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노첸시오 3세 교황 Innocenz 3.

 208. 인노첸시오 3세 교황  Innocenz Ⅲ.  1198~1216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본래 이름은 로타이레(Lothaire) – 세니(Segni)의 백작 – 였다. 그는 1160년경 출생하였으며,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황 가운데 한 분으로 인정받고 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190년 부제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훌륭한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교회법에 정통하였고, 명쾌한 통찰력을 소유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자신의 교황 선출을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확신하였고, 스스로를 하느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ꡐ하느님의 종ꡑ또는 ꡐ그리스도의 대리자ꡑ로 불렀다. 인노첸시오 3세는 1198년 1월 8일 38세의 나이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직무의 수행 시초에 인노첸시오 3세는 벌써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통찰하였고, 이 과제는 그의 교황 재임 전 기간을 지배하였다.


  1197년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자 이중의 선거가 발생하였다. 일단의 지지자들은 필립(Philipp von Schwaben)을 독일의 황제로 선출하였으나, 다른 지지자들은 오토(Otto von Braunschweig)를 독일의 황제로 선출하였다. 그 결과는 시민 전쟁의 발발로 나타났다. 필립과 오토는 서로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으려고 모색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한 서한을 통해 자신이 이 사안에 대한 결정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전례에 따르면 교황들이 황제들을 대관시켰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제시하였다.


  1201년 3월 1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오토를 독일의 황제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대부분의 제후들은 필립을 독일의 황제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필립이 1208년 살해되자 오토는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1208년 오토는 선거를 통해 독일의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1209년 10월에 로마에서 오토 4세라는 이름으로 황제로 대관되었다. 하지만 황제 오토는 자신이 독일의 국왕으로 선출될 당시 교황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 국가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그 결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황제 오토를 파문시켰다. 독일의 제후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1211년 9월 뉘른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의 국왕으로 선출하였고, 제후들은 1212년 12월 이 선거를 재확인하였다. 1212년 12월 9일에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로 대관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대한 감사의 답례로 1213년 7월 12일에 「에거(Eger) 황금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 칙서는 황제 오토 2세의 약속을 재확인하였고, 독일의 제후들도 이 칙서를 인준하였다. 이로써 교회 국가는 독일 제국의 법에 의하여 현재의 형태로 인정받게 되었다. 1215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아헨(Aachen)에서 한 번 더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영국에서 발생한 분쟁도 조정해야만 하였다. 캔터베리의 주교 선출과 관련해서 영국 국왕의 개입으로 부정 선거 시비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영국의 국왕은 이 요구를 묵살하였다. 그 결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영국 전역에 파문의 처벌을 내렸고, 국왕에게도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국왕은 교황과의 화해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결과는 1215년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를 통해 표현되었다. 이 「마그나 카르타」는 영국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프란치스코에 의해 창설된 수도회를 승인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 승인으로 말미암아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가난에 대한 운동이 교회 내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알비파와 발도파는 가난을 강제로 실천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속하는 수도승들은 순회 설교가로 활동할 수 있는 권리도 확보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의 교황 재임 말기인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는 1,200여 명의 참석자를 기록하는 중세기의 교회 모임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모임이었다. 모든 주교들은 의무적으로 공의회에 참석해야만 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개혁을 추진하고, 신앙과 윤리를 강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려고 모색하였다. 공의회는 독일의 황제 선거와 관련해서 프리드리히의 선출을 인정하였다. 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재확인되었고, 주교의 주요 직무로서 신앙의 전파와 사목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은 부활 시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재확인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공의회의 결정을 실제로 관철시키려고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십자군 운동과 관련된 계획을 실현시키는데 있어서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미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재임 초기에 일단의 함대가 베네치아를 출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진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으나,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와의 재일치를 거부하였다. 더구나 서구의 군대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심하게 약탈하였기 때문에 로마에 대한 적개심이 깊어졌고, 그 결과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관계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공의회는 1217년에 제5차 십자군의 출정을 결의한 바 있다. 실제로 1217년 십자군이 출정하였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프랑스는 영국을 상대로 하여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와 영국은 십자군 출정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의 군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16년 7월 16일 십자군의 출정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열을 조정하기 위해 체류하고 있던 페루자(Perugia)에서 서거하였다. 역사가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인물 됨됨이와 관련해서 한편에서는 인간을 무시하는 냉혈한,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간,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필요하다면 테러도 서슴지 않는 인간 등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다른 편에서는.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교황직을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켰고, 그 결과 교황직은 서구 그리스도교를 이끌어 가는 질서 인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재임하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던 결정들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3세 후임자들 가운데 몇몇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결정이나 주장들을 계속 존속시키는 문제와 관련해서 가끔 고심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인노첸시오 3세 재임하의 교황직은 중세기 동안 그 절정에 도달하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예비신자교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