 그러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1)


한편 종교의 영역을 대체하고 있는 여러 현존하는 신앙위기의 많은 형식들의 이면에는 신앙과 교회의 미래에 대한 절망이 자리잡고 있다. 합리화, 기계화되고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아주 일반적으로 종교에,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교에 아무런 미래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 신앙의 미래에 대한 회의는 신앙을 가장 가혹하게 의문에 처하는 처사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미래의 존재이기에 절대적 무미래성은 죽음의 본질이다. 그 때문에 미래없는 신앙이란  죽은 것이다. 아무도 미래없는 신앙에서 매력을 느낄 수 없을 것이며, 이러한 신앙을 위해서는 아무도 더이상 헌신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갖는 역사의 의미와 목표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의 의미와 목표와 종말에 관하여 비상(非常)하게 드러날 수 있겠는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즉 희망하는 인간으로서 성령의 종말론적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최종미래를 하느님에게서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부터 그 미래를 향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희망은 역사 밖에서 하느님이 성취하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이 목표는 이미 역사 안에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희망은 역사 저편의 최종미래를 목표로 삼지만 역사 안에서 그 미래를 선취하므로 역사에 투신해야 한다. 그것은 최종 미래를 미리 향유하게 해주는 능력, 힘일 뿐 아니라 과제이다.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미래에로 향해 나아가는 백성의 힘이기도 하다.3) 따라서 그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모습이 새로운 전망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몸 말




이 조항은 신경에 그 과정이 서술되고 있는 하느님 계획의 목표와 정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강력히 천명한 바 있거니와(1고린 15장 참조) 만일 부활이 없다면 신앙의 구조 전체가 무너져버린다. 만일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의 내용이 분명하지가 못하다면 복음에 들어있는 약속들은 물론, 창조와 구속의 의미는 사라지고 말며, 현세 생활마져 모든 희망을 잃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히브 11,1 참조).4)




1. 육신부활의 의미




1.1 전인으로서의 부활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소멸하는 육신이라는 요소와 불멸하는 영혼이라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히브리적인 사고에 따르면 인간이란 온전한 하나의 통합된 인격체이지, 결코 영혼과 육신으로 분리되는 반쪽과 반쪽이 결합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사상의 온상인 히브리적 사고에서 본다면 ‘육신의 부활’ 이니 ‘죽은 이들의 부활’은 다 같이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산 한 인격체 전체의 부활을 의미한다. 결국 ‘육신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 신앙은 한 인간의 구원과 관련되고 영원한 운명에 관련된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가치가 없는 악한 것으로 보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배척한다.5)


이렇게 단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견해를 견지할 때에 죽음은 극도로 처절한 최후로 생각되며 죽음의 극복 즉 모든 것을 포괄하는 완성에 대한 희망이 의미를 지닌다. 반면 영혼의 불멸 개념은 죽음도 희망도 진지하게 여길 수 없다.


따라서 ‘육신부활’은 영육으로 된 인간존재 전체가 하느님의 절대 미래에로 들어간다는 희망을 표명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육신’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며 피조물로서의 인간 전체를 표시한다. 육신은 나약성 안에서 하느님, 이웃, 자연(세계)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는 全人이다. 이렇듯 육신부활이란 인간 전체 즉 역사 안에서 인간이 행한 모든 것, 모든 유대와 더불어 하느님에 의해 인정받고 충만에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육신의 어느 것도 상실되지 않으며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최종 순간뿐 아니라 자기 역사 전체를 다시 찾음을 의미한다. 또한 동시에 全人과 상관되는 사건이므로 인간이 몸담았던 세상 및 역사와 관련하여 발생되는 최종 사건인 것이다. 즉 육신(몸)은 우주에 개방된 인간이므로 육신부활은 우주적인 사건이다.6)


