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센 가문의 왕과 황제들
Sachsen, Könige/Kaiser aus dem Geschlecht der
919년부터 1137년까지 독일에서는 작센 가문 출신 공작들이 왕 또는 황제로서 군림하였다. 이들 왕 또는 황제의 군림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하인리히 1세(919~936년) : 이 시대는 이른바 ꡐ암흑기ꡑ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교황들은 로마의 귀족 가문인 크레셴티와 투스칼리니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인리히 1세는 교황사와 관련해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2) 하인리히 2세(1002~1024년) : 교황 세르지오(Sergius) 4세의 서거 후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었다. 이 두 교황은 독일의 왕에게 의지하였으나, 왕은 베네딕토 8세를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8세는 왕을 황제로 대관시키기 위해 로마로 초청하였다. 1014년 2월 14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황제로 등극한 하인리히 2세는 자신이 로마 교회의 충실한 관리자와 보호자가 될 것을 교황 베네딕토 8세에게 약속하였다. 1020년 교황은 황제 하인리히 2세의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하였고, 황제 하인리히 2세에 의해 설정된 교구 밤베르크에서 성금요일과 부활 대축일 전례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풀다(Fulda)에서 소재하고 있던 성 보니파시오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1022년 교황은 황제와 함께 파비아(Pavia)에서 개혁 시노드를 소집하였고, 사제 결혼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황제는 시노드의 결정을 제국의 법령으로 선포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8세는 1024년 4월 7일에, 그리고 황제 하인리히 2세는 1024년 7월 13일에 서거하였다.
3) 콘라트 2세(1024~1039년) : 콘라트는 1027년 로마에서 교황 요한 19세에 의해 황제로 대관되었다. 교황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황제 콘라트 2세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교황 요한 19세의 후임자 베네딕토 9세 역시 황제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교황 베네딕토 9세는 밀라노의 대주교가 황제 콘라트 2세와 다투었다는 이유로 대주교를 파문하기도 하였다. 교황들은 물론 로마 귀족들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해방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교황들은 독일의 황제들에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4) 하인리히 3세(1039~1056년) : 교황 그레고리오 6세와 하인리히 3세 사이의 관계는 처음에는 원만하였다. 1046년 하인리히 3세가 이탈리아를 원정하였을 때 교황과 하인리히는 피아첸차(Piacenza)에서 회동하였다. 이때 교황은 온갖 정성으로 하인리히를 영접하였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악화되었다. 하인리히는 교황의 정치적 신념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수트리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였고, 1046년 12월 20일 이 시노드는 교황 그레고리오 6세는 물론 대립 교황 실베스테르 3세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그 결과 교황 그레고리오 6세는 쾰른으로 추방되었고, 수도승 힐데브란트가 교황 그레고리오 6세를 수행하였다. 1046년 12월 23일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또 다른 시노드는 교황 그레고리오 6세의 퇴위를 공식화하였다.
12월 4일 하인리히 3세는 밤베르크(Bamberg)의 주교 수이트베르트(Suitbert)를 교황으로 지명하였다. 이 교황이 바로 클레멘스 2세였다. 교황 클레멘스 2세는 하인리히와 그의 부인 아녜스를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로 대관시켰다. 이때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앞으로 교황을 지명할 권리를 확보하였다. 하인리히 3세 황제는 시노드를 소집하거나 주재하였으며, 교황을 퇴위시키거나 임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개혁 세력은 황제의 이러한 간섭에 대해 처음에는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황제가 교회의 개혁을 위해 봉사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황제의 위법적인 행위마저도 묵과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서서히 일어났다. 교황 다마소 2세의 갑작스러운 서거 후 1048년 12월 보름스에서 개최된 제국 의회는 황제의 사촌인 툴(Toul) 교구의 브룬(Brun) 주교를 교황으로 지명하였다. 이 교황이 바로 레오 9세였다. 황제에 대한 교황의 종속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징후가 서서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레오 9세는 황제 하인리히 3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교황 레오 9세의 후임자 빅토리오 2세 역시 황제에 의해 교황으로 임명되었다. 빅토리오 2세는 교황으로 임명되기 전 아이히슈테트(Eichstätt) 교구의 주교와 황제의 재상으로 재직하였다.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서거했을 때 교황 빅토리오 2세는 마침 독일에 체류하고 있었다. 자신의 임종을 지켜 본 교황 빅토리오 2세에게 황제는 자신의 어린 아들 – 하인리히 4세 – 의 후일을 부탁하였다. 교황 빅토리오 2세는 우선 제국의 관리자 직무를 맡아서 하인리히 4세의 지위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다.
