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진성사의 역사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성령이 계심을 믿고 또 공동체 그 자체가 영에 의해 인도되고 힘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령은 교회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영(성령)을 받아들이는 의식(Ritus)을 세례라고 믿었다. 세례를 통해 백성은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되며, 악령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이들이 하느님의 영을 또한 받는 표징이었다.(초대교회에서 성령을 받는 예식은 세례였다.)
그리스도교는 또한 이교도에서 유대교로 개종하던 이들에게 행하던 의식의 골격을 받아들여 입문예식을 고유하게 발전시켰다. 여기서 그리스도교 세례는 단순한 물의 예식에서 기도와 목욕과 성찬거행에서 절정에 달하는 태동기의 세례보다는 훨씬 복잡한 세례 예식으로 발전한다. 200년 경 전 로마 제국에 퍼진 그리스도교는 대부분 영적 재생을 상징하는 물의 세례와 성령의 수여를 상징(안수)하는 덧붙여진 의식을 포함하는 입문예식을 거행했다.
이 첨가된 예식을 물의 세례 후에 거행하던 지역도 있었고, 또 다른 지역에선 물의 세례 전에 거행하기도 하였다. 시리아 지역에선 물의 세례 이전에 안수와 도유의 예식이 있었지만(주교의 온 몸 기름바름에 남자는 남자부제가, 여자는 여자부제가 도왔다. 그 후에 물로 다시 씻었다 ; 요한 금구 – 세례 이전의 도유), 대부분의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성령께서는 물의 예식 동안 지원자에게 내린다고 믿었다.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다른 동방교회와 로마와 카르타고의 서방교회에선, 3세기 기록에 의하면, 물에서 지원자가 나온 이후에 주례자인 주교에 의해 수행되는 여러 행위들이 내포된 입문예식들이 거행되었다. 어떤 지역에선 한 손이나 두손으로 한사람 한사람마다 안수하기도 하고, 전체에게 안수하기도 하고 성수 없이 이마에 십자표시를 하기도 하였고, 다른 곳에선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기도 하고 이마에 기름으로 십자표시를 하기도 하였다. 이 둘의 예식(안수(교회론적 의미가 강함)하고 기름바름)을 모두 행하고 평화의 입맞춤까지 하기도 하였다.
왜 주교가 안수를 하였나? 대개 주교의 안수는 신약성서에 기술된 사도들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모방하는 것으로서 지원들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상징적 행위로 보여지고, 기름을 붓는 것은 세례 예식을 통해 지원자들이 받는 성령의 도유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사용되는 기름은 동방에선 Myrrh(몰약) 향이 섞인 Myron을, 서방에선 Balsam 향이 섞인 “크리스마”유를 사용하였다.
교부시대에 교부들은 이런 상징들을 각자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였다. 3세기 카르타고의 치쁘리아노는 “새로이 세례 받은 이들은 교회의 (우두)머리(주교)한테 인도된다. 그(신자)는 우리의 기도와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받고, 주님의 표시로 완성된다”(서간 73,9)라고 하였다(안수=성령받는다는 표현). 4세기 예루살렘의 치릴로 교부는 신영세자들이 세례에서 성령에 의해 성화되었다는 표징으로 이마, 귀, 코, 가슴에 도유받는다고 하였다(Mystagogical Catechesis Ⅲ, 2).
서방 교회 신학자들은 3세기에 들어서면서 상징 행위 하나 하나에, 또 예식 단계마다 영적 효과들이 발생됨을 부각시키려 노력한다. 떼르뚤리아노는 물의 세례로 영적 재생을 받고 안수로 성령을 받는다고 하였다. 3세기 후반 로마의 꼬르넬리오는 성령은 영세자의 이마에 주교가 십자 표시(Cognificatio)를 함으로써 임한다는 것을 암시하였고, 314년 아르스 공의회(Conc. Arelatense)는 이단자에게 재세례는 금하지만, 잃었던 성령을 다시 받기 위해선 두 번째 안수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성사론에 관하여ꡕ에서 입문예식 안에서 성령의 두 가지 작용을 보았다. 세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물과 성령을 통해 재생과 용서를 받고, 주교의 안수로 그들은 이사 11,2-3에 열거된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를 받는다고 하였다(이것이 후에 로마 견진 신학 안에 확고히 자리 잡음). 아우구스띠노 교부는 도유와 안수 이 둘 모두를 알고 있었지만, 성령의 인호를 주는 것은 크리스마 성유라고 보았다. (인호가 주어지므로 다시 못 받는다. 그러나 안수는 반복 가능하다고.) 안수는 주교에 의해 교회에 받아들여지고 교회에 결합되는 표징이므로 이교자나 열교자들에게는 안수가 반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여기서 우리는 성령 수여에 대해 안수에서 도유로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여튼 처음 4세기에 있어 그리스도교 입문예식 어느 시점에 성령을 받는지에 대해선 견해들이 일치하지 못했다. 모든 교부들이 동의하는 것은 예식의 끝맺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는데, 어떤 이들은 물의 예식에서, 다른 이들은 물의 예식 그 이후에 성령을 받는다고 하였다.
