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열한 번째 공의회〔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 1179년〕: 황제 프리드리히(Friedrich) 1세 바르바로사(Barbarossa)와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사이의 반목은 18년간이나 계속되었다. 1159년 교황 하드리아노 4세 서거 후의 교황 선거에서 이중의 선거가 발생하였다.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은 자신의 전임자가 추구하였던 교회 중심의 정치 노선을 계속하기를 원하였으나, 대립 교황 빅토리오 4세는 황제의 이탈리아 중심적 정치 노선을 지지하였다. 1164년 대립 교황 빅토리오 4세가 서거하자 독일의 많은 주교들이 알렉산데르 3세 편에 가담하였다. 황제는 대립 교황의 편에 가담하였다. 로마인들은 아렉산데르 3세 교황을 지지하였고 그를 로마로 초대하였다. 1165년 11월 23일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로마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로바로사는 무력으로 파스칼(Paschalis)을 로마로 데려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그를 교황으로 즉위시켰다.
이에 대한 답례로 파스칼은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대관식을 베풀었다. 1168년 파스칼이 서거하자 대립 교황 갈리스토 3세가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황제는 이러한 반목과 분열을 조정하기 위한 교섭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황제는 다섯 번째 이탈리아로 진격하던 중 1176년 밀라노(Mailand) 근교에서 참패하자, 아나니(Anagni)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예비 조약을 체결하였다(1176년 11월/12월). 그리고 대립 교황을 지지하는 태도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천명하였다. 1177년 5월과 6월에 베네치아에서 교섭이 계속 진행되었고, 이 교섭은 아나니에서 체결하였던 예비 조약을 승인함으로써 끝나게 되었다. 1178년 6월 24일 교황은 베네치아의 마르코 성당 앞에서 황제를 영접하였고, 황제의 파문을 철회한 후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베네치아의 조약 체결을 위한 예비 회담에서는 보편 공의회의 소집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기도 하였다.
이 공의회는 1179년 3월 5일 라테라노에서 개최되었다(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 유럽 전 지역의 300여 명에 달하는 주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사이 1178년 8월 29일 대립 교황 갈리스토 3세의 후계자로 인노첸시오 3세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인노첸시오 3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1180년 1월에 교황에게 굴복하였다. 공의회 개막 회의에서 아시시의 주고는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하였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업적을 기렸다. 공의회는 모든 주교좌 성당은 부속 학교를 운영해야 하고, 주교는 자신의 교구 소속 성직자들을 염려해야 한다는 등 몇 가지 개혁 법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직 매매와 사제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을 반포하였다. 가장 중요한 규정은 교황 선거에 관한 규정이었다. 앞으로의 교황 선거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며, 교황 선거는 추기경단에 유보되어 있다는 규정 등이 그것이다.
(12) 열두 번째 공의회〔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1215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자신의 교황 즉위를 기념하여 1215년 11월에 라테라노에서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유럽 전 지역에서 400여 명 이상의 주교들 – 주교들에게는 공의회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 과 800여 명에 이르는 수도원장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이로써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중세기에 개최되었던 공의회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공의회로 기록되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즉위 시초에 즉시 공의회의 소집을 위한 계획을 수립한 바 있었다. 교황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십자군의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동방 교회가 로마 교회로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였다. 그래서 그리스인들도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공의회에서 다루어야 할 의제에 대해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그리스인들은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공의회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일치 문제와 십자군 문제 이외에, 교회 개혁과 개혁을 위한 모델 계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교황은 공의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전체 그리스도교의 번영, 잘못된 관행의 시정, 관습의 쇄신, 이단에 대한 박해, 신앙의 강화 그리고 평화의 보장 등을 열거하였다. 공의회는 1215년 11월 1일에 개최되었다. 그리고 3번의 회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공의회는 십자군을 위한 세금을 3년간 부과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주교들에게는 십자군에 관한 설교 의무를 부과하였다. 신앙의 진리 문제와 관련해서 베렌가르(Berengar von Tours)의 주장이 비난을 받았다. 베렌가르는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부정하였고, 성체성사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식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달리 공의회는 ꡐ본질 변화ꡑ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안에는 성체성사의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세례, 참회 그리고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새롭게 확정되었고, 신자들에게는 부활 시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해야 한다는 의무가 부과되었다. 그리고 이단 – 알비파와 발도파 – 주교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계획된 십자군 운동을 1217년 시작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기 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16년 7월 6일 페루자에서 서거하였다.
