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 Sakularisation

  세속화  世俗化  Säkularisation

  넓은 의미의 ꡐ세속화ꡑ는 ꡐ속화ꡑ를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하느님께 봉헌된 인물이나 물건의 속화를 의미한다.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는 ꡐ세속화ꡑ는 교회의 허락 없이 교회에 속하는 재산이나 물건을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찍부터 특별한 의미의 세속화 현상이 교회 내에 있어 왔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결과 파생된 사건을 연상하기도 한다.


  이른바 제1차 동맹 전쟁이 종식된 후 프로이센은 1795년 바젤에서 프랑스와 분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평화 협정을 통해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상실한 라인 강 왼쪽 지역 대신 라인 강 오른쪽 지역을 보상하기로 약속하였다. 1797년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에서 체결된 평화 협정에서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2세는 라인 강 왼쪽 지역으로부터 퇴각할 것을 프랑스에 약속하였다. 그리고 제후들의 세속화를 원칙적으로는 인정하였다. 1801년 루네빌레(Luneville)에서 체결된 평화 협정에서 퇴각은 실현되었고 세속화는 종결되었다. 평화 협정 제7항은 독일의 제후들이 상실한 라인 강 왼쪽 지역 대신 라인 강 오른쪽 지역 – 성직자의 소유 – 을 보상할 것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보상 계획은 1803년 2월 25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0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직자들이 소유한 지역 이외에 참사회와 교구의 소유 지역도 제후들에게 양도되었다.


  이러한 세속화의 형태로 거의 모든 수도회들이 해체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독일에서 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교회의 전 조직이 파괴되었고, 교구와 참사회는 해체되었으며, 교회의 행정은 혼란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제후들과 국가의 약탈 행각으로 독일의 경우 4개의 교구가 없어졌고, 18개의 교구와 약 80여 개의 대수도원, 200여 개의 수도회, 18개의 가톨릭 대학교, 수도회가 운영하던 수많은 고등학교와 기타 교육 기관들이 해체되었다. 일반화시켜 말하자면 프랑스에 의해 손실을 입은 제후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였다. 즉 프로이센은 5배, 바이에른은 7배 그리고 뷔르템베르크는 4배의 재산을 획득하게 되었다. 특히 수도회에 대한 약탈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수도회는 부패된 상태에 직면하고 있다는 구실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 대부분의 수도회는 정신적으로 쇄신의 삶을 영위하였고, 최선의 방법을 통해 재산의 관리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1803년의 세속화 이후 독일의 교회는 완전히 마비 상태에 직면하였다. 공석이 된 주교좌는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주교들은 부분적으로 국가 교회에 항복하였으며, 신자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되어 버렸다. 수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소수의 수도자들은 이른바 ꡐ집단 수도회ꡑ에 수용되었다. 모든 재산을 빼앗겨 버린 교회는 국가의 보조금에 의존하는 처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가톨릭교리자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