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고해성사 밖에서의 죄사함의 길
형식을 갖추고 공식적으로 실행하는 성사적인 화해와 형식을 갖추지 않은 화해, 즉 개인간의 사적인 화해 혹은 공동적으로 거행되면서 비(非)전례적인 화해 사이의 경계는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전례적 형태로 거행되는 공적인 교회의 화해 행동과 전례 밖에서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참회, 화해, 회개는 서로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고 하겠다. 즉 전례적 화해 예식은 교회 공동체가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화해를 바탕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공적인 전례적 화해 예식은 내용이 없다), 일상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화해의 종교적인 깊이(여기에도 하느님이 행동하신다는 사실)는 전례적인 표지를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4.2.1. 전례 밖에서의 화해(참회) 실천의 길
그렇기 때문에 고해 성사를 고찰하기 전에 비전례적으로 화해를 실현하는 방식들도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들은 분명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경우가 많기에 여러 가지이고, 그래서 모두 다 헤아리기는 어렵다. 단지 몇가지 중요한 것과 그 신학적인 의미만을 지적해보자.
1) 공동체 내의 분쟁과 갈등을 (훈계, 죄의 고백,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면서) 형제적으로 해결한다. 이는 마태오 복음이 제시한 공동체 안에서 죄를 극복하기 위한 규칙 중에서 첫번째 두가지를 실현하는 길이다 (마태 18, 15-17).
2) 성서 봉독과 기도 또한 회개와 죄 사함의 장소이다.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서 죄인은 자신의 죄스러운 처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요구와 행동을 변화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선물인 용서를 체험하게 된다; 이런 경우 말씀은 단지 정보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말하는 바를 실제로 실현하는 효력을 갖는다. 그리고 신자들이 함께 모여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드리는 경우 분명히 들어짐이 약속되어 있다 (마태 18,20).
3) 교회가 구체적으로 공개적으로 범한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도 참회의 실현에 속한다: 교회는 “항상 정화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해야” 한다(교회헌장 8항).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목표로 하는 사회적인 개혁에로 교회가 움직이는 것도 교회의 참회 행동에 속한다고 하겠다. 정의와 평화의 실현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회개 설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행동 모두에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용서와 화해가 실현된다.
4.2.2. 고해성사 외의 전례적인 화해 실현
교회 전례 안에도 여러 가지 방식의 화해와 용서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
1) 회개와 용서를 위한 고전적인 성사는 세례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삶 전체는 세례성사를 통해 받은 회개와 용서의 은혜를 체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찬례를 통해서 화해의 예식이 항상 반복된다. 용서와 화해를 선사하는 성찬의 기본 틀과 정신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성찬례의 구성 요소들도 이를 표현한다: 성찬례 시작의 참회와 용서의 청원, 하느님 말씀의 봉독, 성찬예식에서 나타나는 죄의 용서를 위한 계약의 피라는 주제, 평화의 인사,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는 주제, 빵을 쪼개는 동작, 영성체 전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나으리라”는 청원, 쪼개진 빵을 서로 나누어 영함 등.
3) 1973년 로마에서 새로운 고백 성사 예식서가 발간된 이래로 공동 참회예식도 교회 공식적인 전례에 속한다. 이에 대한 성서적 본보기는 요엘서 1-2장에 나타난 백성들의 참회 모임에서 찾을 수 있다. 참회 예식은 성찬례의 한 면을 특별히 주제화한 전례 예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죄의 고백과 용서의 선포. 신자들이 함께 모여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참회 예식은 (1) 신자 공동체는 함께 속하여 있고, 용서에 대한 공동의 희망을 갖고 있으며, (2) 하느님과의 화해는 인간들 서로 간의 화해와 연결되어 있고, (3) 진정한 용서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함께 모인 곳에서 이루어지며, (4) 공동체는 전체적으로 죄인이고, 그래서 지속적인 쇄신을 필요로 함을 알고 있다는 것의 표지가 된다.
4) 병자성사도 전례적인 화해와 용서의 실천이다. 그안에서는 특히 구원사건이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전체 인간의 구원과 치유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표현된다.
4.3. 교회의 행위와 하느님의 용서 사이에 지속적으로 자리하는 긴장
용서의 사회적―교회적 차원을 강조하더라도 교회를 통한 용서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용서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 사이의 이런 지속적인 긴장은 고해성사의 역사 안에서 항상 의식되었다.
마태오 복음은 극단적인 경우에는 공동체에서 배척하라는 규칙 (마태 18,15-18)을 제한없이 용서하라는 예수의 요구 사이에 두었는데, 이로써 자신들 고유의 참회 규칙을 상대화한다. 실제로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누군가를 제자 그룹에서 배척했다고 전하는 귀절은 없다. 이렇게 예수의 행동과 교회 행동 사이의 차이는 이미 신약성서 내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고대 교회는 5백년 이상 지속적으로 참회 이후 다시 잘못한 이들에게 두번째의 교회적 참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는 이렇게 해서 성찬의 공동체에서 제외된 사람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겼다 ― 이는 하느님의 용서의 가능성이 교회의 용서 가능성 보다 훨씬 크다는 의식을 반영한다. 중세와 근세의 신학은 비록 고해성사를 거치지 않고서도 완전한 통회을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죄의 사함을 받는다는 확신을 지속적으로 간직하였다.
교회의 행동과 하느님의 행동 사이의 긴장은 근본적으로 항상 감안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용서을 가까이 전하는 성사라고 지칭되지만, 그리스도와 위격적 결합(unio hypostatica)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용서의 도구이고 용서의 장소라고 하지만, 교회 자신이 오류와 죄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하느님 행동보다는 처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다시 받아들이는 교회의 결정이 무류적으로 하느님의 행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