(13) 열세 번째 공의회〔제1차 리옹 공의회, 1245년〕: 1244년 12월 27일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리옹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예고하였다.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교황은 1244년 6우러에 이탈리아를 떠나 12월 초에 리옹에 도착하였다. 교황은 로마 교회의 개혁, 십자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한 도움의 제공, 동양으로부터 유럽으로 침략의 세력을 넓히고 있는 몽고족들에 대한 대응 조치, 그리고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 등을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과제로 열거하였다.
이미 예고한 대로 공의회는 개최되었다. 그전에 교황이 거처하고 있던 생쥐스트(Saint-Just) 수도원에서는 1245년 6월 26일에 공의회를 준비하는 회의가 개최된 바 있었다. 독일에서는 단지 소수의 주교들만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이와는 달리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수많은 주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공의회의 첫 번째 회기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교회가 처한 심각한 상황에 대해 보고하였다. 황제 프리드리히의 궁중 대법관 타데오(Thaddaeos von Suessa)는 황제의 이름으로, 황제는 사라센족과 몽골족을 대항하여 싸울 것이며, 실지한 성지를 회복할 것이며, 교회가 박탈당한 재산을 반환할 것이라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황제의 이러한 천명을 공의회를 기만하기 위한 하나의 공허한 약속으로 여겼다.
1245년 6월 28일 리옹의 주교좌 성당에서 개막된 첫 번째 본회의에서 교황은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예상되는 의제에 대해 발언하였다. 두 번째 회의에서는 황제 프리드리히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 제기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 회의는 6월 17일로 연기되었다. 왜냐하면 황제의 도착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은 미리 준비된 선언문을 낭독하여 황제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황제로서 누리는 특권은 박탈되었고, 황제의 신하들은 순종의 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황제를 지지하는 자들은 파문의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선언에 대해 타데오는 항의하였고, 황제는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어떤 초대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의회의 적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황제는 다른 세속의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으나 참석하지 않았다고 응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제는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받은 자들을 오히려 참석하지 말라고 종용했다고 응수하였다.
(14) 열네 번째 공의회〔제2차 리옹 공의회,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개인적인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성지에 체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십자군 운동의 이념과 관련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교황의 내적인 관심사를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교황의 첫 번째 연설은 성지의 상황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1273년 4월 13일 교황은 리옹에서 개최될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교황은 이 공의회로부터 교회의 개혁, 동방 교회와의 일치 그리고 성지를 위한 도움의 제공 등을 다룰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성지를 위한 도움의 제공 문제를 동방 교회와의 일치 문제와 연계시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동방의 황제 미카엘(Michael) 8세를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1274년 5월 7일 공의회는 리옹의 주교좌 성당에서 개막되었다. 거의 300명에 이르는 주교들, 수많은 수도원장들 그리고 신학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6월 말경 동방에서 파견된 특사가 리옹에 도착하였고, 특사는 황제의 서한을 지참하고 있었다. 황제는 이 서한에서 로마 교회의 신앙, 교황의 수위권 그리고 ꡒ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 나시다ꡓ(Filioque)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 황제는 오래 전부터 동방 교회에서 사용해 왔던 신앙 고백문과 동방 교회의 특별한 예식을 그대로 보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불가리아의 총대주교와 세르비아의 수도 대주교도 황제의 요청에 동의를 표명하였다. 6월 29일에 거행되었던 성찬 전례에서는 독서와 복음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봉독하기에 이르렀다.
