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의 증여 Konstantinische Schenkung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贈與 Konstantinische Schenkung

  교황 바오로 1세(757~767년)는 자신의 교황 선출 소식을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라 비잔틴의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그 대신 프랑크의 왕에게 알린 첫 번째의 교황이었다. 이로써 동로마 교회의 주권자로 자처하고 있던 동로마의 황제는 교황과 교회 국가의 보호를 더 이상 보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실제로 교황이 프랑크 제국으로 선회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프랑크 제국으로의 선회는 이미 보니파시오에 의해 준비되어 왔고, 그 당시에는 단지 실행의 결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권력의 불확실한 상태는 17세기에 이르러 교회와 국가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피룡로 하고 있었다.


  751년과 754년 두 차례에 걸쳐 ꡐ피핀의 증여ꡑ가 발생하여, 그 결과 교회 국가가 성립되었을 때, 그리고 칼 대제가 800년 성탄절을 기해 황제 대관식을 치렀을 때, 이 필요성은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현안의 문제로 부각되었다.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사이에서 차지하는 교황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규명 작업이 모색되고 있는 동안 이른바 위조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라는 문서가 알려졌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는 일종의 증여 문서로서 서방에서의 교황의 위치에 대해 밝히고 있다. 이 문서의 위조 시기와 관련해서는 사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있어 왔다. 위조 시기는 아마도 750년과 800년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750년을 위조의 시기로 보고자 하는 견해가 약간 우세하다. 문서를 위조하게 된 동기는 불확실하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라는 말마디는 850년경 서프랑크 제국에서 생겨난 「위(僞)이시도르 위조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중세기 내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여하튼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는 곧 로마는 물론 비잔틴에서도 진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는 교회 국가의 법적인 근거, 교황의 수위권 그리고 세계의 제국에 대한 교황의 통치권에 대한 법적인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인노첸시오 3세 그리고 보니파시오 8세 등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의 위조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 문서에는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서명이 있었고, 서명은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5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추기경 니콜라오(Nikolaus von Cues)와 라우렌시오(Laurentius Valla)에 의해 이 문서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서의 핵심은 5세기로부터 전해지는 이른바 ꡐ실베스테르 전설ꡑ이다. 이 전설에 의하면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거주지를 비잔틴으로 옮기면서 교황 실베스테르 1세를 통치자로 세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사도 베드로가 창립한 로마 교회를 다른 모든 교회보다 더 우위에 두었고, 로마의 사제 추기경들에게 원로의 지위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의 저자는 아마도 실베스테르의 전설에 입각해서, 469년 이래 서로마의 황제권의 몰락으로 야기된 상황을 고착시켜, 교황에게 교회적인 통치권뿐 아니라 동시에 정치적인 통치권을 부여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볼 때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는 새로운 권리의 창조라기보다는 기존하는 권리의 상황을 위조의 수단을 빌려 고착시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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