5) 로타르 3세(Lothar Ⅲ, 1125~1137년) : 교황권의 위치가 독일의 왕들에게로 방향을 전향한 현상은 로타르 3세의 등극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하인리히 5세의 서거 후 수플린부르크(Supplinburg)의 로타르가 왕으로 등극하였다. 로타르 국왕은 교황 호노리오 2세에게 자신의 등극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의 서거 후 다시금 이중의 교황 선거가 있었고, 그 결과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토(Anaklet)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덕택에 프랑스의 승인을 얻었다. 아나클레토 2세는 로타르에게 황제 대관식을 빌미로 자신의 교황 선출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인노첸시오 2세 역시 로타르에게 황제 대관식을 제안하였다. 로타르는 누가 적법한 교황인지 하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타르는 1130년 10월에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이 시노드에 참석한 주교들과 군주들은 인노첸시오 2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은 리에주(Lüttich)에서 로타르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 교황과 로타르는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함께 로마로 갈 것을 약속하였다. 그사이 아나클레토는 로마에서 자신의지지 기반을 확고히 다져 놓았기 때문에 로타르의 로마 여행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구나 노르만족이 아나클레토의 편을 들고나섰기 때문에 로마 여행은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1132년 8월 말경 로타르는 제국의 군대와 함께 이탈리아에 도착하였다. 노르만족의 지휘자는 봉기와 전투로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로타르와의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30년의 교황의 선출을 위한 이중 선거를 조사하기 위한 합의는 인노첸시오 2세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1132년 5월 1일 로타르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와 함께 로마로 진격하였다. 아나클레토는 천사의 성과 베드로 대성전을 장악하고 있었다. 수주간에 걸친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로타르는 아나클레토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로타르와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황제 대관식을 라테라노에서 거행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결과 황제 대관식은 1133년 6월 4일 거행되었다. 대관식 전에 로타르는 교황을 수호하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그 대신 로타르는 성직 임명권을 요구하였다. 황제 대관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타르는 독일로 귀환하였다. 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아나클레토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피사(Pisa)로 옮겼다. 그 결과 아나클레토는 계속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였고, 그사이에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지게 된 노르만족 지휘자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토 사이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분열의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로타르는 1136년 9월 말경 재차 로마 진격을 시도하였고, 1137년 5월 말경 바리(Bari)에 도착하였다. 노르만족은 평화 협정을 제안하였고, 전쟁에 지친 로타르는 이 제안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로타르는 독일로 회군하였다. 하지만 독일 땅에 도달하기 직전 1137년 로타르는 레흐(Lech)의 브라이트방(Breitwang)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 작센 가문의 왕과 황제들
Sachsen, Könige/Kaiser aus dem Geschlecht der
919년부터 1137년까지 독일에서는 작센 가문 출신 공작들이 왕 또는 황제로서 군림하였다. 이들 왕 또는 황제의 군림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하인리히 1세(919~936년) : 이 시대는 이른바 ꡐ암흑기ꡑ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교황들은 로마의 귀족 가문인 크레셴티와 투스칼리니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인리히 1세는 교황사와 관련해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2) 하인리히 2세(1002~1024년) : 교황 세르지오(Sergius) 4세의 서거 후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었다. 이 두 교황은 독일의 왕에게 의지하였으나, 왕은 베네딕토 8세를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8세는 왕을 황제로 대관시키기 위해 로마로 초청하였다. 1014년 2월 14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황제로 등극한 하인리히 2세는 자신이 로마 교회의 충실한 관리자와 보호자가 될 것을 교황 베네딕토 8세에게 약속하였다. 1020년 교황은 황제 하인리히 2세의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하였고, 황제 하인리히 2세에 의해 설정된 교구 밤베르크에서 성금요일과 부활 대축일 전례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풀다(Fulda)에서 소재하고 있던 성 보니파시오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1022년 교황은 황제와 함께 파비아(Pavia)에서 개혁 시노드를 소집하였고, 사제 결혼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황제는 시노드의 결정을 제국의 법령으로 선포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8세는 1024년 4월 7일에, 그리고 황제 하인리히 2세는 1024년 7월 13일에 서거하였다.
3) 콘라트 2세(1024~1039년) : 콘라트는 1027년 로마에서 교황 요한 19세에 의해 황제로 대관되었다. 교황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황제 콘라트 2세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교황 요한 19세의 후임자 베네딕토 9세 역시 황제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교황 베네딕토 9세는 밀라노의 대주교가 황제 콘라트 2세와 다투었다는 이유로 대주교를 파문하기도 하였다. 교황들은 물론 로마 귀족들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해방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교황들은 독일의 황제들에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4) 하인리히 3세(1039~1056년) : 교황 그레고리오 6세와 하인리히 3세 사이의 관계는 처음에는 원만하였다. 1046년 하인리히 3세가 이탈리아를 원정하였을 때 교황과 하인리히는 피아첸차(Piacenza)에서 회동하였다. 이때 교황은 온갖 정성으로 하인리히를 영접하였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악화되었다. 하인리히는 교황의 정치적 신념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수트리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였고, 1046년 12월 20일 이 시노드는 교황 그레고리오 6세는 물론 대립 교황 실베스테르 3세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그 결과 교황 그레고리오 6세는 쾰른으로 추방되었고, 수도승 힐데브란트가 교황 그레고리오 6세를 수행하였다. 1046년 12월 23일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또 다른 시노드는 교황 그레고리오 6세의 퇴위를 공식화하였다.
