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딸, 마리아론의 성서적 위치

 

제 1 장 마리아론의 성서적 위치


신약에서의 마리아상은 구약의 실마리에서부터 형성되었으며, 여기서 마리아의 신비가 두, 세가지의 전통의 실마리로 구분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구약의 위대한 어머리상(사라와 한나)이 마리아의 묘사에 수용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예언자들이 간택과 계약의 신비, 즉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시온의 딸로 진술함으로써 시온의 딸에 관한  전신학이 구성되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요한 복음에서 하와의 형상인 ‘여인’이 마리아와 관련되어 해석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리아 신심과 마리아 신학은 근본적으로 구약성서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유일성을 증거하기 위해 다신교의 유혹에 대항하여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투쟁은 구약 문학에서 ‘간음’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예배는 일차적으로 남자의 일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구약 신앙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론이 성서의 모델 이외의 유래에서 이해되었다는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로 증거했고 옹호했던 것이다.


신약에서 신학적으로 의미한 마리아像의 요소를 구약에로 소급해서 생각할 수 있다. 거기서 여성신학을 위한 세 가지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하와의 상을 들 수 있다. 하와는 남자, 즉 아담의 필연적인 상대 존재로 묘사되고, 하와 없이는 아담은 불행하다. 하와는 흙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아담 자신에게서 만들어 진다. 갈비뼈 사화에 나타난 남녀관계는 상호 내적 지향을 뜻하며, 이러한 남녀의 내적 지향은 전인(全人) 완성의 길을 말한다.


둘째, 구약의 계약사에서 조상들이 역사의 고유한 책임자로서 전면에 부각되지만, 어머니들 또한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상들의 역사 속에서 사라-하갈, 라헬-레아, 그리고 한나-브닌나는 계약의 특수성을 갖는 한쌍의 여인들이다. 매번 잉태와 불임은 그들의 주변에서 상반적으로 놀라운 횡적 가치를 보여준다. 잉태는 원초적인 의미에서 축복을 뜻하며, 불임은 저주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사실의 전환점이 주어진다. 마지막에는 불임은 진실로 축복받은 것으로서 증명되며, 반면 잉태는 통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거나 또는 배척의 저주에 대한 투쟁으로까지 묘사된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성모의 노래는 그런 뜻에서 한나의 노래를 은총의 신학으로 새로이 발전시킨다. 그러나 또한 동정성의 신학은 그러한 가치 전환의 핵심으로서, 세속적 불임은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잉태가 된다.


셋째, 구약의 경전들과 구약의 후기 문서들에서 여성신학에 관한 기본 예형이 새롭게 전개된다. 에스델과 유딧은 위대한 구원자상을 판관인 드보라상에서 구체화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전승의 수용이다. 두 여인은 위대한 어머니의 본질적인 특성을 지닌다. 즉 이스라엘 여인은 사제는 아닐지라도 예언자로서, 판관으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상과 신앙을 통해 형성되어진다. 예언자로서, 판관으로서 그리고 구원자로서의 여성의 특성은 여성이 존재해야 할 위상의 표현이다.


넷째, 구약의 문학적-신학적인 구원자로서의 여성상은 이스라엘 자체가 여성으로서, 동정녀로서, 애인으로서, 아내로서, 동시에 어머니로서 설명되어진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여인들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대리하고 있다. 이러한 여인들의 역사는 바로 하느님 백성의 신학이 동시에 하느님 백성을 통한 계약의 신학이다. 따라서 시온의 딸이고 여인인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속하며, 신학 전체에서 여성이 제거된다면 창조와 간택이 부인되고, 계시도 더불어 중단된다. 이스라엘 여인들에서, 어머니들에서, 구원의 여인들에서, 또 그들의 풍요로운 불임에서 창조와 간택과 하느님 백성의 본질인 이스라엘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깊이있게 표현된다. 간택과 계시가 일치되기 때문에 그러한 일치 속에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본질과 실존이 비로소 존재의 심연 안에 드러난다.


다섯째, 구약의 후기 관점에서, 지혜(Sophia)의 형상이 중심적 의미를 얻는다. 지혜는 창조와 구세사의 중재로서 하느님의 첫 피조물로 등장한다. 지혜는 하느님의 첫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의지이며 순수한 원형인 동시에 순수한 응답이다. 이러한 응답의 개념이 곧 구약의 지혜이념이다. 이러한 지혜는 실제적 측면에서 여성을 통해서 묘사되고 있다. 지혜는 창조와 간택의 신적 부르심에서 도래된 응답이다. 따라서 그 응답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최종적 안식처를 발견한다. 또한 신약과 관련된 지혜는 하느님 창조의 말씀인 아들을 말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피조물, 즉 진실한 이스라엘을 말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겸허한 여종안에 인격화되었고, 그러한 여종의 전존재는 “당신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소서”(Fiat mini secundum verbum tuum)의 자세로 있음을 뜻한다. 지혜는 지혜를 근거로 한 말씀, 즉 로고스(Logos)를 뜻하지만, 그러한 지혜도 지혜를 수용하고 잉태케 하는 여성의 응답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지혜학(Sophiologie)에서 마리아적인 것을 단절시키는 것은 결론적으로 성서적 전차원과 그리스도적 전차원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여성적인 것-구체적으로 마리아적인 것-을 부인 또는 거절함은 궁극적으로 창조를 부정하는 동시에 은총의 실현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과 단절은 하느님의 독자적 행위의 표상에서 기인된 결과이며, 그러한 하느님의 독자적 행위가 일방적으로 피조물을 초대한다는 데서 바로 성서의 하느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제 2 장 교회의 마리아 신앙