7월 6일 교황은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공표하였고, 이로써 1054년 이래 계속되어 온 분열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물론 이 일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동방 교회의 백성들과 성직자들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방 교회와의 일치는 교황에게 있어서 성지의 해방이라는 자신의 두 번째 관심사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였다.
1274년 5월 18일에 속개된 공의회의 두 번째 회의에서는 십자군 운동과 관련된 재정 문제를 결의하였다. 즉 교회의 모든 수입 가운데 1/10에 해당하는 금액을 6년 동안 모금한다고 결의하였다. 공의회의 세 번째 관심사는 교회의 개혁이었다. 교회 개혁 가운데 교황 선거를 새롭게 규정해야 할 필요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 선거에 대한 새로운 규정은 촉박한 시간 때문에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몇 가지 개혁과 관련된 규정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즉 교황의 서거 후 로마에 체류하는 추기경들은 다른 추기경들이 도착할 때까지 10일 이상을 기다려서는 안 되고, 추기경들은 외부 세계와 차단된 봉쇄 구역 안에서 교황을 선출해야 하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지연되면 될 수록 추기경들은 열악한 생활 조건 아래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교황의 공위 기간 중 추기경들의 수입은 중지되어야 한다는 등의 규정이 결정되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효하게 준수되고 있는 이 규정은 공의회에 참석한 추기경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대다수에 의해 승인되었다. 공의회 폐막 연선에서 교황은 본당 사목에 대한 개혁과 교회의 쇄신에 대해 주교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15) 열다섯 번째 공의회〔비엔나 공의회, 1311~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와 더불어 대략 70여 년 동안 계속된 이른바 교황들의 아비뇽(Avignon) 유배(1305년)가 시작되었다. 아비뇽의 유배는 프랑스 국왕들에게 교황이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프랑스의 국왕 필립은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하였다. 성전 기사 수도회는 십자군 운동 초기에 성지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필립 국왕이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하게 된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필립 국왕은 아마도 성전 기사 수도회의 재산을 탐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 국왕은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하는 이유로서 그 자체 모순을 안고 있는 혐의를 지적하였다. 즉 성전 기사 수도회에 입회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비윤리적인 예식을 치러야 한다는 혐의 때문에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1307년 10월 13일 프랑스에 거주하던 모든 성전 기사 수도회원들은 체포되었고, 고문을 통해 혐의 사실을 자백하도록 강요받았다. 더 나아가 교황은 모든 국가의 성전 기사 수도회원들을 투옥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강요된 자백에 대한 진상을 알고 나서 성전 기사 수도회를 겨냥하여 취하였던 모든 조치를 취소하였다. 하지만 필립 국왕은 양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전 기사 수도회를 겨냥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교황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1310년 10월 1일 비엔나에서 소집될 공의회에 성전 기사 수도회를 소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공의회는 막상 1311년 10월에 소집되었다. 120여 명에 이르는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을 포함한 300여 명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1311년 10월 16일에 개막된 공의회에서 교황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관한 문제 해결을 공의회의 중요한 과제로 지적하였다. 그 외에 십자군 운동과 교회 개혁도 공의회의 과제로 언급하였다. 교황은 필립 국왕의 입장을 고려하여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공의회 참석자들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1312년 3월 22일에 성전 기사 수도회의 관리권 행사를 중지시키고, 이러한 사실을 4월 3일에 개최되었던 두 번째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성전 기사 수도회에 속하였던 재산은 다른 기사 수도회에 양도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국왕 필립은 이러한 조치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립 국왕은 성전 기사 수도회의 대부분의 재산을 자신이 차지해 버렸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자신의 결정을 통해 스스로 무거운 부담을 떠맡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에 관한 논의는 6년 동안 교회 전체 수입 가운데 1/10에 해당하는 금액을 모금한다는 결정으로 끝을 맺었다. 영주들은 불확실한 태도로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는 정도로 의견을 표명하였다. 교회의 개혁에 관한 논의는 본질적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5월 6일에 속개되었던 마지막 회의에서는 소수의 개혁 법령이 발표되었을 뿐이었다.

