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인 고해성사의 집전자
고해성사 예식서 1항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빌어 모든 화해는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데 있어 그 기선을 잡은 편은 하느님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자기 고유의 전권으로 죄를 사할 수 없으며 화해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구원의 성사를 설정하였다. 그리스도는 당신 신비체의 머리로서 당신 교회와 분리될 수 없도록 결속되어 있으며 항상 구원의 작용을 하면서 교회 안에 현존한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완성한 화해를 인간에게 적용시키기 위하여 역시 당신 교회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는 이 화해의 직무를 당신 교회에 위탁했다. 교회는 바오로 사도와 같이 이미 자신을 이 화해의 직무가 맡겨진 구원 공동체로서 의식하고 있었다.
성사 집전자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사의 행위자인신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역할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리스도와 교회 및 집전자의 삼각관계를 인정해야 한다. 첫째 집전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동한다. 성사는 인간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집전자의 협조를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의 행위로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객관적인 효과를 내는것이다.(예식서 9항,11항). 둘째, 집전자는 “교회의 이름으로” 행동한다. 집전자는 교회의 대표로 행동하면서 순수한 선물인 교회의 성사를 거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집전자가 신앙이 없어도 성사를 유효하게 거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성사의 집행에 있어서 최악의 조건을 규범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정상적인 경우 집전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면 당연히 교회의 신앙에 참여해야 한다.
따라서 집전자는 성사를 집전할 때 그리스도의 의향과 사랑에 일치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의 대표로서 행동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를 통해 현존하시어 죄의 용서를 실현시키시고, 참회자는 고해성사의 집전자를 통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으니 어서 돌아가 다시는 죄짓지 말라”(마르 2,5; 요한 8,11)하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2. 고백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
고해 신부는 구속의 은혜로 죄인에게 응답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불림받은 치료자이다.
고해신부는 고해자가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품으로 쉽게 되돌아 올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칠수 있어야 한다.
(1) 우선 사제가 자신 안에 내적 침묵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고백을 듣는 사제는 고백자와 하느님 사이에 좋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이 되도록 자신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사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제는 고백자가 말을 더듬거릴 때라도 고백자를 따뜻이 받아들이고 개인의 특수성과 인격의 가치를 존중하여야 한다. 고백을 듣는 다는 것은 우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신을 집중해서 잘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백자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알아듣고 고백자 자신에게 있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사제는 보다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항상 고백자의 위치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며 고백자의 말을 순전히 자기 입장에서 알아듣게 될 것이다.
(2) 사제는 고백자가 말하는 메시지에 정신을 집중해야 할 뿐 아니라 고백자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象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흔히 죄책감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는 전혀 걸맞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관념에서 비롯된다. 사제는 적절한 기회에 올바르게 고백자 안에 복음의 하느님 대신 무의식 중에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바를 지적해 줌으로써 고백자가 자신의 진면목을 바로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한다.
(3) 고해성사안에 있는 판결형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판단할 권능을 가지신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제는 단지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자에 불과하다. 만일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고백자에게 요구하는 것이지 사제가 요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판단한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로 없다.
