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제니오 4세 교황 Eugen 4.

 245. 에우제니오 4세 교황  Eugen Ⅳ. 1431~1447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원래 이름이 가블엘(Gabriel Condulmer)이었고,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의 조카였다. 그는 1431년 3월 3일 에우제니오 4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388년경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였으며,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였다. 1407년에는 시에나의 주교로 재직하였고, 1408년에 사제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매우 출중한 인물이었고 교황으로 선출된 당일, 자신의 선임자 마르티노 5세에 의해 지명되었던 바젤 공의회 – 1431년 7월에 개막되었다 – 의 의장을 추인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1년 11월에 아주 소수만이 공의회에 참석하였기 때문에 바젤 공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볼로냐 공의회를 새로 소집하였다. 그사이 바젤 공의회는 개막되었다. 그래서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교부들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공의회를 해산하는 칙서를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다. 교부들은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상기시켰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정치적인 압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교부들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더구나 대댜수의 추기경들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바젤 공의회의 결정을 추인하였다. 바젤 공의회가 교회의 개혁 문제와 관련해서 제기한 기대는 새로운 논쟁거리를 야기하였다. 즉 공의회는 교황 선거를 새롭게 규정해야 했으며, 추기경의 숫자를 24명으로 제한해야 했고, 어떤 국가도 전체 추기경의 1/3 이상을 배출할 수 없었다. 동방 교회와의 일치 문제를 둘러싸고 교황과의 마찰이 발생하였다. 동방 교회와의 일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적합한 장소로서 대다수의 추기경들은 바젤이나 아비뇽을 원하였으나 소수의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의 도시 중에 한 곳을 주장하였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소수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1437년 9월 18일 공의회를 페라라(Ferrara)로 옮기기로 결정하자, 바젤의 공의회에 참석하고 있던 교부들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공의회의 법정으로 소환하였다. 유럽의 국왕들은 새로운 교회 분열이 발생하게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바젤 공의회가 교황을 거슬러 제소할 것을 중지하도록 요구하였다. 아울러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는 공의회의 장소를 옮기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바젤 공의회와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국왕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약속하였다. 이후 황제 지기스문트가 서거하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더 이상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1437년 12월 30일 페라라 공의회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선언한 날짜에 개회되었으나, 1439년 1월 10일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공의회를 다시금 피렌체로 옮겼다. 왜냐하면 피렌체가 공의회에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었다.


  1439년 7월 6일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일치를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행사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해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신망은 높아졌다. 1439년 아르메니아 교회와의 일치가 선언되었고, 1442년에는 에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콥트 교회와의 일치가 선언되었다. 1443년 피렌체의 공의회는 장소를 로마로 옮겼고, 이 기회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도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1444년 9월에는 로마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콥트 교회와의 일치가 선언되었고, 1445년에는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주의와의 일치도 선언되었다.


  그사이 바젤에서는 반(反 )교황 노선이 강화되었다. 바젤 공의회는 1439년 5월 16일,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였고, 교황은 공의회를 해산하거나 공의회의 장소를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공의회의 선언을 위반하는 교황은 이단자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선언을 통해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퇴위 가능성을 의도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1439년 6월 25일 바젤 공의회의 교부들 – 19명의 주교들만 참석하였다 – 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퇴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이들 19명의 주교들에게 파문의 처벌을 내리자 이들은 펠릭스 5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사태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독일의 제후들은 교황에게 새로운 공의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독일 제후들의 압력 때문에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으나, 1447년 2월에 이르러서는 질병 때문에 이 사안을 제대로 검토할 수 없다고 태도를 바꾸어 버렸다. 이와 같이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교부들의 가르침은 물론 교황좌의 권리를 고수하려고 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47년 2월 23일 서거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이루는 데 기여하였다. 물론 동방 교회의 신자들은 서방 교회와의 일치에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의회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불투명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권을 강화시키는 데 있어서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 결과 바젤의 공의회와 대립 교황 펠릭스 5세는 아무런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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