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하드리아노 6세 교황 Hadrian Ⅵ. 1522~1523
종교 개혁으로 신앙의 분열이 발생한 시대에 교회는 진지하게 교회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교황을 기대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기대감 속에 선출된 교황이 하드리아노 6세였다. 하드리아노 6세는 1522년 1월 9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459년 위트레흐트(Utrecht)에서 출생하였으며, 교육가로서, 그리고 황제 칼 5세의 고문으로서 활약하였고, 동시에 토르토사(Tortosa)의 주교로서 스페인의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517년에 그는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로마에서 교황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로마에 체류하지 않았으나, 1522년 3월 8일에 교황 선출을 수락하였다. 1522년 8월 말경에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외국인으로서 로마에 입성하였으나 로마인들은 그를 별로 환연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교황청의 개혁과 재정의 절약 정책으로 새로운 적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1522년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프란체스코(Francesco Chieregati)는 신앙의 분열에 로마 교회의 책임도 있음을 고백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는 소책자를 통해 교황 하드리아노 6세를 공박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는 신앙의 분열을 해결하는 문제와 터키의 위협에 대적하여 유럽의 군주들이 동맹을 맺는 문제를 시급한 문제로 지적하였다. 그 당시 벨그라드가 터키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 하드리아노 6세의 노력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교회와 교황청의 개혁은 어렵게 진행되었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는 이탈리아의 생활 관습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교회의 개혁을 위한 계획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는 협력자를 얻는 데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의 직무 수행에 대한 실망은 점점 커져만 갔고, 이러한 사실을 결국 교황 하드리아노 6세의 죽음 – 1523년 9월 14일 -을 초래하였다. 교황의 죽음은 교황에게 기대하였던 개혁에 대한 희망을 좌절시켰다. 그 결과 교황 하드리아노 6세의 사후 교회 개혁 구상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독일의 경우 신앙의 분열로 말미암은 여파는 점점 더 확산되었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전에 비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황으로 재임하였던 마지막 교황이었다.