교부시대 절정기엔 그리스도교 입문예식은 기도와 축복, 구마와 도유, 물의 예식과 도유나 안수와 같은 예식들로 구성되었고, 주교에 의해 거행되었다. 주교는 교회의 우두머리이고 주교와의 결합은 교회와의 결합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주교의 현존은 중요했다. 그러나 모든 지역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동방교회의 경우 사제가 주교의 이름으로 거행하기도 했다. 단, 이때 주교가 사용한 미론을 꼭 사용했다. (치쁘리아노 : “신부가 가능하나 병 회복되면 주교에게 가야한다”고)
하지만 주교가 모든 입문예식을 주재하지 못하게 되는 세 가지 요인들이 발생하게 된다. 첫째, 4세기 후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되고 난 뒤 신영세자들의 모든 세례를 주교가 주재할 수 없게 된다. 둘째, 아우구스띠노의 원죄교리와 유아세례가 보편화되면서 유아세례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였다(원죄 때문에 유아도 유아세례 받아야 한다고). 당시에 주교좌에선 일년에 한 두 번밖에 세례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아세례는 다른 교회(주교좌 성당이 아닌 성당)에서 거행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선교사들이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북유럽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주교는 극소수만이 파견되었다. 그 결과 자연히 선교사들을 주교가 부재한 상태에서 세례를 베풀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세례는 신부가 베풀게 되었고, 주교가 세례가 완성되었다는 의식을 행하게 되는데, 그 의식은 안수에서 도유 혹은 기름으로 십자표시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동방교회에서도 안수가 도유로 바뀌었고, 이전에는 세례 후의 의식이 없던 시리아와 같은 지역에선 세례 전 도유가 세례 후의 도유로 바뀐다. 여기서 Confirmatio 라고 부르는 예식이 생기게 된다.
Confirmatio 라는 말은 439년 Riez 와 441년 Orange 공의회 때 신부가 신영세자에게 축성된 성유를 도유할 수 있다는 허락을 주면서, 주교들은 신부들이 베푼 세례를 안수로 Confirma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촌락을 방문하도록 지시하는 데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460년 경 Riez 의 Faustus 주교는 성령강림절 설교에서 Confirmatio 는 세례 받은 이를 더욱 충만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그는 세례에서 성령은 새로운 생명을 주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모든 이에게 반드시 필요하고(견진은 소홀히 됨: Confirmatio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Confirmatio에서 성령은 성인(成人)이 죄와 악마를 대적하여 싸우는 데 필요한 그런 부수적인 힘을 준다고 설교하였다. (왜?: 시골 신자들은 준비와 참석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7세기엔 스페인이나 대부분의 이태리 지역과는 다르게 로마에선 크리스마 성유로 십자표시하는 것은 주교에게 유보되었고(로마의 관행), 선교사들은 이 관행을 영국으로 전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도 크리스마 성유로 십자표시하는 도유는 받지 못하게 된다.)
카알 대제는 로마의 관행을 자신의 제국 안에 도입하게 된다. 784년 자신의 제국 안에서는 로마의 성사 예식서에 따라 전례가 통일되도록 명하게 된다. (로마에서는 주교에게만 유보되어 있었다. → 많은 저항을 받았다.) 그래서 불란서에도 크리스마 성유로 십자표시를 하는 것이 주교에게 유보되게 된다.