(11) 열한 번째 공의회〔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 1179년〕: 황제 프리드리히(Friedrich) 1세 바르바로사(Barbarossa)와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사이의 반목은 18년간이나 계속되었다. 1159년 교황 하드리아노 4세 서거 후의 교황 선거에서 이중의 선거가 발생하였다.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은 자신의 전임자가 추구하였던 교회 중심의 정치 노선을 계속하기를 원하였으나, 대립 교황 빅토리오 4세는 황제의 이탈리아 중심적 정치 노선을 지지하였다. 1164년 대립 교황 빅토리오 4세가 서거하자 독일의 많은 주교들이 알렉산데르 3세 편에 가담하였다. 황제는 대립 교황의 편에 가담하였다. 로마인들은 아렉산데르 3세 교황을 지지하였고 그를 로마로 초대하였다. 1165년 11월 23일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로마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로바로사는 무력으로 파스칼(Paschalis)을 로마로 데려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그를 교황으로 즉위시켰다.
이에 대한 답례로 파스칼은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대관식을 베풀었다. 1168년 파스칼이 서거하자 대립 교황 갈리스토 3세가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황제는 이러한 반목과 분열을 조정하기 위한 교섭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황제는 다섯 번째 이탈리아로 진격하던 중 1176년 밀라노(Mailand) 근교에서 참패하자, 아나니(Anagni)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예비 조약을 체결하였다(1176년 11월/12월). 그리고 대립 교황을 지지하는 태도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천명하였다. 1177년 5월과 6월에 베네치아에서 교섭이 계속 진행되었고, 이 교섭은 아나니에서 체결하였던 예비 조약을 승인함으로써 끝나게 되었다. 1178년 6월 24일 교황은 베네치아의 마르코 성당 앞에서 황제를 영접하였고, 황제의 파문을 철회한 후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베네치아의 조약 체결을 위한 예비 회담에서는 보편 공의회의 소집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기도 하였다.
이 공의회는 1179년 3월 5일 라테라노에서 개최되었다(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 유럽 전 지역의 300여 명에 달하는 주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사이 1178년 8월 29일 대립 교황 갈리스토 3세의 후계자로 인노첸시오 3세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인노첸시오 3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1180년 1월에 교황에게 굴복하였다. 공의회 개막 회의에서 아시시의 주고는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하였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업적을 기렸다. 공의회는 모든 주교좌 성당은 부속 학교를 운영해야 하고, 주교는 자신의 교구 소속 성직자들을 염려해야 한다는 등 몇 가지 개혁 법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직 매매와 사제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을 반포하였다. 가장 중요한 규정은 교황 선거에 관한 규정이었다. 앞으로의 교황 선거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며, 교황 선거는 추기경단에 유보되어 있다는 규정 등이 그것이다.
(12) 열두 번째 공의회〔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1215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자신의 교황 즉위를 기념하여 1215년 11월에 라테라노에서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유럽 전 지역에서 400여 명 이상의 주교들 – 주교들에게는 공의회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 과 800여 명에 이르는 수도원장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이로써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중세기에 개최되었던 공의회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공의회로 기록되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즉위 시초에 즉시 공의회의 소집을 위한 계획을 수립한 바 있었다. 교황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십자군의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동방 교회가 로마 교회로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였다. 그래서 그리스인들도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공의회에서 다루어야 할 의제에 대해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그리스인들은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공의회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일치 문제와 십자군 문제 이외에, 교회 개혁과 개혁을 위한 모델 계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교황은 공의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전체 그리스도교의 번영, 잘못된 관행의 시정, 관습의 쇄신, 이단에 대한 박해, 신앙의 강화 그리고 평화의 보장 등을 열거하였다. 공의회는 1215년 11월 1일에 개최되었다. 그리고 3번의 회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공의회는 십자군을 위한 세금을 3년간 부과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주교들에게는 십자군에 관한 설교 의무를 부과하였다. 신앙의 진리 문제와 관련해서 베렌가르(Berengar von Tours)의 주장이 비난을 받았다. 베렌가르는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부정하였고, 성체성사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식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달리 공의회는 ꡐ본질 변화ꡑ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안에는 성체성사의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세례, 참회 그리고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새롭게 확정되었고, 신자들에게는 부활 시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해야 한다는 의무가 부과되었다. 그리고 이단 – 알비파와 발도파 – 주교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계획된 십자군 운동을 1217년 시작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기 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16년 7월 6일 페루자에서 서거하였다.