마리아론은 新婦로서 하느님 백성의 예언자적 신학에 일치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신약에 있어서 마리아 신앙은 루가와 요한에 의해서 구약의 신앙으로부터 구성된다. 그리스도의 새로움이 말씀과 삶, 고통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라면, 마리아는 침묵하는 이, 믿는 이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난한 이들에게서 실현된 항구성을 구체화시킨다.


마리아론은 단편적으로 신약의 요소에서만 구성될 수 없다. 오히려 세가지의 중요한 마리아 교의들은 정신적 후기 완성으로서 그 자체 안에 성서의 근거를 확실히 하고 있다.


첫째,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교회의 마리아 교의는 “마리아가 동정녀이며, 어머니이다”는 것이다. 동정녀와 어머니는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면 그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적 존재와 인간적 존재의 일치를 표현한 것이다. 마리아의 모성은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에 깊숙히 관여되어 있으며, 또 신비 자체 속으로 깊이 파고 든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 육화에 관한 그리스도론적인 교의는 필연적으로 마리아론적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론을 축소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둘째, 하느님 백성의 신학과 마리아의 새로운 모성 안에서의 그 신학의 완성의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마리아의 무죄성에 대한 확신은 마리아를 특별히 간택하신 것으로서 천천히 발전한다.


셋째, 마리아의 무죄성에 대한 고백은 마리아가 아들의 부활에 동참한 것과 그 아들의 죽음의 정복에 동참한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1. 마리아 근본교의: 동정녀이며 어머니


가. 신약성서의 텍스트들


루가의 마리아상에 대한 표현의 중요한 동기는 마리아에게 한 천사의 인사에서 나타난다. 마리아에게 하는 천사의 인사는 스바 3, 14-17과의 밀접한 관계속에 나타난다. 마리아는 기뻐하라는 부르심을 듣고, 주께서 그녀에게 임하시리라는 말을 듣는다. 마리아는 천사에 의해 호칭된 시온의 딸이다. 그녀의 두려움은 하느님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헤아일 수 없는 기쁨의 전율이며, 그 무한한 기쁨은 굳어있는 본성을 감동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역사의 처절한 무상속에서 희망이 시온을 향하게 하는, 인격 안에서의 참된 시온이다. 마리아만이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를 그 안에 일치시킨 진실한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하느님 자비의 힘을 입어 결실을 맺는 ‘하느님 백성’인 것이다.


또한 새로운 잉태와 출생의 신비가 심오하게 진술된 구절(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들을 살펴보면, 두 개의 상징이 말로 표현할 수없을 만큼 신비스럽게 드러난다.


첫 번째 상징은 창조사를 묘사하며, 창조의 과정을 새롭게 표현하고 있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정신이 심층에 깔려있고, 만물의 근원이신 하느님이 창조주의 정신을 통해 낡은 것을 새롭게 창조한다. 그럼으로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임하심을 뜻하는 철저한 쇄신은 존재의 근원에까지 미치며, 하느님의 창조력 자체에서만 유래할 수있으며, 다른 어떤 곳에서도 유래할 수가 없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라는 두 번째 상징은 이스라엘의 경신신학에 속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막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드러나지 않은 현존이 작용하는 거룩한 장막으로 묘사된다.




나. 신학적 의미


동정녀에게서의 출생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에 대한 희망에 영속적이고도 이스라엘을 초월한 무한한 의미를 주시는 그분에게 필요한 원천이다. 이러한 새로운 출생은 세속적 잉태를 단념하는 동시에 자기 삶을 양도하고 자기 계획을 단념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은 여인이고 어머니로서 우연한 육적 사건의 도구만이 결코 아니다. 아들을 잉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마리아는 자신의 불임의 의미를 가르친다. 즉 불임이 잉태의 조건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에 의해서 구약의 어머니들의 신비가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며, 그리스도교의 동정성의 의미가 마리아의 동정성을 통해서 보존됨을 알 수있다.


그러나 오늘날 동정녀에게서의 예수 출생을 확고하게 부정하는 것은 역사적 문제들을 통해서 해명될 수 없다. 역사적 물음을 갖는 중요한 이유는 다른데 있다. 즉 그 이유는 성서의 진술에 대한 우리의 세계상의 차이에, 그리고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되는 세상에서는 성서의 진술이 아무 자리도 발견할 수 없다는 관념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 당시처럼 동정녀로부터의 출생이 사실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불가능에 대한 증거를 어느 누구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에로부터의 예수 출생에 관한 진술은, 하느님은 단순히 해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행하시며, 땅은 하느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다는 두 가지 사실을 증거한다.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의 출생’은 근본적으로 엄격한 신학적 진술이다. 그 진술은 하느님이 창조를 포기하시지 않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희망, 자유, 인내, 책임이 근거한다.