12월 4일 하인리히 3세는 밤베르크(Bamberg)의 주교 수이트베르트(Suitbert)를 교황으로 지명하였다. 이 교황이 바로 클레멘스 2세였다. 교황 클레멘스 2세는 하인리히와 그의 부인 아녜스를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로 대관시켰다. 이때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앞으로 교황을 지명할 권리를 확보하였다. 하인리히 3세 황제는 시노드를 소집하거나 주재하였으며, 교황을 퇴위시키거나 임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개혁 세력은 황제의 이러한 간섭에 대해 처음에는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황제가 교회의 개혁을 위해 봉사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황제의 위법적인 행위마저도 묵과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서서히 일어났다. 교황 다마소 2세의 갑작스러운 서거 후 1048년 12월 보름스에서 개최된 제국 의회는 황제의 사촌인 툴(Toul) 교구의 브룬(Brun) 주교를 교황으로 지명하였다. 이 교황이 바로 레오 9세였다. 황제에 대한 교황의 종속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징후가 서서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레오 9세는 황제 하인리히 3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교황 레오 9세의 후임자 빅토리오 2세 역시 황제에 의해 교황으로 임명되었다. 빅토리오 2세는 교황으로 임명되기 전 아이히슈테트(Eichstätt) 교구의 주교와 황제의 재상으로 재직하였다.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서거했을 때 교황 빅토리오 2세는 마침 독일에 체류하고 있었다. 자신의 임종을 지켜 본 교황 빅토리오 2세에게 황제는 자신의 어린 아들 – 하인리히 4세 – 의 후일을 부탁하였다. 교황 빅토리오 2세는 우선 제국의 관리자 직무를 맡아서 하인리히 4세의 지위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다.
5) 로타르 3세(Lothar Ⅲ, 1125~1137년) : 교황권의 위치가 독일의 왕들에게로 방향을 전향한 현상은 로타르 3세의 등극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하인리히 5세의 서거 후 수플린부르크(Supplinburg)의 로타르가 왕으로 등극하였다. 로타르 국왕은 교황 호노리오 2세에게 자신의 등극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의 서거 후 다시금 이중의 교황 선거가 있었고, 그 결과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토(Anaklet)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덕택에 프랑스의 승인을 얻었다. 아나클레토 2세는 로타르에게 황제 대관식을 빌미로 자신의 교황 선출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인노첸시오 2세 역시 로타르에게 황제 대관식을 제안하였다. 로타르는 누가 적법한 교황인지 하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타르는 1130년 10월에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이 시노드에 참석한 주교들과 군주들은 인노첸시오 2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은 리에주(Lüttich)에서 로타르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 교황과 로타르는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함께 로마로 갈 것을 약속하였다. 그사이 아나클레토는 로마에서 자신의지지 기반을 확고히 다져 놓았기 때문에 로타르의 로마 여행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구나 노르만족이 아나클레토의 편을 들고나섰기 때문에 로마 여행은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1132년 8월 말경 로타르는 제국의 군대와 함께 이탈리아에 도착하였다. 노르만족의 지휘자는 봉기와 전투로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로타르와의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30년의 교황의 선출을 위한 이중 선거를 조사하기 위한 합의는 인노첸시오 2세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1132년 5월 1일 로타르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와 함께 로마로 진격하였다. 아나클레토는 천사의 성과 베드로 대성전을 장악하고 있었다. 수주간에 걸친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로타르는 아나클레토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로타르와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황제 대관식을 라테라노에서 거행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결과 황제 대관식은 1133년 6월 4일 거행되었다. 대관식 전에 로타르는 교황을 수호하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그 대신 로타르는 성직 임명권을 요구하였다. 황제 대관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타르는 독일로 귀환하였다. 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아나클레토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피사(Pisa)로 옮겼다. 그 결과 아나클레토는 계속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였고, 그사이에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지게 된 노르만족 지휘자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토 사이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분열의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로타르는 1136년 9월 말경 재차 로마 진격을 시도하였고, 1137년 5월 말경 바리(Bari)에 도착하였다. 노르만족은 평화 협정을 제안하였고, 전쟁에 지친 로타르는 이 제안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로타르는 독일로 회군하였다. 하지만 독일 땅에 도달하기 직전 1137년 로타르는 레흐(Lech)의 브라이트방(Breitwang)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