견진의 신학적 뒷받침 작업은 9세기에 들어서 두드러진다. 800년에 들어 불란서 성직자들은 황제와 귀족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자신들의 권한과 세금모금의 특권이 좁아지게 되고 위협받게 된다. 여기서 자신들의 권한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들 가운데 자신들이 누리는 지위나 특권은 로마교회의 공적인 관행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방편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문서를 위조하기도 하였다. 이 문헌 속에는 어떤 것은 교황들과 교부시대의 공의회의 문헌으로 위조해서 진짜처럼 만든 것들도 이었는데, 그 가운데 성사 집전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그 성사 규정들 가운데는 Faustus의 성령강림 연설에서 취한 것도 있고 우르바노 교황(3세기)과 멜키아데스 교황(실존 인물이 아님)으로부터 전수되었다고 하는 문헌도 있었다. 우르바노 교황의 문헌이라고 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된 부분도 있다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충만하게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세례 후 주교의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멜키아데스 교황의 것이란 위조문서에선 견진의 직무자가 세례의 직무자보다 더 높은 직무에 속하기 때문에 주교의 Confirmatio 가 세례보다 더 높은 품위를 가진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물의 세례의 샘에서 성령께선 결백함을 회복해야 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지만, 견진 후에는 더 많은 은총을 준다. 세례에서 우리는 새 생명으로 탄생하고, 세례 후에 우리는 투쟁을 위해 견고해진다. 세례에서 우리는 씻음을 받고, 세례 후에 우리는 강해진다.” 끌레멘스 교황으로부터 전해진 문헌이란 곳에선 세례와 똑같이 견진이 필요함을 말하고, 4세기 에우세비오 교황의 문헌이란 곳에선 안수의 성사는 오로지 사도들의 후계자들에 의해 집전되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의 위력은 위조단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고(교령화(Decretum)), 이 수집된 교령들은 전 유럽에 진짜처럼 수용되었다. 또한 법적인 구속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거기게 포함된 성사신학은 신빙성을 지닌 전승으로 수용되는 무게를 지니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독일 Fulda의 Raban Maur이란 아빠스는 새로운 견진성사의 신학을 확장시킨 첫 번째 신학자인데, 견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전파하게 하는 힘을 수여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9세기말부터 견진성사의 스콜라 신학의 기초가 놓여진다.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 주교가 집전하던 로마의 견진 관행은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고, 견진에 관한 불란서의 해석이 가톨릭의 견해로 수용된다. 이러한 배경들, 특히 불란서에서 만들어진 규정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그라시아노의 프란치스코, 베드루스 롬바르두스)은 물론이고,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Peter L(R?)ombard 가 Sententiae(※ 1-4는 신학 요약집임)에서 짧게 견진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9세기 불란서에서 만들어진 문헌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이 문헌에서 견진은 하나의 성사이며, 견진의 효력은 힘을 부여하는 성령의 특은이며, 주교만이 집전할 수 있다고 하였다(견진을 성사로 확정짓는 결정적 문헌). Peter L(R?)ombard가 열거하는 성사들이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1274년에 있었던 제2차 리옹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곱 성사 중 하나로 견진성사를 지명했다. (1274년 2차 리옹 공의회에서 견진은 7성사 중 하나로 인정됨)
중세에 견진이 그 자체로서 받아들인다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으나,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의 견진을 안 받아들이고 있었다. 왜 견진이 필요한가? (여기서 한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견진 받지 않고도 죽은 이들이 구원된다면, 견진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답은 유혹을 받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싸움을 이기기 위해 특별한 영적 힘(도움)이 필요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성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견진은 영적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견진이 하나의 성사라면 질료와 형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질료적 측면 – 두손 안수인가, 한손 안수인가, 한 사람에게 두손 펼치는가, 여러 사람에게 두 손 펼치는가, 크리스마 도유인가, 크리스마 성유 자체인가, 형상적 측면 – 형상은 무엇인가, 주교의 기도는 무엇인가, 도유 중 표명하는 말마디는 무엇인가. ※ 지역마다 달랐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견진성사의 질료는 크리스마 성유로 도유하는 것이라고 하고, 형상은 크리스마 성유로 도유하면서 주교가 표명하는 정식이라고 했다 : “나는 너를 십자표로 표하며, 구원의 크리스마 성유로 견고케하노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노라.”
스콜라 신학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견진성사의 제정 문제였다. 세례성사가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었다면, 견진성사는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었는가? 성서적 근거를 찾기는 힘들다. 첫째로, 견진은 사도들에 의해 제정되었다고도 하고, 둘째로, 비록 사도들이 (기름)도유와 질료, 형상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셋째로,) 그들이 후계자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교시하였다. 넷째, 보나벤뚜라는 질료, 형상 의식은 사도사후 성령의 인도하에 교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다섯째,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성사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그 근거는 신약성서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요한 20,22(사도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심), 마르 10,13(아이들에게 손 얹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고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견진성사를 행하심으로써 제정하시지 않고, 약속하심으로써 제정하셨다.”(요한 16,17이 근거)
인호 문제에 대해 세례와 마찬가지로 견진성사도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다. 왜 그 성사가 되풀이 할 수 없는가? → 견진도 성사 인호 수여하기 때문이다. (다른 특별한 답이 없다.) 견진으로 주어지는 성사적 인호는 무엇인가? 세례 인호와 다른 점은? 보나벤뚜라(프란치스칸)는 “효과 면에 차이가 있고, 두 가지 인호는 동일하다.” 그리고 “상이한 신앙 상태와 관계하기 때문에 두 인호는 다르다.”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도미니칸)는 “인호를 수여하는 성사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인호들도 상이하다.”고 했다. 알베르뚜스 막뉴스(도미니칸)는 “견진 인호는 영적 전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인도하며 그리스도 왕을 닮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사 인호는 어떤 행위 수행하도록 하는 영적 능력”이며 “세례 인호를 통해 구원성취 능력을 받고, 견진 인호를 통해 영적 완성을 획득할 능력과 신앙의 원수와 싸울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라고 했다.
