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제국의 황제와 왕 Franken, Kaiser und Konige aus der

 프랑크 제국의 황제와 왕

   Franken, Kaiser und Könige aus der Reich der


  5세기 중엽에 발생했던 민족 이동으로 게르만 민족의 한 종족인 프랑크족은 갈리아(프랑스) 북쪽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했던 고트족과는 달리 프랑크족은 아직 이교도였다. 최초의 프랑크 왕국을 세운 메로빙거 왕조 출신의 클로비스(Chlodwig)는 496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다. 클로비스의 세례로 인해 프랑크족은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신봉하게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는 751년 왕위에 오른 피핀(Pippin) 국왕 치세 때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때는 무력하게 된 교황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비잔틴의 황제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시기였고, 또한 보니파시오가 교황의 특사로서 교황의 위임을 받아 교황권과 프랑크 제국과의 강한 연대를 맺으려고 모색하던 시기였다. 피핀 국왕은 프랑크 제국의 강한 신앙심을 토대로 자신의 통치에 대해 인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피핀은 아직 인준을 받지 못한 자신의 왕권의 정통성을 종교적 도유 예식으로 대치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청원을 허락해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인물은 오로지 교황뿐이었다.


  메로빙거 왕주 출신의 왕들이 무력하게 폐위당하자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Zacharias)에게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사람을 왕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한지, 아니면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왕으로 군림하는 것이 더 타당한 것인지를 문의하였다. 교황은 후자를 지지하는 답변을 보냈다. 이 답변을 토대로 해서 피핀은 최고 권위의 지지를 받으면서 751~752년 수아송(Soissons)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를 통해 프랑크 제국의 왕으로 등득하였다. 교황은 프랑크 제국의 수석 대주교에게 피핀을 왕으로 도유하도록 위임하였다.


  이 무렵 게르만 민족의 한 종족인 랑고바르드족이 교황권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여 동로마 황제는 아무런 도움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 제국의 국왕 피핀에게 자신이 프랑크 제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하도록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피핀은 이 요청을 수락하였다. 피핀은 교황의 요청을 수락함으로써 단지 교황에게 빚진 감사의 은혜를 갚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ꡐ거룩한 베드로ꡑ(교황)를 모든 적들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가 왕들에게 있다는 평소의 신념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754년 1월 6일 피핀과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폰티온(Ponthion)에서 만났다. 피핀은 비잔틴의 의정서 규정에 따라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존경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즉시 시작된 회담에서 교황과 프랑크 제국 사이의 수교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 수교 동맹을 통해 피핀은 교황에게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의 이행을 약속했을 뿐 아니라, 이미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빼앗겨 버렸던 모든 지역을 되찾아 다시금 교황에게 되돌려줄 것도 약속하였다. 이러한 약속은 이행되었고, 그 결과 역사는 이러한 약속의 이행을 ꡐ피핀의 증여ꡑ라고 기록하고 있다. 피핀의 증여 결과로 교회 국가의 기본적인 영토가 확정되었다.


  754년 7월 28일 교황은 몸소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칼(Karl)과 칼만(Karlmann)의 즉위식을 다시 한 번 더 반복해서 주재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에게 ꡐ로마의 귀족ꡑ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이로써 피핀은 단지 모라 도시뿐 아니라, 로마 교회를 수호해야 할 수호자의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 756년 피핀은 랑고바르드족을 최종적으로 패배시켰고, 회복한 영토를 다시금 교황에게 반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교회 국가가 현실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황들이 비잔틴과 결별하고 독일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데 있어서 성화 공경을 둘러싼 논쟁도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 교황권은 불확실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서방에서 교황권을 확실하게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였다.


  칼 대제(768~814년)는 교황 보니파시오에 의해 시작되어 자신의 부왕 피핀에 의해 더욱더 강화된 프랑크 제국과 교황 사이의 동맹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아갔다. 칼 대제는 기존의 토대 위에 보편 제국을 건설했고, 이로써 중세기의 강력한 지배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칼 대제는 자신의 형제 칼만과 함께 지배권을 분할하였다. 하지만 칼만이 젊은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칼 대제는 일인 전제 군주로 부상하였다. 뿐만 아니라 칼 대제는 랑고바르드족과의 제휴를 모색했고, 그래서 랑고바르드의 국왕의 딸과 결혼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랑고바륻족의 정복 정치가 되살아날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교황 역시 랑고바르드족과 제휴 관계를 맺었다. 요절한 칼만의 미망인이 나이가 어린 두 자녀의 상속 청구권을 보장받기 위해 랑고바르드 제국으로 도피하자 칼 대제는 랑고바르드족 출신의 부인과 이혼해 버렸다. 772~773년 랑고바륻족이 로마를 침공하여 포위했을 때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프랑크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프랑크의 국왕은 랑고바르드족을 패배시켰다. 3월 말경 칼 대제는 파비아(Pavia)를 출발해서 로마를 향해 성지 순례를 했고,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칼 대제를 장중하게 영접하였다. 칼 대제는 부활 축제에 참가했으며, 754년의 ꡐ피핀의 증여ꡑ를 새롭게 맹세하였다. 하지만 어려움도 없지 않았다.


