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노리오 문제 ~問題 Honoriusfrage
에집트의 ꡐ그리스도 단성론ꡑ(Monophysitismus)을 교회와 다시금 화해시키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세르지우스(Sergius)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해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결과 세르지우스는 단성론자들이 주장하던 ꡐ본성ꡑ의 일치 대신 ꡐ의지ꡑ의 일치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Sophronius)가 자신의 주장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세르지우스는 교황 호노리오 1세(Honorius, 625~638년)에게 조회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그리스의 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교황은 한 서한에서 그리스도의 ꡐ의지ꡑ의 일치를 지지하는 태도를 표명했고, 이를 토대로 해서 세르지우스는 신앙의 정식을 작성하였다. 이 신앙 정식은 638년 비잔틴의 황제에 의해 인정받았다. 하지만 681년에 개최되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세르지우스가 작성한 신앙 정식에 반대했고, 그 내용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 단죄에는 교황 호노리오 1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노리오의 후임 교황 레오 2세 역시 이러한 단죄를 수용하였고, 자신의 전임자 호노리오를 사도적 전통을 욕되게 부인하였고, 참된 신앙을 파괴했다는 이유를 들어 비난하였다. 교황 레오 2세는 자신의 비난을 나중에는 약간 수정하였다. 즉 호노리오는 이단의 불길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했으나, 이단을 거슬러 대항했다고 수정하였다. 이후 새로 선출되는 교황은 ꡐ호노리오를 포함하는ꡑ새로운 이단의 장본인을 단죄해야만 하였다. 이로써 호노리오라는 이름은 이단의 낙인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교황이 공의회에 의해 이단자로 단죄되었다는 사실은 종교 개혁의 시대에 와서는 갈등의 소지를 제공하였고, 특히 1870~1871년에 개최되었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황의 무류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로텐부르크(Rottenburg)의 주교 헤펠레(Hefele)는 이른바 호노리오 문제를 참고하여 교황의 무류권을 지지하는 편을 거슬러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다. 교황 호노리오가 그 당시 자신의 태도를 ꡒex cathedraꡓ에서 표명했는가라는 물음에 헤펠레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교황의 ꡒex cathedraꡓ결정에 반대하는 논거가 가능하게 되었다. 호노리오 교황의 서한을 정확하게 연구한 결과는 교황 호노리오가 사태를 심사숙고하지 않고 가볍게 취급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 세르지우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교황 호노리오는 ꡐ단일 의지론ꡑ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지지한다는 태도를 표명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노리오의 결정은 더 이상 ꡒex cathedraꡓ에서 내린 결정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