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뤼니 수도회 Cluny

  클뤼니 수도회  ~修道會  Cluny

  카롤링거 제국이 기울어지고 난 후 교회는 활력을 잃어 갔고 도처에 부패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물론 쇄신과 개혁의 노력도 없지 않았다. 쇄신의 중심지는 910년 창설되어 교황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 예속되어 있던 클뤼니의 베네딕토 수도회였다. 클뤼니로부터 수도 생활의 이상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일련의 위대한 수도원장들은 장기간의 재임으로 개혁을 주도하고 관철시킬 수 있었다. 클뤼니의 개혁 정신은 단지 클뤼니 수도회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확산되어 갔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의 경우 200여 개가 넘는 수도회들이 클뤼니와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일종의 수도 연합회 형태를 구성하여 클뤼니의 주도하에 일치하였다. 수도 생활의 의무와는 상관이 없던 주교들과 사제들도 클뤼니의 개혁 정신에 물들어 갔다. 수도 생활의 개혁은 곧 성직자 생활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개혁을 지지하는 중요한 모임들이 가지처럼 뻗어 나아갔다.


  독일의 왕들, 특히 오토(Otto) 3세, 하인리히(Heinrich) 2세와 3세들도 클뤼니의 개혁 정신으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독일 출신의 교황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교황 레오 9세도 교회의 지도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까지 클뤼니의 개혁 정신에 의존하였다. 교황 레오 9세는 주교로 재임하던 툴(Toul)로부터 교황좌에 등극하기 위해 로마로 이주했을 때 클뤼니의 수도승 힐데브란트(Hildebrand)를 동반하였다. 힐데브란트는 이미 시작된 수도자와 성직자의 개혁을 전체 교회의 개혁이라는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교회는 국가의 감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했다. 이러한 사실은 벌써 성직 임명권에서 그 여파가 나타났다. 물론 성직 매매, 성직자 결혼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는 로마의 귀족 가문들 등 개혁을 반대하는 적대자들도 나타났다. 이들은 모든 것이 지금처럼 그렇게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클뤼니로부터 출발한 개혁은 끝내는 승리하였다. 특히 교황 그레고리오 7세 – 예전의 수도승 힐데브란트였다 -를 통해 개혁은 승리하였다. 클뤼니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서방을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적인 모습으로 가꾸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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