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니콜라오 1세 교황 Nikolaus Ⅰ. 858~867
니콜라오 1세는 858년 4월 24일 독일 황제 로타르 2세의 임석하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니콜라오 1세 교황은 중세기 초,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교황 가운데 한 분이다. 마치 예언자처럼 교황권의 수호를 위해 헌신하였고, 교황에게 교도권과 모든 이들이 복종해야 할 지도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있어서 마찰이 없을 수 없었다. 첫 번째 마찰은 라벤나에서 발생하였다. 라벤나의 대주교는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직접 라벤나에 나타나서 이 마찰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라벤나의 대주교는 교황에게 항복하였다. 두 번째 마찰은 프랑크의 수도 대주교 힌크마르(Hinkmar von Reims)와 관련해서 발생하였다. 힌크마르는 자신의 교구 소속 부주교를 퇴위시키고 파문시켰다. 이에 대응하여 파문당한 부주교는 교황에게 항소하였다.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위이시도르 위조 문서」를 이용하였다. 그래서 힌크마르는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 번째의 마찰은 로타르 2세 국왕과 관련해서 발생하였다. 즉 로타르 2세 국왕은 적법하게 결혼한 자신의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의 연인과 결혼하였다(862년). 메츠(Metz)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로타르 2세 국왕의 두 번째 결혼을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메츠 시노드의 결정을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시노드의 결정은 결혼의 불가해소성이라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위배하였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오 1세 교황은 자신의 재임 기간 중 비잔틴의 간섭 때문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 비잔틴에서는 858년 총대주교 이냐시우스(Ignatios)가 퇴위하였고, 포시우스(Photios)가 그의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냐시우스가 자의적으로 총대주교직으로부터 물러났으며, 포시우스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포시우스는 자신의 선출을 860년 교황에게 통보하였다. 이냐시우스의 퇴위에 실망한 사람들은 포시우스의 적법한 선출을 문제삼았다.
황제 미카엘(Micha디) 3세는 물론, 포시우스도 교황에게 항소하였다. 그리고 이 사태의 해결을 위해 교황의 특사를 파견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교황이 파견한 두 명의 특사는 861년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포시우스의 선출은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고 선언하였다. 이때 비잔틴의 교회는 처음으로 교회의 규정과 관련해서 로마의 최고의 지도권을 조건 없이 인정하였다. 포시우스의 적대자들에 의해 속임을 당한 교황은 자신이 파견했던 특사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863년 포시우스를 파문시켰고 이냐시우스를 다시금 총대주교로 등용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황제와 이냐시우스와 포시우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자신의 결정을 통지하였다. 황제가 교황의 결정을 거부하자 교황은 로마의 수위권을 강조하였다.
불가리아에 대한 선교 문제와 관련해서 비잔틴 교회와의 갈등은 점점 더 첨예화되어 갔다. 불가리아는 비잔틴의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864년 비잔틴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불가리아의 제후 보리스(Boris)는 866년 세례를 받은 후 즉시 로마에 접근할 것을 모색하였다. 불가리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 치릴로(Cyrill)와 메토디오(Methodius) 역시 그러하였다. 이러한 모색은 동방 교회의 불신을 일깨웠다. 그래서 황제는 867uss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를 소집하였고, 이 시노드는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퇴위시켜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퇴위와 파문의 소식은 867년 11월 13일 교황의 서거 후에 알려졌다. 니콜라오 1세 교황의 재임 기간 중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의 불화는 점점 더 깊어만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