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론 강의-조직신학적 고찰(보설)

 

4.4. 원죄에 물들지 않은 잉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 하느님의 영을 통해서 동정으로 잉태하신 어머니라는 신학적 진술은 본래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론적 차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마리아는 원죄의 흔적에 물들지 않았다는 가르침은 직접적으로 이런 역할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중세에는 상당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가 마침내 교황 비오 9세에 의해서 1854년에 믿을 교리로 선포된 이 교리는 성서에서 직접 근거를 찾을 수는 없고, 성서적으로 근거된 가르침의 사변적 전개라고 하겠다. 성서에서 직접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은 성모의 잉태 교리는 종교일치를 위한 대화에서 이해의 접근이 어려웠지만, 이 교리가 지향하는 신학적 의도를 이해하는 데에는 꼭 넘지 못할 장애물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마리아가 원죄의 결과로부터 보호되었다는 말하게 된 실마리는 이미 중세 때에 일어난 변화로서, 마리아의 동정성을 윤리적으로 이해한 데에 있다고 하겠다. 일찍이 히뽈리뚜스(+235)는 마리아가 개인적인 죄를 짓지 않았다고 확신하였다. 이런 확신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수용되고(DS 1573 참조), 나중에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의 배경을 이루는데(DS 2800), 이 확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벗어났다고 하는 죄의 본질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죄란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행위, 즉 인간 사이의 일치 관계를 손상하는 행동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인간과 하느님과의 일치 관계를 해치는 행동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마리아는 의 이렇게 이해된 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의 무죄함이란 죄에 물든 인류와 관계를 맺으려는 의향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이며 궁극적으로 표현한 하느님께 헌신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신앙적 준비 자세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마리아의 무죄한 거룩함은 일차적으로 윤리적 차원의 진술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 그분과의 결합에 자신을 개방하는 마리아의 신앙적 태도(신학적으로 이해된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증언이라고 하겠다.


사람들은 마리아의 무죄함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찾으려고 하면서 마리아가 원죄의 “흔적”, 원죄로 인한 불행한 현실에서 보호되었다는 가르침이 형성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근래의 신학적 토론에서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성모 무염시태 교리의 구체적인 진술 형태는 시대의 제약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교리는 ―아우구스티노의 원죄 이해에 따라서― 원죄는 性관계를 통해서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진술 형태는 본래의 진술 의도와 구분되어야 한다. 이 진술 의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원죄”라는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고려하면서 밝혀질 수 있다. 오늘날 원죄는 인간 개개인이 죄에 더럽혀진 세상 안에 위치한다는 인간 사회학적 차원의 실재로서 이해한다. 즉 인간은 항상 자신이 처한 삶의 場이 자신이 선이나 악에 대한 고유한 결단을 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해악에 물들어 있다는 체험(세상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기 보다는 그를 거스리는 경향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체험)을 하는데, 바로 이 체험을 “원죄”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원죄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마리아가 원죄의 흔적으로부터 보호되어 머물렀다는 교리는 한 인간에게 윤리적으로 더 놓은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마리아 역시 우리와 똑같이 해악에 물든 삶의 실재에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미래의 구세주를 위해서 마리아를 이런 해악에 물든 실재에서 특별히 보호하셨다. 이런 내용의 무염시태 교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학의 근본 주제인 하느님 은총의 선행(先行)을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하느님은 역사의 한 순간에 죄로 인한 결과에 빠져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도권을 장악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은총에 의해서(sola gratia) 새로운 인류, 즉 당신의 뜻에 개방되어 있으면서 구원에 헌신하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인류를 만드신다. 이런 하느님의 주도권에 의한 새로운 인류의 창조는 구체적으로 시간적으로 인간 마리아의 삶의 시작과 관련되어 있다. 즉 하느님은 마리아가 자기 스스로 결단을 내리기 이전에 그녀를 선택하셨는데, 마리아는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아서 자신의 신앙적 신뢰(sola fide)를 실현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1854년에 반포된 성모 무염시태 교의는 ‘신앙인의 어머니’라는 칭호, 초기 교회의 교회와 마리아의 비교, 교회의 표상으로 나타나는 묵시록의 여인을 거쳐서… 에페소서 1장이 전하는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인류가 선택되었다는 사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은총이 모든 죄보다 상위를 차지하고,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우리의 모든 반항보다도 본래적이며, 하느님께서 모든 죄를 이미 에워싸고 붙잡고 있다는 데에까지 이르른다”.1)