※ 인호는 인간의 재능을 넘어서는 것이다. 행위 수행키 위한 힘이다. 그 힘은 영적 탄생의 힘과는 다른 것으로서 세례의 인호와는 다른 것이다. 견진에서 주어지는 영적 성장의 힘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세례가 자동적으로 인간을 선하게 만들지 않는 것처럼 견진도 자동적으로 인간을 성인(聖人)이 되게 하지는 못한다. 두 경우 모두 하느님의 은총에 지속적 협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례, 견진의 인호는 인간의 협력을 요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묻는다. 견진은 효력은 무엇인가? 그 답을 제시한다. 영적 성숙에 관한 고유한 은총들을 준다. 견진의 고유한 은총은 무엇인가? 영적 투쟁에 있어서의 강화와 신앙 전파(그리고 신앙고백)에 있어서의 힘을 주는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세례에서 백성이 성령을 받지만, 견진에서 이사 11,2의 성령칠은을 받는다고 한다. (성령과 성령칠은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고 일부 스콜라 신학자들은 주장한다.)
현대의 우리는 견진의 그 성사성 자체에 대해 다시 고찰해 보아야 하겠다.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제시된다 : 스콜라신학의 근거들이 의심스럽다고(문서 위조 조작). 신학적인 의혹으로서 세례후 성령을 두 번째로 받는다?
지난 세기의 견진의 성사성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자. 20세기에는 세례성사와 효과와 견진 성사의 효과를 구분하려 하였다. (이미 암브로시오는 세례는 성령의 거주이고 견진은 성령의 일곱 가지 특은 내려준다고 구분하였다.) 1940-1950년대에 와서 견진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행위하게 해주는 성사이다. 유아기의 신자를 활동적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증인, 그리스도의 영적 사회적 메시지를 공적으로 세상에 전하는 자가 되게 한다고 한다. (중세의 견진 관행에 근거)
교회 쇄신 운동(성서, 교부, 일치, 전례) 중 하나인 전례운동(Oxford Movement, J.H.Newmann)은 중세시기 동안의 신학의 탁상공론화를 비판하면서 신자들의 삶과 동떨어진 신학과 신앙을 우리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례의 구경꾼이 아니라,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를 우리 삶 안에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성서 운동을 통해 재발견되었다.)
이같은 전례운동과 더불어 이 견진은 세례의 완성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정교회에서는 세례후 곧바로 견진 거행되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선교지역의 경우 어른 세례자가 많은 것도 그 이유가 된다. 가족 공동체, 본당 공동체 뿐 아니라 주교에 의해 견진 집전된다는 것은 주교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보편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의미하는 그 적극적인 신원의식을 충만히 받아들이는 내적 변화의 표지가 바로 견진성사라는 것이다.
역사학자인 버필은 Confirmatio는 5세기 이전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안수나 도유는 초기 교부시대뿐 아니라 사도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60년대 스킬레벡스는 “견진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성령과 더욱 심오하게 만나게 하는 교회의 완전한 신비 속으로 이 견진은 더욱더 결합시키는 성사이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연장이자 확장이므로. 칼 라너는 “세례가 수동적인 것이라면 견진은 적극적인 것”이라고 했다. “성령을 안 받은 이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세상 안에 은총의 도구가 되게 하는 상징이다.” ? “견진은 은총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표징이다.” (즉 어떠한 은총의 원인을 규명하기가 어려우므로 성령의 표징으로 보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에 의해 받은 힘으로 살아가라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표징”으로 본다. 어떤 신학자는 “견진은 그리스도인 성숙을 거행하는 예식이다.” 외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성숙도 내포하고 있다.“ (개인구원→사회구원)
견진을 받는 이는 신앙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전인적 투신)이며 세상 안에서의 책임(교회의 요청에)을 지는 것이며, 세상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견진을 세례와 밀접한 관계에서 본다. 어른인 경우 세례직후에 견진을 받을 수 있다. 주교는 지원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불리어졌음과 교회의 완전한 일원이 되도록 불리어졌음을 강조해야 한다. <증인, 특은, 교회의 일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