2. 아담의 죄로부터의 해방


로마서 5장은 구약의 예형학적 해석이다. 원죄는 아담의 예형 안에서 인식할 수 있으며, 역사의 전환점들에서의 아담의 예형의 회귀에서 인식될 수 있다.


원죄는 인간에 있어서, 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자연적 결핍의 진술이 아니라 신-인(神-人)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는 관계의 진술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무엇이 죄인가 하는 것은 폐쇄되고 고립된 인간에서 이해될 수 없으며 관계의 인간학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죄는 하느님을 통한 인간 평가의 진술이다. 물론 분명히 이 평가는 인간에 있어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것을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죄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 창조주의 의지와 인간의 경험적 실재 사이의 모순이다. 즉 원죄에서의 마리아의 자유로움은 하느님의 ‘있음’(Ist)과 인간의 ‘있지 않음’(Nicht-Ist) 사이의 모순이 마리아에게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마리아 자신이 하느님께 대해 순수하게 긍정적으로 응답하고 있듯,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판단이 순수하게 긍정적임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긍정과 긍정적 응답으로서의 그녀의 존재와의 일치, 그것이 원죄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원죄에서 보호되었음은 특별한 유능함이나 업적을 뜻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원죄에서 보호되었다 함은 마리아가 자기의 존재, 삶 그리고 의지를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하느님께 진실히 봉헌했음을 뜻한다. 수용으로서의 은총은 신뢰로서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또 다른 관점에서 불임의 잉태의 신비, 불임 어머니들의 역설과 동정성의 신비가 명료해진다. 즉 그것은 자신을 내맡김으로서의 수용, 새로운 삶의 장소로서의 수용이다.


무염시태 교의는 성교회가 인격으로서, 또 인격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에 대한 확신의 궁극적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염시태 교의는 교회의 구원확신성에 대한 표현이며, 무염시태 교의에는 하느님의 계약은 이스라엘 안에서 파괴되지 않고, 번영과 구원자가 도래하는 기원이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한 앎이 속한다. 이로써 무염시태 교의는 하느님 은총이 응답을 일깨우는 것으로 강한 위력이 있음을 증거한다. 은총과 자유, 은총과 자립 그리고 단념과 실현이 피상적으로 상호 모순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하며 또 허락함을 입증한다.




3. 하늘의 영광 안으로의 육적 수용


1950년 교의문서에 관한 텍스트는 마리아와 관련해서 ‘부활’을 논하지 않고 다만 하늘의 영광 안으로의 영육의 수용을 논하였다. 여기서 진술된 내용은 완전히 공경에다 그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역으로, 공경은 그 내용을 이용하며 거기서 강력한 동기를 갖는다. 즉 공경은 살아 있는 자, 주님의 집에 거주하는 자,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 목적에 도달해 있는 자와 관련된다. 그래서 승천 형식은 공경의 내적 전제가 되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룩한 호칭 아래 행하는 모든 공경은 이제 그 전제를 향해 주님과 일치된 생활을 갖는다. 공경은 단지 공경받는 분이 살아계시고 또 재림하시는 경우에만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승천 교의는 종말론적 완성에 있어 완전하고 일치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정경인지(政經認知, Kanonization)의 최고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승천 교의가, 공경의 최고 단계에서 내적으로 전제되고 말해지고 있는 것을 내용적으로만 기술하고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면 복음 자체가 마리아 공경을 예언하고 요청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고 또 기억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루가 1, 48). 이것은 루가가, 그 시대에 이미 교회 안에 마리아 찬미가 존재했고, 마리아 찬미를 모든 사람에 대한 교회의 위탁을 생각한다는 것을 전제로 집필한 교회의 위탁인 것이다. 루가는 마리아에 대한 찬미를 엘리사벳의 인사,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 45)에서 드러내 보인다.


루가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인사를 드릴 때 요한이 태중에서 기뻐하며 뛰놀았다는 것을 진술한다. 기쁨의 표현으로 ‘뛰놀다’라는 단어는 산상수훈의 참된 여덟가지의 행복을 표현할 때도 사용하였다. 또한 귀환한 계약의 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다윗의 기쁨의 춤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인간이 되신 말씀에 대한 기쁨은 신앙의 본질이며,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친밀함을 인식한 자의, 자기 자신을 잊은 기쁨의 본질 안에서 계약의 궤 앞에서 뛰노는 기쁨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마리아의 공경은 모든 문제를 초월해서 불멸의 참된 이스라엘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기쁨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마리아 공경은 성모의 노래의 기쁨 안으로의 환희에 찬 끌어올림이며 그럼으로써, 시온의 딸 자신이 그분께 감사드리고, 또 그녀가 진실하고 썩지 않는 불멸의 계약의 궤로 생각하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가톨릭교리자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