(13) 열세 번째 공의회〔제1차 리옹 공의회, 1245년〕: 1244년 12월 27일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리옹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예고하였다.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교황은 1244년 6우러에 이탈리아를 떠나 12월 초에 리옹에 도착하였다. 교황은 로마 교회의 개혁, 십자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한 도움의 제공, 동양으로부터 유럽으로 침략의 세력을 넓히고 있는 몽고족들에 대한 대응 조치, 그리고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 등을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과제로 열거하였다.
이미 예고한 대로 공의회는 개최되었다. 그전에 교황이 거처하고 있던 생쥐스트(Saint-Just) 수도원에서는 1245년 6월 26일에 공의회를 준비하는 회의가 개최된 바 있었다. 독일에서는 단지 소수의 주교들만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이와는 달리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수많은 주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공의회의 첫 번째 회기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교회가 처한 심각한 상황에 대해 보고하였다. 황제 프리드리히의 궁중 대법관 타데오(Thaddaeos von Suessa)는 황제의 이름으로, 황제는 사라센족과 몽골족을 대항하여 싸울 것이며, 실지한 성지를 회복할 것이며, 교회가 박탈당한 재산을 반환할 것이라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황제의 이러한 천명을 공의회를 기만하기 위한 하나의 공허한 약속으로 여겼다.
1245년 6월 28일 리옹의 주교좌 성당에서 개막된 첫 번째 본회의에서 교황은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예상되는 의제에 대해 발언하였다. 두 번째 회의에서는 황제 프리드리히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 제기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 회의는 6월 17일로 연기되었다. 왜냐하면 황제의 도착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은 미리 준비된 선언문을 낭독하여 황제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황제로서 누리는 특권은 박탈되었고, 황제의 신하들은 순종의 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황제를 지지하는 자들은 파문의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선언에 대해 타데오는 항의하였고, 황제는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어떤 초대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의회의 적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황제는 다른 세속의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으나 참석하지 않았다고 응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제는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받은 자들을 오히려 참석하지 말라고 종용했다고 응수하였다.
(14) 열네 번째 공의회〔제2차 리옹 공의회,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개인적인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성지에 체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십자군 운동의 이념과 관련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교황의 내적인 관심사를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교황의 첫 번째 연설은 성지의 상황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1273년 4월 13일 교황은 리옹에서 개최될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교황은 이 공의회로부터 교회의 개혁, 동방 교회와의 일치 그리고 성지를 위한 도움의 제공 등을 다룰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성지를 위한 도움의 제공 문제를 동방 교회와의 일치 문제와 연계시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동방의 황제 미카엘(Michael) 8세를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1274년 5월 7일 공의회는 리옹의 주교좌 성당에서 개막되었다. 거의 300명에 이르는 주교들, 수많은 수도원장들 그리고 신학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6월 말경 동방에서 파견된 특사가 리옹에 도착하였고, 특사는 황제의 서한을 지참하고 있었다. 황제는 이 서한에서 로마 교회의 신앙, 교황의 수위권 그리고 ꡒ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 나시다ꡓ(Filioque)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 황제는 오래 전부터 동방 교회에서 사용해 왔던 신앙 고백문과 동방 교회의 특별한 예식을 그대로 보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불가리아의 총대주교와 세르비아의 수도 대주교도 황제의 요청에 동의를 표명하였다. 6월 29일에 거행되었던 성찬 전례에서는 독서와 복음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봉독하기에 이르렀다.
