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Jesuitenorden

  예수회   Jesuitenorden

  로욜라(Loyola)의 이냐시오(Ignatius)는 북스페인의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이냐시오는 장교로서 복무하던 중 팜플로나(Pamplona)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당하였다. 부상 치료 중 그는 성인들의 전기를 탐독하는 데 열중하였고, 그 결과 내적인 변화를 체험하였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만레사(Manresa) 근처의 동굴에서 엄격한 참회 행위와 관상을 통해 심화시켰다. 이러한 체험들은 피정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영신 수련』이라는 작품으로 저술되었다.


  이냐시오는 성지 순례 후 파리에서 수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동료들을 모았다. 1534년 8월 15일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가난과 정결의 서원을 발하였고, 성지의 선교를 서약하였다. 선교 서약은 나중에는 교황에게 봉사한다는 서약으로 바뀌었다. 1537년 이후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사목 활동에 종사하였고, 공동으로 수도회 규칙의 뼈대를 작성하였으며, 이 규칙은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재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1556년 서거할 때까지 예수회의 초대 총장으로 봉직하였다. 이냐시오는 청빈, 순결, 순명이라는 세 가지 서원에 네 번째의 서원, 즉 교황에 대한 각별한 순종이라는 서원을 추가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예수회의 와해를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교히를 적대시하는 동기로부터 출발하였다. 바로 네 번째의 서원이 교회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자극하였다. 아울러 교황의 저택 내에서 차지하는 예수회의 특별한 지위도 많은 사람들의 질시를 부러일으켰다. 그리고 얀세니즘을 둘러싼 논쟁도 모종의 작용을 하였다. 포르투갈과 프랑스가 이러한 움직임을 선도해 나갔다. 프랑스의 경우 1764년 12월 1일 예수회가 해체되었다. 그리고 1769년 가톨릭의 권력자들은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해서 예수회를 해체시킬 것을 교황에게 청원하였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이 청원을 들어주지 않았나. 왜냐하면 이처럼 중요한 사안을 혼자서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이 사안을 검토하기 위해 추기경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의 회합 하루 전에 교황이 서거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서거 후 유럽의 권력자들은 예수회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교황으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공동의 인식에 도달하였다. 로렌초(Lorenzo Ganganelli) 추기경은, 교황은 중대한 이유가 있다면 수도회를 해체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였고, 그 결과 그는 1769년 만장일치로 교황 클레멘스 14세로 선출되었다.


  1769년 7월 21일 가톨릭의 권력자들은 교황 클레멘스 14세에게 다시금 예수회의 해체를 청원하였다. 외교 관계의 단절이라는 위협으로 협박을 가하는 프랑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이 청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769년 9월, 예수회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정확한 해체 시기를 밝히지는 않았다. 예수회를 공식적으로 해체하기 위한 조치로서 교황은 새로운 회원의 입회를 금지시켰다. 그래서 예수회는 스스로 소멸되었다. 이에 대해 스페인은 저항하였다. 그러나 예수회는 1773년 7월 21일에 발표된 교서로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예수회의 해체에 대한 반응은 국가별로 매우 상이하였다. 교회 국가(로마)가 가장 강력하게 예수회를 공격하였고, 예수회의 총장과 지도자급 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개신교를 신봉하던 프리드리히 2세 국왕이 통치하던 프로이센(Preussen)과 러시아는 예수회의 해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회의 해체는 국가의 교육 제도를 위기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3년 동안이나 예수회의 해체를 둘러싼 문제와 씨름하였다. 끝내 교황은 이들 국가의 의지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 결과 교황권의 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예수회는 1814년 8월 7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원상 복구되었다. 하지만 예수회는 여전히 국가들의 주요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에서 발생한 문화 투쟁 동안 1875년, 병원을 운영하던 수도회 이외에 모든 수도회는 해체되었고, 예수회는 프로이센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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