따라서 교회의 부활신앙은 개인주의적 구원희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만인의 구원을 희망하는 연대적 신앙의 성격을 지닌다. 한 인간이 세계 안에서 생활하다가 죽고 난 후,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게 되는 것은 이 인간이 현세에서 맺은 모든 관계이다. 부활에서 그가 세계 안에서 맺었던 관계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은 다른 인간들과 세계 전체와 여전히 유대되어 머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 자체가 바로 세계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죽음 속에서의 인격체의 부활을 통해서 세계 자체가 완성의 상태에로 부분적으로나마 도달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육신부활 내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은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가 유대를 맺는 가운에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충만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7)




1.2 문제점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육신부활’을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일상적 복음선포와 장례예식에서 ‘영혼구원’의 필요성과 至福性에 대해서 많이 듣고 그렇게 느끼며 생활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래서 수다한 그리스도인들의 종말신앙이 죽음 속에서 육신을 떠나 하느님게로 귀환하는, 불멸하는 영혼의 구원을 더 많이 희망하고 육신부활 희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봐야 한다.8)


교회가 영혼의 불사불멸성을 강조하고 죽음 뒤에 영혼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지복을 누린다고 가르치면서도 세상 ‘마지막 날’에는 부활한 육신과 재결합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왔다. 이 육신부활을 통한 영혼의 육신과의 재결합 표상은 이미 하느님과 일치하여 지복을 누린다는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없어도 본질적으로 별다른 상관없는 우유적 부가물의 성격만을 지닐 뿐이다.9)




1.3 해결의 작은 시도




물론 예수께서도 ‘영혼’이라는 말을 더러 사용하신다(마태 10,28). 그러나 이것은 이를테면 육신에서 해방되어 떠돌아다니는 인간의 영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도리어 ‘생명’ 즉 ‘영혼과 육신 전체로서의 인간 생명의 핵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죽은 다음에도 남아 있을 수 있는, 그야말로 인간불멸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 ‘그 무엇’이란 시체로 남을 육신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진정한 인간인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육신과 전적으로 유리되어 있다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성서는 온전히 육신을 제거한 것이 아닌 ‘그 무엇’에 관련지어서 ‘오늘’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또한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날’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오늘’이란 이미 시작된 것을 말하며 또한 여기에 육신이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같다. 즉 사후의 존재는 새로운 육신 부활과 이미 비슷한 그 무엇이라고 하겠다. 이 육신은 땅에 묻혀서 아주 흩어져버린 분자들로써 다시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사후의 인간은 새로운 인간으로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10)




2. 종말을 향하는 역사의 미래성




2.1 역사의 의미




성서는 종말을 향한 역사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를 성서적 종말론의 예언자적 모형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묵시문학적 모형이 역사의 한 주체, 즉 하느님만을 알고 있는 데 비해서, 위대한 예언자들에 따르면 역사는 하느님의 자유와 인간 자유의 공동활동 속에서 발생한다. 물론 하느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한 명면 위에 서지는 않는다. 이것은 종래에는 어느 양식으로나 서로 결산될 수 없다. 하느님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선행하고 탁월하며 포괄적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역사(役事)는 인간 역사(歷史)의 선동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한다. 이 전망 속에서 역사는 역사로서 진지하게 취급된다. 역사는 전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하느님은 당신 주권의 구체적 도래를 인간의 수중에 맡기신다. 신앙과 불신앙을 에워싼 결단과 더불어 하느님의 주권이 좌우되고 있다. 하느님의 주권은, 그것이 신앙 속에 수용되고 긍정되는 곳에서만 진실로 역사 안으로 도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영원이 결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래 시간은 영원 자체의 생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명은 그의 부활을 통하여 시간 속에 영원성을 부여하였다. 영원으로의 행진은 이미 지금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 호기(好機)이며. 은총의 시간이고 영원을 결정하는 심판의 시간이다.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미래는 인간을 당신 자신의 미래에로 해방시키게 된다. 이것은 심판 속에서의 세계의 구원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근세의 미래 이데올로기나 미래 유토피아와는 대조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스도교가 ‘여기와 오늘’을, 그리고 이로써 의의충만을 통고하는 데 비하여, 저들은 구원대망을 시간적으로 유예된 미래로 연기하고 있다.11)




