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세니즘 Jansenismus

  얀세니즘 Jansenismus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시대 이래,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의지 사이의 협력에 대한 물음과 씨름해 왔다. 이러한 물음은 칼뱅파가 인간의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구원의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협력의 방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물음과 관련해서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였던 예수회와는 달리 얀세니즘은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얀세니즘이라는 이름은 루뱅의 교수였던 얀세니우스(Jansenius)로부터 유래하였다. 얀세니우스는 이프르(Ypern)의 주교로서, 그의 사후(†1638년) 『아우구스티노』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던 저서를 남겼다. 얀세니우스의 출발점은 은총과 예정에 관한 아우구스티노의 단호한 견해였다. 얀세니우스는 아우구스티노의 이러한 견해를 더욱더 과장시켰고, 그 결과를 곡해하였다. 1642년 예수회는 얀세니우스의 저서를 반박하였고, 교황 우르바노(Urban) 8세는 얀세니우스 저서의 유포를 금지시켰다. 이러한 신학적인 논쟁은 만일 신심 운동으로 확산되지 않았더라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신심 운동의 진원지는 베르사유 근교의 포르루아얄(Port Royal)에 위치하고 있던 시스테르시안(Zisterzienz) 여자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는 은총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고수하였고, 이러한 태도는 삶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하느님께서는 자유롭게 인간의 미래의 삶을 결정하시고,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은총을 통해 선택의 선물을 선사하신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오로지 두려움과 전율로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부당한 처지 때문에 자주 성체를 배령해서는 안 되고, 옛날의 속죄 규정을 다시금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얀세니우스의 저서 『아우구스티노』가 포함하고 있는 5개의 명제를 이단으로 단죄하였고, 얀세니즘을 추종하는 자들도 교황이 단죄한 명제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5개의 명제가 얀세니우스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Alexander) 7세는 1656년 이들의 변명을 배척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주교들은 자기 교구 소속 성직자들에게 얀세니즘을 배척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서류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교황 역시 이와 유사한 내용의 서류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부 주교들은 서명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로마로부터 처벌의 위협에 직면하자 이들 주교들은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게 굴복하고 말았다(이른바 ꡐ클레멘스 평화ꡑ). 물론 이들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 소속 성직자들 앞에서 사태의 진전에 관해 해명할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이 해명은 사실상 굴복을 철회하는 기회로 이용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논쟁이 발생하였고, 1705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새롭게 단죄되었다. 얀세니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의 성직자 모임이 추구하는 갈리아의 이념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이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포르루아얄의 시스테르시안 여자 수도회가 해체되고 파괴되었음에도 부룩하고, 이러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더 나아가 이 논쟁은 더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1713년 교황의 교서 Unigenitus(「독생 성자」)를 통해 새로운 단죄가 있었으나 별다른 효력은 없었다. 수많은 얀세니즘 추종자들이 이주했던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교회의 분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얀세니즘은 예수회의 해체에도 모종의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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