1854년 반포된 성모 무염시태 교리는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서”(DS 2803)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함으로써, 이 교리를 그리스도 사건의 결실로 이루어진 인류의 보편적 구원과 열결짓는다. 중세 신학자 둔스 스코뚜스에게소 소급되는 “선행 구속”(3.2.1. 참조)이라는 생각은 무염시태 교리를 신학적으로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구원을 필요로 하였고, 그녀도 “신앙의 나그네길”(교회헌장 58)을 걸어갔다. 이렇게 이해된 성모의 무염시태 공경은 마리아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된 분”으로서 구원을 위한 헌신에 불림을 받았는데, 이 헌신은 아들 예수께서 행하신 헌신과는 단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나며, 예수의 삶과 운명이 마리아의 신앙적 삶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여기서 인간의 상상력에 필연적으로 결부된 시간의 범주는 ―로고스의 선재에 관한 진술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염시태 교리가 의미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추가적인 방해 요소가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마리아의 선행구속이라는 관념은 신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사고의 측면에서는 따라가기 어렵다. 하지만 이 관념에서 우선적으로 시간적으로 “앞선”이 표현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마리아의 신앙 행동이 가능하게 하는 조건,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역사적으로 드러난 영원히 존속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대한 (초월적으로 이해된) 기억이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면 그렇게 수용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4.5. 몽소승천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의 지상 생애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그 마지막도 하느님의 행동을 통해서 거룩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DS 3903).


마리아의 승천은 예수의 승천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라틴말에서는 이 차이를 분명히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승천(ascensio)”, 마리아는 “받아들임(assumptio)”이라고 구분함으로써, 마리아의 승천에서는 하느님이 이 사건의 능동적 주체임을 분명히 한다. 마리아가 육체성과 함께 전인적으로 완성된 것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인한 구원의 주도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사건이다.




성모무염시태 교리와 마찬가지로 성모몽소승천 교리도 근래의 신학 토론에서 의문에 처해진 사고의 틀을 지니고 있다. 즉 이 교의는 사람은 죽으면 불멸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 최후 심판 때에 새로운 육신 안에서 완성되기를 기다린다는 “중간상태”의 사상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근래의 종말론에서는 인간의 부활은 이미 죽음 안에서 총체적으로 실현되는 사건, 적어도 시작되는 사건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죽은 후에 영혼만이 아니라 (비록 육체는 소멸하지만) 그 육체와 함께 하였던 모든 것도 완성에 들어선다는 것이다.2)


이런 근래의 종말론의 견해를 받아들일 때, 몽소승천 교리의 내용적 핵심은 인간 마리아의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삶,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온전하고 영원한 삶, 육신성 안에서 완성된 삶이 이미 마리아에게 주어졌다고 교회는 믿는다.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신앙적 신뢰, 하느님께 대한 헌신에 기꺼이 응하는 마리아의 태도, 이로 인한 수고와 고난이 헛되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 안에 받아들여져서 완성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리아의 몽소승천은 모든 신앙인에게 하나의 희망의 징표로 제시된다. 즉 마리아 그러했던 것처럼 하느님께 자신의 개방하면서 그분의 구원 의지 실현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은 마리아와 같이 완성에 이르를 것이다. 이처럼 마리아는 이 관점에서도 교회의 원형이 된다. 마리아에게 일어나는 일은 곧 교회의 역사가 지향하는 바이다.




보설: 성모신심과 사적계시


1. 현재의 상황


최근에 성모님의 환시나 성모상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기이한 현상을 통해서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들이 성모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메시지는 인간의 갖가지 범죄로 말미암아 노하신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박하였으니 끊임없이 기도하고 철저히 회개하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범죄의 목록에는 손으로 하는 영성체나 낙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불법적인 방법(예를 들어서 본당에서 주임신부의 허락도 없이 몰래 신자들에게 유인물을 돌리는 행동)이나 과격한 방법(신자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나체시위를 벌이는 행동)까지도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이들이 내세우는 환시, 기적, 예언의 현상에 끌려서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기도 하고, 그들 중의 일부는 이미 교회의 품을 떠나 신흥종교 형태로 확립된 조직체를 이루기도 한다.