(4) 올바른 죄의 경청은 꼭 장시간의 고백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사제는 고해성사에서 개인적인 갈등을 해결할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켜야 한다. 고해신부는 흔히 고해자의 중대한 심리적 문제를 엿볼 수 있고 이 때 이러한 문제를 고해실에서 다루어 보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성사는 본질상 하느님과 화해 함으로써 다시금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기도의식이다. 그러므로 고해자의 여러 문제를 찾아내어 그가 당면한 갈등을 해소하려는 것은 성사의 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고해성사 중에 심리학적 문제나 가정의 걱정거리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는 나중 어느 때에 사제를 방문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런 것들은 고해성사 밖에서 해야 한다. 고해성사의 시간은 고백자의 반응에 따라서는 융통성도 있어야 하겠지만 대개 개인의 고백의식에서 10분을 초과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5)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제의 듣는 능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인간 행위와 마찬가지로 듣는 행위 역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듣는다는 것은 일종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대화할 수 있으며 여러 본질적인 인간관계의 차원들을 인식할 수 있고, 들을 줄 아는 사람만이 어른다운 양심 형성에 장애가 되는 여러가지 심리학적 메카니즘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사제가 고백자의 말을 보다 깊이 경청하며 동시에 하느님을 그분의 말씀안에서 들을 수 있을 때 고백자와 사제 사이에 가로놓인 부수적인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고해성사가 영적으로 참된 자유를 주는 성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고해소에서 집전자의 내외적 준비자세
사제들은 공식으로 교회를 대표하고 사죄라는 성사적 효과를 보장한다. 그러나 그 효과를 십분 발휘하려면 사제는 지식과 숙련된 기술 및 성령의 특은을 받아야만 한다. 사제는 죄와 속죄에 관한 최근의 신학동향을 알고, 죄와 투쟁함에 있어서 주변 인간들의 상호의존성을 유의하여야 한다. 즉 전체 공동체가 이 화해의 성사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총동원하고 선용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1) 기도 : 지혜를 구한다. 죄스런 행위가 저질러지는 원인과 영혼의 병을 고치는데 효험있는 처방을 알아낼 지혜를 주십사 하고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구한다. 하느님의 눈으로 참회자를 바라보고 그에게 하느님의 온정과 근심을 전해줄 만한 사랑을 갖게 해주십사 기도한다. 사제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느님과 사람의 이 만남을 강화하기는 커녕 둔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 성구(聖句)의 준비 : 교정이나 권면에 쓸 알맞는 성서구절을 미리 뽑아두고 연령과 경우에 따라 들려준다.
(3) 한가지 구체적 변화를 제시: 고해자와 의논하여 하느님이 그 시점에서 본인에게 가장 바라시는 변화가 무엇일지를 알아낸다. 한 인간이 동시에 두세갈래 길을 걸어나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4) 훈화는 기도의 형식으로: 고해자의 생각을 깊게 하려면 설교조의 훈화 대신에 그와 함께 기도를 올린다. 그에게 꼭 소용되는 은총을 빌어주고 하느님이 교회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품게 할 것이다. 그 감동어린 기도는 몇해 동안 응어리진 죄의 관습을 당장 녹일 수도 있다.
(5) 안수 : 고해틀이나 창살로 막혀있지 않으면 고해자에게 손을 얹고서 사죄경을 염한다. 전통적으로 성령의 강림을 비는 이 동작은 새 전례에서 부활되었다.
(6) 감사의 기도와 인사 : 교회가 용서를 빌어준 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릴 것이다. 고해자가 기쁨과 희망을 갖고서, 하느님이 자기를 사랑으로 받아주셨음과 삶의 방향을 바꿀 은총의 힘을 주셨음을 느끼면서 고백실을 물러가게 하는 것이 마무리로써 현명하다.
4) 야고보서의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 질 것입니다.”(야고 5,16)라는 말씀의 의미는 ?
“매고 푸는 권한”(마태 18,15-18)은 예수께서 12제자 그리고 그 후계자까지 생각해서 말씀하셨다고 보기는 힘들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예수께서 각 개인에게 별도로 사죄권을 주셨다는 견해를 부정했고, 성 토마스에 의하면 공동체가 사죄권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공동체의 책임에 역점을 두고 죄를 신인관계와 대인관계를 끊어버리는 행동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를 용서받는 장소, 용서를 베푸는 장소로 보아야만 문제가 해결된다. 교회는 일단 화해의 장소이다. 그 다음 단계에 이 화해의 장소에서 누가 사죄권과 화해직무를 행사하는가 하는 부차적인 문제를 보아야 한다. 화해를 거행하는 공동체 안에서 화해를 행사하는 자는 그 공동체의 장상들이다(요한 20,23; 마태 16,19; 1고린 5,5; 1디모 1,18-20). 예식서는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맡겨준 봉사로써 참회자의 회개와 사죄의 도구역할을 한다”(8항)고 하면서 이의 성서적 근거로써 마태오 복음 18장 18절과 요한 복음 20장 23절을 들고 있다. 특히 공동 사죄경을 보면 사제의 화해직무의 공동체성이 잘 드러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어 사죄하는 권한을 맡겨 주셨으니 몸소 우리의 직무 수행으로 이 교우들을 악에서 구하시고 이 교우들에게 성신을 충만히 부어주소서”(62항) 이렇게 볼때 참회의 봉사자로서의 사제는 그가 받은 거룩한 직무상 고해성사가 지니는 교회적 성격을 보증하는 증인과 대변자로 나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