7월 6일 교황은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공표하였고, 이로써 1054년 이래 계속되어 온 분열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물론 이 일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동방 교회의 백성들과 성직자들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방 교회와의 일치는 교황에게 있어서 성지의 해방이라는 자신의 두 번째 관심사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였다.
1274년 5월 18일에 속개된 공의회의 두 번째 회의에서는 십자군 운동과 관련된 재정 문제를 결의하였다. 즉 교회의 모든 수입 가운데 1/10에 해당하는 금액을 6년 동안 모금한다고 결의하였다. 공의회의 세 번째 관심사는 교회의 개혁이었다. 교회 개혁 가운데 교황 선거를 새롭게 규정해야 할 필요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 선거에 대한 새로운 규정은 촉박한 시간 때문에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몇 가지 개혁과 관련된 규정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즉 교황의 서거 후 로마에 체류하는 추기경들은 다른 추기경들이 도착할 때까지 10일 이상을 기다려서는 안 되고, 추기경들은 외부 세계와 차단된 봉쇄 구역 안에서 교황을 선출해야 하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지연되면 될 수록 추기경들은 열악한 생활 조건 아래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교황의 공위 기간 중 추기경들의 수입은 중지되어야 한다는 등의 규정이 결정되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효하게 준수되고 있는 이 규정은 공의회에 참석한 추기경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대다수에 의해 승인되었다. 공의회 폐막 연선에서 교황은 본당 사목에 대한 개혁과 교회의 쇄신에 대해 주교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15) 열다섯 번째 공의회〔비엔나 공의회, 1311~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와 더불어 대략 70여 년 동안 계속된 이른바 교황들의 아비뇽(Avignon) 유배(1305년)가 시작되었다. 아비뇽의 유배는 프랑스 국왕들에게 교황이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프랑스의 국왕 필립은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하였다. 성전 기사 수도회는 십자군 운동 초기에 성지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필립 국왕이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하게 된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필립 국왕은 아마도 성전 기사 수도회의 재산을 탐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 국왕은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하는 이유로서 그 자체 모순을 안고 있는 혐의를 지적하였다. 즉 성전 기사 수도회에 입회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비윤리적인 예식을 치러야 한다는 혐의 때문에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1307년 10월 13일 프랑스에 거주하던 모든 성전 기사 수도회원들은 체포되었고, 고문을 통해 혐의 사실을 자백하도록 강요받았다. 더 나아가 교황은 모든 국가의 성전 기사 수도회원들을 투옥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강요된 자백에 대한 진상을 알고 나서 성전 기사 수도회를 겨냥하여 취하였던 모든 조치를 취소하였다. 하지만 필립 국왕은 양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전 기사 수도회를 겨냥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교황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1310년 10월 1일 비엔나에서 소집될 공의회에 성전 기사 수도회를 소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공의회는 막상 1311년 10월에 소집되었다. 120여 명에 이르는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을 포함한 300여 명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1311년 10월 16일에 개막된 공의회에서 교황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관한 문제 해결을 공의회의 중요한 과제로 지적하였다. 그 외에 십자군 운동과 교회 개혁도 공의회의 과제로 언급하였다. 교황은 필립 국왕의 입장을 고려하여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공의회 참석자들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1312년 3월 22일에 성전 기사 수도회의 관리권 행사를 중지시키고, 이러한 사실을 4월 3일에 개최되었던 두 번째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성전 기사 수도회에 속하였던 재산은 다른 기사 수도회에 양도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국왕 필립은 이러한 조치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립 국왕은 성전 기사 수도회의 대부분의 재산을 자신이 차지해 버렸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자신의 결정을 통해 스스로 무거운 부담을 떠맡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에 관한 논의는 6년 동안 교회 전체 수입 가운데 1/10에 해당하는 금액을 모금한다는 결정으로 끝을 맺었다. 영주들은 불확실한 태도로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는 정도로 의견을 표명하였다. 교회의 개혁에 관한 논의는 본질적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5월 6일에 속개되었던 마지막 회의에서는 소수의 개혁 법령이 발표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