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마르코 복음에서 나타난 마리아
공관복음서 모두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는 사건을 전해주는데, 마르코 복음의 묘사는 좀 거칠다고 하겠다. 즉 마르 3장 21절에 의하면 예수의 친척들은 그분을 붙들러 나섰는데, 왜냐하면 그분이 정신나갔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에게 예수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여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내게는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33-35).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거리를 두는 듯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반마리아적 경향을 이끌어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마르코의 근본 신학 사상을 배경으로 이 대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코는 마리아나 예수의 제자들을 악평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복음사가의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마르코는 평소에도 늘, 감추어져 있던 예수의 영광과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즐겨 강조했는데, 이러한 취지에 상응해서 마르코는 예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의 본연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였음을 여기서 더욱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다”.1)
이와 함께 마르코는 신앙상으로 제자의 신분이 예수와의 육친적인 관계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또 다른 한가지 관심이 그를 이끌고 있었는데, 그것은 안과 밖의 대비에 기초를 둔 것이다. 즉 혈연관계로써 예수와 유대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예수께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한가지만으로는 여전히 밖에 머무를 뿐이다. 비로소 그의 발밑에 앉아 있을 때, 또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모인 집안에 있을 때에만(20절)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는 자세를 통해서 예수와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와의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다. 누구도 특권을 갖고 다른 사람을 앞서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하느님의 가족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 말해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친척의 명칭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에 입각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는 친(親) 마리아적도 반(反) 마리아적도 아니고 다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2)
예수의 혈통에 대해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고향 나자렛을 찾았을 때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 “이 사람은 고작 장인(匠人)이며, 마리아의 아들로서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또한 그의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지내고 있지 않은가?”(마르 6,3 병행). 요한 6장 42절에서도 예수께서 유다인들과 논쟁을 벌리는 사건을 통해서 그의 혈통에 대해서 언급되는데, 여기서는 마르코 복음과는 달리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마태오와 루가복음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서 “이 사람은 장인(/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루가 4,22)하고 묻는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 사람은 고작 장인이며,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마르 6,3)하고 묻는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아버지는 아니고 어머니만 지칭되고 있는 것은 이때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그 이상의 결론을 이끌어 내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마르코가 이런 표현을 통해서 요셉이 육신적으로 예수의 아버지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성서학적으로 확실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마르 6장 3절은 예수의 혈통만이 아니라 그의 형제와 자매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참조: 마르 3,31-35; 마태 12,46-50; 13,55; 루가 8,19-21; 요한 2,12; 7,3-5; 사도 1,12; 1고린 9,5; 갈라 1,19). 후대에 이르러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과 이 구절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지만, 신약성서는 이 질문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형제와 자매”라는 말은 성서시대에 친 형제 자매일 수도, 그러나 사촌 형제와 자매를 뜻할 수도 있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신약성서 어디에도 마리아(혹은 요셉)의 아들과 딸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마르 15장 40절과 요한 19장 25절을 연결지어서 예수의 형제와 자매란 말은 단지 사촌관계를 지칭하는 것임을 입증하려고 했다. 마르코는 예수의 십자가를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다고 전하고, 요한은 십자가 곁에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 글로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고 전한다. 이 두 구절을 연결지어서 예수의 이모인 마리아가 예수의 형제들이라고 일컫는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정당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假說)로서 역사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확실성을 얻을 수는 없다.
마태 1장 25절의 “요셉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와 동침하지 않고 지냈다”는 대목을 나중에 요셉이 아내와 동침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나 루가 2장7절에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았다”는 표현이 마리아가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모두 본문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아람어, 히브리어, 그리스어에서는 “…때까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뒷날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울러 이 문장은 성서 주석의 상식에 따라 문맥을 고려해서 풀이해야 한다. 앞 문맥을 보면 마태오는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고 낳았다는 데에 관심을 쏟았을 뿐, 예수 탄생 후에 양친이 부부관계를 맺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흥미조차 갖지 않는다.3)
마리아의 지속적인 동정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최초의 기록은 외경(外經)에 속하는 야고보 제1 복음 19장인데, 그에 따르면 예수의 형제와 자매는 요셉이 첫결혼에서 얻은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외아들이든 장남이든 아들을 처음으로 얻으면 하느님의 차지로 간주했다. 하느님 차지인 첫아들을 부모가 사서 기른다는 뜻으로 부모는 첫아들이 나면 한 달 안에 성전 비용으로 다섯 세겔을 바쳤다(출애 13,2.12-13.15; 34.20; 민수 3,12-13; 18,15-16). 이런 맥락에서 루가 2장 7절의 첫아들이란 표현은 하느님 차지의 아들이란 의미로 알아들어야지, 이 구절을 논거로 해서 예수님 다음에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