2.2 지옥, 연옥, 천국




따라서 예수에게서 지옥에 대한 말씀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요구를 철저히 진지하게 대하고, 바로 여기에서 인간 회개의 절박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스 큉은 지옥이란 인간이 처한 상태, 즉 하느님이 외적으로 판결을 내려 인간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내적으로 자신의 자유로 죄를 지음으로 말마암아 스스로를 단죄해서 하느님에서 멀어진 상태라고 해석한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연옥이란 공간적으로 어떤 장소나 시간적으로 정화를 위한 중간 단계가 아니라 심판하고 정화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순간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은 심판하고 정화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거쳐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천국이다.12) 즉 천국은 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양식이고,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 참여함이다.




2.3 종말론적 미래 희망의 의미와 근거




종국의 <마지막 일들>에 관한 신앙의 메시지는 원칙적으로 종말의 사건에 관한 물리학적 또는 역사학적 지식을 전달해주자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사건을 운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여 사는 인간에게 신뢰를 주시는 신의로운 하느님에 대하여 말해준다.13)


성서는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 역사를 죽음이 하느님의 생명에 의해 패배당하는 역사로, 인간을 그 생명에의 동참자로 기술한다. 하느님은 살아 계시는 분이시므로 동시에 信義를 지키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피조물에게 생명을 선사하심으로써 신의를 보이신다. 생명의 역사가 계속되어 갈수록 하느님의 신실의 약속과 그 신실에 대한 인간의 체험도 증대된다. 이렇듯 미래에 대한 성서의 모든 진술은 생명의 하느님의 신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내세신앙은 생명과 신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결과이다. 부활신앙은 살아 계시고 신실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최종 미래에 투사시킨 결실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약속과 그 실현을 바탕으로 신앙인이 표명하는 희망의 총체적인 집약이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음이며 무의미하게 보이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느님의 마지막 답변이다. 하느님은 예수부활로써 최종 미래의 하느님으로 나타나셨고 그리스도를 희망의 근거로 드러내 보이셨다. 또한 그 부활로써 우리 모두의 미래가 보장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희망”(골로 1,27 참조)이 되셨다. 따라서 예수 부활은 이미 지나가 버린 유일회적이고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개방되었고 이 미래를 세상에 열어주는 사건이다. 강생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되셨고 부활로 인해 ‘주님’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그분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튼튼히 세워졌으므로 인간의 최종 미래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즉 강생 및 빠스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 종말은 그리스도론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14)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신의의 역사로서의 생명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무이한 정상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즉 예수 안에서 생명의 역사의 과거와 미래가 불투명성을 벗어나며, 예수 안에 풍부한 생명의 체험과 생명의 가치 전체가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부활은 이제까지 생명으로 인정되던 모든 것과 신앙과의 관계를 새로이 규정해 놓았다. 우리는 이제 부활에 비추어서만 참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이다.15) 


하지만 이와 동시에 분명히 예수의 십자가 위에 설립되는 희망은 스스로 십자가에 처형된 희망일 수밖에 없음을 전제해야한다. 이 희망은 여하한 형태의 개선(凱旋)적인 교회도 배제한다. 나아가 빈곤과 박해는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표징이다. 요컨대 교회의 미래는 교회가 비록 어짜할 바를 모르나 의기소침하지 않고, 압박받으나 압살(壓殺)되지 않을 미래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16)




나오는 말




성경도 신학도 사후의 생명에 관하여 충분한 빛을 비춰주지는 않지만, 그리스도 신자들은 근본되는 다음의 두 가지 점을 굳게 견지하여야 한다. 먼저, 신자는 성령의 능력 덕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위되는 우리의 현재생명과 미래생명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연속성이 있음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애덕이 하느님 나라의 법이며 지상에서의 우리의 애덕은 천상에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생활과 미래생활 사이의 본질적인 단절을 명백히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신앙의 經綸이 장차 충만한 생명의 경륜으로 대체되리라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며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1요한 3,2 참조). 그리고 바로 이 약속과 놀라운 신비에 의해서 우리의 희망이 성립된다. 우리의 상상력은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또 철저하게 그 경지를 향하여 나아간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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