  칼 대제는 자신의 부왕 피핀으로부터 물려받은 ꡐ로마의 귀족ꡑ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 칭호는 단지 도덕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이로써 비잔틴 황제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교회 국가(로마)는 공식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동맹 관계로부터 분리되었다. 교황은 새로운 국가 체재, 즉 교회 국가의 지배자가 되었다. 778년 5월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칼 대제에게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으로부터 로마를 수호하겠다는 그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781년 칼 대제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황제와 교황 사이에는 ꡐ사랑과 충성의 동맹 관계ꡑ가 새롭게 강화되었다. 교황은 칼 대제의 네 살 난 아들 피핀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를 ꡐ랑고바르드의 왕ꡑ으로 도유했으며, 칼 대제의 막내아들 루트비히(Ludwig) – 나중에 프롬메(Fromme)의 왕으로 등극함 -를 아키텐(Aquitanien)의 왕으로 도유하였다. 787년 칼 대제가 재차 로마를 방문했을 때 교회 국가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성화 논쟁이 종지부를 찍을 무렵 새로운 분쟁이 발생하였다. 칼 대제는 787년에 개최되었던 니케아 공의회에 초대를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모욕감을 느낀 칼 대제는 공의회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고, 오역으로 인해 공의회의 텍스트를 오해하기도 하였다. 칼 대제의 의견에 의하면, 자신의 제국에서 교회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칼 대제는 자신을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 자처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내정에 관여하는 것을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책임에서 기인하는 배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칼 대제는 성직자들의 생활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도록 했고, 시노드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교회와 국가 사이의 경계는 무너졌다. 칼 대제는 796년 교황 레오 3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이교도의 침입과 불신자들의 약탈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아울러 교황에게 위임된 책무는 교회의 적들의 패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교황 레오 3세는 자신의 교황 선출 후 즉시, 교황 선거 결과뿐 아니라 베드로의 무덤을 열고 닫는 열쇠, 로마인들의 충성 서약의 표지인 로마 도시의 깃발을 칼 대제에게 보냈다. 하지만 로마의 귀족 가문들은 교황의 처사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로마의 귀족 가문들은 교황 레오 3세를 탄핵하였다. 교황 레오 3세는 파더본(Paderborn)에 머물고 있던 칼 대제에게로 도피하여 은신처를 구하였다. 칼 대제는 로마에서 이 사태의 해결을 모색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교황 레오 3세는 황제의 호위하에 로마로 되돌아왔고, 칼 대제도 교황 레오 3세를 뒤따라 로마를 향해 출발하였다.


  교황 레오 3세에 대한 탄핵의 심리는 800년 말경 베들 대성전에서 진행되었다. 800년 성탄절에 교황은 베드로 대성전에서 칼의 황제 대관식을 주재하였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칼 대제가 대관식에 대해 별로 만족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칼 대제는 원래 동로마와 서로마를 지배하는 두 제왕의 주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813년 칼 대제는 자신의 아들 루트비히를 교황의 협력도 없이 아헨에서 황제로 등극시켰다. 이로써 칼 대제는 프랑크 제국의 자주성을 의식적으로 강조하고자 했다. 816년 10월 랭스(Reims)에서 루트비히의 황제 대관식을 다시 한 번 더 주재한 교황 스테파노 4세는 황제와 교황 사이의 우호 동맹 관계를 더욱더 강화시켰다. 프랑크 제국의 다른 왕들 역시 교황과 황제 사이의 우호 동맹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프랑크 제국의 왕들은 먼저 자신의 부왕들로부터 왕관을 물려받는 대관식을 치르고 난 후, 나중에 교황의 주재하에 다시 한 번 더 대관식을 치렀다.


  교황 파스칼(Paschalis) 1세는 817년 교황으로 선출되고 난 후 황제의 동의를 얻지 않고서 주교 서품을 받았다. 루트비히 황제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로마인들의 자유로운 교황 선출을 보증했고, 이미 거행되었던 주교 서품에 동의하였다. 루트비히의 아들 로타르(Lothar) 1세는 황제의 개혁 입법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로타르 1세는 로마에 대한 황제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로타르 1세는 824년 자신이 지지하는 에우제니오 2세를 교황으로 선출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교황 에우제니오 2세와 ꡐ로마 협정ꡑ(Constitutio Romana)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을 통해 로타르 1세는 자유로운 교황 선거를 보장하였다. 그 대신 로타르 1세는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당사자는 성성식 이전에 황제의 특사에게 충성을 서약할 것을 요구하였다. 817년 프롬메의 루트비히는 자신의 첫 번째 결혼에서 출생한 3명의 아들에게 제국의 통치를 분할해 주었다. 장자 로타르는 황제의 직위와 함께 최고의 통치권과 제국의 심장부를 차지했고, 피핀은 프랑크 제국의 서쪽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을 포함하는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프롬메의 루트비히 황제가 두 번째 결혼에서 넷째 아들 칼(Karl der Kahle)을 얻자 부자지간에 반목과 불화가 발생하였다. 로타르는 교황에게 재판관의 역할을 맡아 줄 것을 간청하였다. 재판관의 역할을 맡은 교황 그레고리오 4세는 아버지 프롬메의 루트비히 편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왕 프롬메의 루트비히는 아들들에 의해 권력을 빼앗겼고, 마침내 833년 10월에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퇴위당하였다. 850년 교황 레오 4세는 로타르의 아들 루트비히의 황제 대관식을 주재하였다. 프랑크의 황제 가문 내에서 발생했던 불화와 반목은 이 가문의 지배권의 몰락을 초래했고, 프랑크 제국의 지배 시대를 마감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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