2. 교회의 반응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에서는 1997년 9월에「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리하여 발표하면서 대비책을 모색하였다.3)


1) 이 책자는 우선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서 ‘공적계시’가 그리스도의 도래 이후 사도들을 통하여 종결되고 완성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충만히 알려주셨다. 이 계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직접 증언한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더불어 종결되었으며 완성되었다. 이렇게 ‘단 한번 영원히(semel et semper) 이루어진 ‘공적계시’는 성령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보존되고 재현되어, 온 시대의 만인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9쪽).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변화되고 새로운 상황이 도래했다고 해도 공적계시 이외에 새로운 계시를 기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4)


2) 공적 계시는 완결되었지만,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들에게 깨우쳐주고 그리스도의 정신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인도되기 위해서 이 공적계시가 더욱 깊이 이해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사적계시’ 혹은 ‘특별계시’ 또는 ‘특수계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사적계시’는 한 개인을 매체로 하지만 어떤 특정한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계시이다. 내용적으로 ‘사적계시’는 ‘공적계시’를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완성된 계시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데에 불과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순간에 특수한 방법으로 ‘사적계시’를 통해 개입하시지만, 그것은 ‘공적계시’의 내용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살도록 하려는 것이다”(9-10쪽).


3) 주교회의 문헌은 ‘사적계시’의 가능성과 의미를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예외 상황임을 명백히 한다: “‘사적계시’는 특수한 전달 방법으로 드문 방법이며, ‘공적계시’의 내용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살도록 이끌어주는 좀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방법은 교회의 전례 생활과 성서 묵상 나눔과 설교 듣기 등이다”(10).


4) 이어서 문헌은 ‘사적계시’가 실제로 하느님께로부터 유래하는 것인지를 식별하기 위한 전통적인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10). 첫째 기준은 교리적 측면으로서, ‘사적계시’의 내용이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에 따른 계시 내용과 부합되어야 한다. 둘째 기준은 심리적 측면으로서, ‘사적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주체가 균형잡힌 인격체인지 아니면 병리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진실성이 결여되고 말을 과장되게 하거나 지어내거나 경솔하게 행동한다면 일단 비판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반면 참된 겸손, 자신의 관심거리만을 찾지 않는 순종, 시련과 모함 중에도 강한 영적인 능력을 소유한 인물이라면 어느 정도 신뢰를 갖고 살펴볼만 하다. 셋째 기준은 ‘사적계시’의 주체 자신이나 그의 주변 인물들 안에서 발생하는 영적 결실들의 효과이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 5,22에서 말씀하시는 바대로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인 참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를 보인다면 일단 신뢰를 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적 결실을 거스르는 말과 행위들을 계시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3. 식별기준에 따른 (개인적) 평가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사적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안에서 완성된 ‘공적계시’를 특정한 시대 상황에 결부시켜서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그 정당성이 있다. 근래에 성모님과 관련된 환시나 신비한 현상을 통해서 전달되었다고 주장하는 메시지는 주로 인간의 갖가지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임박했으니 끊임없이 기도하고 철저히 회개하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러면 이 내용이 ‘공적계시’와 부합하는가?


지속적인 기도와 회개의 촉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평소에도 자주 기도하셨고, 특히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는 올리브 동산에서 성부께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졸고있는 제자들에게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촉구하신다(루가 22, 39-46 참조).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도 회개에 대한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학살 당한 사건과 관련해서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루가 13,1-5 참조).


그렇다면 성모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들이 ‘사적계시’를 받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기도와 회개의 촉구가 성서 안에 들어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측면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들은 대부분 세상의 파멸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어둡고 떨리는 공포 분위기를 조장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메시지에서 나타나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분노에 가득 찬 엄한 심판자의 모습을 지닌다. 이런 모습은 신약성서와 그리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예수께서도 심판의 말씀을 하시지만 하느님을 분노에 가득 찬 분으로 선포하지는 않으셨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복음,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선포되고, 병든 이들이 치유되며, 죄인에게 용서가 실현되기에 기쁜 소식인 것이다. 사람이 해야할 것은 이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자신도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된다. 즉 하느님께 자비, 치유, 용서를 받았으니 이웃에게 그것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하지만 하느님께 무한한 자비를 받았음에고 불구하고 이를 이웃에게 베풀기를 거부할 때 심판의 경고가 따른다(마태 18,23-35 참조). 이런 전체적인 맥락이 간과된채 미래에 대해서 경고 일색으로 어둡고 공포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쁜 소식이라는 밝은 측면은 제쳐놓고 심판의 경고만을 확대, 과장해서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주눅들고 의기소침하게 만든다면,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왜곡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고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 규정에 대한 논쟁에서 어느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이단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복음의 진리를 온전하게 선포하지 않고 그 일부만을 선별해서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이단으로 빠질 위험이 크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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