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운동 Kreuzzuge

  십자군 운동  十字軍運動  Kreuzzüge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사이의 갈등 – 성직 임명권을 둘러싸고 – 은 궁극적으로 교회 또는 국가 중 누가 세계의 주도권을 잡는가 하는 문제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교황은 종교의 원리에 입각해서 세계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역사는 그의 편을 들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서거 10년 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슬람의 침략에 대응해서 싸우는 유럽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칼리프 오마르(Omar)는 637년 팔레스티나를 점령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비록 제한된 조건 아래에서나마 성찬 전례의 거행과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10세기 후반 새로운 지도자가 성지 예루살렘에 대한 통치권을 이양받자 사태는 돌변하였다. 1075년 셀주크족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순례자들을 살해하였다. 그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성지의 수호를 호소하였다. 하지만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논쟁이 이러한 호소의 실현을 방해하였다.


  1086년 성지 예루살렘은 새로운 점령에 의해 공포와 전율의 무대가 되었다. 사태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클레르몽(Clermont)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첫 번째 십자군 운동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 제1차 십자군 운동 : 제1차 십자군 운동은 1096년에 출발하였다. 고트프리트(Gottfried von Bouillon)가 지도자였다. 1097년 십자군은 니케아를 점령하였고, 1098년에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였고, 1099년 7월 5일 예루살렘을 공략하였다. 즉시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교적인 왕국이 건립되었고, 고트프리트는 첫 번째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왕국은 100년을 채 넘기지 못하였다. 제1차 십자군 운동이 끝난 후 즉시 군대를 조직하여 칼리프가 정주하고 있던 바그다드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1101년 소아시아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12세기 초엽에 조직된 성전 기사단과 요한 기사단도 사라센족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견뎌 내지 못하였다. 1144년 에데사(Edessa)가 함락되었고, 그 후 왕국의 정복지들이 하나씩 무너졌다. 예루살렘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2) 제2차 십자군 운동 : 이러한 소식에 접한 후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즉시 베르나르도(Bernhard von Clairvaux)에게 새로운 십자군 운동에 대해 설교하도록 명하였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와 독일의 국왕 콘라트 3세는 십자군 운동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십자군은 타우루스(Taurus) 전투에서 터키족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잔류 부대는 지원 부대의 도착과 함께 1184년 다마스쿠스와 아스칼론을 공격하였으나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였다. 1187년 7월 4일 십자군은 하틴(Hattin)에서 에집트의 살라딘(Saladin) 술탄의 막강한 군대에 의해 대패하고 말았다. 살라딘은 1187년 10월 3일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3) 제3차 십자군 운동 : 로마는 십자군 운동을 계속 실행하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성지에 대한 유럽의 열광은 독일,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이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재확인되었다. 독일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189년 십자군을 이끌고 동방에 도착하였으며 매우 좋은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190년 6월 11일 프리드리히 1세는 실리시아의 살레프(Salef) 지방에 들이닥친 홍수에 익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수많은 독일의 십자군은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대공은 잔류한 십자군을 계속 이끌었다.


  1191년 1월 20일 프리드리히 대공은 병을 얻어 서거하였다. 서거 전 대공은 독일의 기사 수도회의 초석을 다져 놓았다. 대공의 서거 후 프랑스와 독일의 십자군이 성지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십자군 내부의 불화로 인해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191년 6월 말경 프랑스의 십자군은 그때까지 잔류해 있던 독일의 십자군과 함께 성지를 떠났다. 1192년 9월 1일 영국의 십자군 지도자 사자왕 리처드(Richard Löwenherz)는 술탄 살라딘과 3년간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요페(Joppe)로부터 티루스(Tyrus)에 이르는 해안 지역을 차지하였고 성지 순례도 가능하게 되었다.


   4) 제4차 십자군 운동 : 13세기 초엽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제4차 십자군이 결성되었고, 이 제4차 십자군에는 주로 프랑스의 기사단이 참가하였다. 제4차 십자군은 성지에 도착하기 전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는 책략을 세웠다. 1203년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고, 이사악(Isaak Angelus)을 다시금 왕으로 옹립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군대의 내부 불화로 제4차 십자군은 1204년 두 번째로 이 도시를 점령하였고, 이 도시에 서구 형태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동로마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십자군의 실수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지의 해방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서거하였다.


  5) 제5차 십자군 운동 : 1212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각각 한 명의 소년들이 등장하여 청소년을 상대로 십자군에 대한 설교가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활약의 결과 곧 4만여 명에 이르는 어린이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하느님의 보호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아무도 성지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많은 어린이들은 고된 행군의 여독으로 죽어 갔고, 또 다른 어린이들은 모하메트 교도들에게 노예로 팔렸고, 나머지 어린이들은 바다에 익사하였다.


  6) 제6차 십자군 운동 :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제5차 십자군 운동을 소집하였다. 1219년 11월 5일 에집트로 진격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새였던 다미테(Damitte)를 십자군이 점령하였다. 하지만 2년 후 다미테 요새를 다시금 빼앗겼다. 이때 치러야 했던 희생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15년 아헨(Aachen)에서 개최되었던 자신의 즉위식 때 십자군의 결성을 약속하였고, 그는 이 약속을 1220년 로마에서 있었던 자신의 황제 대관식 때 되풀이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약속의 이행을 지연시켰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제를 파문시키자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드디어 십자군의 출발을 서둘렀다. 1228년 아주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황제는 아콘(Akkon)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황제는 10년간 유효하게 지속된 휴전 조약을 술탄과 체결하였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그리고 나자렛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되돌아왔다. 1229년 3월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직접 예루살렘에 도착하였고, 1229년 5월에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휴전 기간이 끝나자 성지의 점령을 둘러싸고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었다. 성지에 남아 있던 그리스도교인들은 완전하게 패배하였다. 예루살렘은 터키족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슬람의 지배 체제는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7) 제7차 십자군 운동 : 1245년 리옹에서 개최되었던 보편 공의회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재차 성지의 해방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성지 해방에 대한 열광은 두드러지게 줄어들었다. 다만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만이 교황의 요청에 못 이겨 십자군을 결성하였다. 전투의 무대는 에집트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전투 초기에는 승리하였다. 1249년 다미테 요새도 다시금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함락되었다. 1250년 술탄의 대군이 공격해 오자 그리스도교인들은 참패하고 말았다. 루이 9세는 술탄의 포로가 되었으나, 엄청난 몸값의 지불과 점령했던 지역의 반환으로 다시금 자유의 몸이 되었다. 국왕 루이 9세는 남은 군대와 함께 팔레스티나에 도착하여 여기에서 4년간 체류하였다. 그러나 특기할 만한 전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8) 제7차 십자군 운동 :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는 제7차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튀니스(Tunis)를 점령하고자 했다. 그러나 루이 9세는 1270년 진지 안에 퍼진 전염병으로 서거하였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리옹 공의회에서 거듭 십자군 운동의 결성을 호소하였으나, 성지는 완전히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1291년 서구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콘(Akkon)마저 함락당하였다. 단지 키프로스와 아르메니아에서 그리스도교의 제후들이 지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십자군의 수많은 실패는 십자군 운동에 대한 열정을 식어 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성지의 회복을 통해 강하게 작용하였던 교회에 대한 결속력도 점점 느슨해져 갔다. 십자군의 실패로 서구의 기사단 문화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래서 내부로부터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와는 달리 이슬람의 자아 의식은 매우 고조되었고 ꡐ성전(聖戰)에 대한 이념은 승리를 통해 새로운 힘을 부여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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